소설리스트

괴물의 아내-84화 (84/113)

84화.

“…….”

무슨 말이지? 아직도 키스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해연은 영문을 알 수 없는 남자의 말에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다른 여자? 왜 다른 여자 이야기를 지금…….

“……!”

그의 말이 조금 전 자신이 이성을 잃고 추궁했던 질문에 대한 답이란 걸 알아차리자마자 해연의 얼굴이 단숨에 불긋하게 달아올랐다. 이현의 대답을 듣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말이 이현에게 어떤 식으로 들렸는지도.

‘미쳤나 봐.’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몇 번째 여자였냐니. 그걸 물어서, 대답을 들어서 어쩌려고? 설령 이현의 말처럼 그에게 여자는 오직 자신뿐이라고 해도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하지만 이미 뱉어 버린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질투 같은 게 아니었다. 그저 수많은 여자를 아프게 한 남자를 비난했던 것뿐이었다. 절대로 질투 같은 게 아니야. 해연은 남자의 오해를 풀기 위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나, 나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요.”

“무슨 뜻이요?”

“그…….”

되돌아온 물음에 말문이 턱 막혔다. 질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 정말 그렇게 들릴 것 같아서. 그럼 남자의 오해가 더 깊어질 것 같아서. 하지만 남자는 눈을 반짝이며 웃고 있었다.

그래서 해연은 회피를 선택했다. 돌아가야 한다. 이 남자와 계속 같이 있으면 또 어떤 말을 할지 알 수 없었기에. 해연은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의 어깨를 쿵쿵 쳤다.

“내, 내려 줘요. 빨리.”

“좋아요.”

이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후 해연을 바로 뒤에 있는 아일랜드 식탁 위에 앉혔다. 그리고 다시 입을 맞췄다. 내려 준 건 맞는데 그렇다고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해연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남자가 그녀를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흣, 아니, 이게 아니라 돌아갈, 으응…….”

머리를 뒤로 빼고 해연이 말을 하려고 하자 이현은 그녀의 뒷덜미를 손으로 감싸 제게로 바짝 끌어당겼다.

입술이 떨어질 때는 정신없이 이어지는 입맞춤으로 해연이 숨을 쉴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괴로워할 때뿐이었다. 그는 해연이 몇 번 숨을 들이켜 호흡하자 그새를 못 참고 고개를 반대로 틀어 다시 입을 맞췄다.

입을 맞추지 않고는 한시도 버틸 수 없다는 듯이 탐욕스럽고 성급한 입맞춤이 계속되자 해연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입술과 혀가 닳아 없어지는 것 같았다.

해연은 입을 벌린 채 약한 신음을 흘렸다. 남자의 혀가 입천장을 길게 훑자 저도 모르게 몸이 튀었다. 그는 해연의 입안을 모조리 탐했다. 해연의 혀를 감싸고 제게 끌어 이로 약하게 깨물고 빨았다. 그 순간 그의 어깨를 짚고 있던 해연의 손가락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흐읏, 으응, 읍!”

“하아…….”

남자가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와의 키스가, 너무, 좋았다……. 달콤한 열락이 몸을 들뜨게 했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이대로 침몰하고 싶을 정도로.

그의 어깨를 헤매던 해연의 손이 조금씩 움직여 그의 목에 감겼다. 해연의 목덜미를 감싸고 있던 남자의 손도 내려와 그녀의 허리를 바투 끌어안았다. 온몸이 남자와 맞붙었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들어온 남자의 하체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의 성기도 이미 두툼하게 발기되어 있었다. 해연은 남자의 하체에 음부가 눌리며 흔들릴 때마다 밭은 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뜨거웠다. 해연의 허리도 저절로 움직였다. 얇은 바지와 속옷이 밀어붙인 남자의 하체와 맞닿아 음부에 착 달라붙어 자극했다.

남자의 희열과 열기는 그녀에게까지 옮겨져 애써 잠재운 욕망에 불을 붙였다. 남자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해연의 다리가 욕망을 따라 그의 허벅지와 엉덩이를 문질렀다. 의식하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이 남자와 나누는 성애가 어떤 쾌감을 일으키는지 아는 육체가 제멋대로 남자를 부추기고 있는 거였다.

해연의 허리가 풀려 반쯤 식탁에 누웠을 때가 돼서야 두 사람의 입술이 겨우 떨어졌다.

“하아, 하, 하아…….”

해연은 상체를 들썩이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숨이 어느 정도 가다듬어지자 그녀는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남자와 자신의 타액으로 흠뻑 젖은 입술은 퉁퉁 부어 감각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현은 식탁의 테두리에 양손을 댄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꿈결을 거니는 듯한 얼굴로. 아까 보았던 예쁜 보조개를 매달고. 자신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감정의 변화가 빨랐다. 그리고 그건 모두 자신의 말과 행동에 따른 변화였다.

지금 남자의 표정이 어떻든 중요한 게 아니어야 했다. 자신의 동의도 받지 않은 키스에 이게 무슨 짓이냐고 비난하고 화내야 하는 때였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서 시선이 떼어지지 않았다. 홀린 것처럼…….

그에게 여자는 자신뿐이라던 말이 정말이었을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해연은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흠칫 놀라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애써 한 부정과 달리 그녀의 뺨이 이번엔 다른 의미를 담으며 상기됐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와 함께 입술을 누르고 있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해연은 몽롱하게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여기서 밀쳐내야 한다. 도망, 가야 해. 더 늦기 전에. 돌이킬 수 없는 순간까지 가기 전에 어서.

그러나 그를 밀어내야 할 손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시선에서, 단단한 몸에서 벗어날 행동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해연은 남자의 품에서 안온함과 함께 무력감을 동시에 느꼈다.

자신에게 끔찍한 짓을 했던 남자에게 너무 쉽게 떨리고, 너무 쉽게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해연은 이걸 어떻게 멈춰야 할지 알 수 없어 막막했다. 결국 그녀가 한 선택은 그를 비난하는 거였다. 명백한 사실이기도 했고, 너무 예뻐서 자신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남자의 웃음을 무너트릴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이기도 했다.

“당신이 미워. 너무…….”

“…….”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이 모두 엉망이 돼 버렸어.”

예상대로 반짝반짝 빛나던 그의 눈동자에서 빛이 꺼지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휘어 예쁜 웃음을 짓던 입술의 끝이 내려왔고, 오목하게 들어갔던 보조개도 사라졌다. 두 사람 사이에 달아올랐던 공기도 내려앉았다.

이걸 바라고 한 말이었는데, 도리어 속이 답답해졌다. 남자를 상처 입히면 전염이라도 된 것처럼 그 상처가 제게 되돌아왔다. 그가 상처 입은 얼굴을 하면 마음이 아파서 위로하고 싶어진다. 그런 얼굴 하지 말고 예쁘게 웃으라고, 그렇게 다독이고 싶어진다. 그래야 자신이 덜 아플 것 같아서. 이해가 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에 해연의 이해는 필요 없었다. 마음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해연은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올려 눈을 가렸다.

“왜 자꾸 당신이 불쌍하지?”

“해연…….”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이건 너무 불합리해.”

처음에는 주저하듯 속삭이던 목소리에 옅은 물기가 배었다. 그런 일을 겪고도 마음이 흔들린다니. 이 남자가 불쌍해 보이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해연은 자신을 이렇게 만드는 강이현이라는 남자가, 괴물이 두려워졌다.

대체 당신의 정체가 뭐지? 뭐길래 나를 이렇게 쉽게 흔드는 거야.

‘당신에게 다른 여자가 있든 말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질투 같은 게 아니어야 했지만, 그건 질투였다. 아무리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어도 결국 질투가 맞았다. 이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있는 게 싫은 거였다. 자신은…….

왜 자꾸 이 남자에게 흔들리고 틈을 보이는 걸까. 흔들리고 있다는 걸 가장 보여선 안 될 사람에게 속내를 모두 들키고야 말았다. 해연은 조금 전 자신이 뱉었던 말이 사무치게 후회됐다. 그리고 여자는 오직 자신뿐이라던 남자의 말에 설렜던 제 마음을 비난했다.

“왜 당신을 원망하지도 못하게 만들어.”

해연의 원망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이현이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겨우 소리 내어 말했다.

“……미안해요. 내가 생각 없이 기뻐해서.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러니까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나쁜 새끼. 왜 불쌍한 척해. 왜 당신이 나보다 더 괴로운 것처럼 굴어.

물기가 스며든 눈동자가 남자를 원망하듯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해도 저렇게 먼저 납작 엎드려 버리니까 미움도 분노도 갈 곳을 잃었다. 차라리 뻔뻔하게 나왔다면, 쓰레기처럼 굴었으면 마음껏 미워할 수 있을 텐데…….

‘그런데 그럴 수가 없어.’

멍청한 한해연. 바보야. 제발 정신 좀 차려.

“나한테 왜 그랬어? 그냥 평범하게 시작했어도 됐잖아. 그랬으면, 그랬으면…….”

그랬다면, 분명 자신은 이 남자가 사람이 아니었어도 개의치 않았으리라. 그런 짓을 당하고도 이렇게 흔들리는데 평범하게 만나 평범하게 연애했더라면 우리의 지금은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힘들고 괴롭고 아프지 않았어도 됐을 거다.

허탈한 마음에 눈망울에 잔뜩 고여 있던 물이 결국 뚝뚝 떨어졌다. 눈물은 천천히 눈을 가리고 있던 손등을 적시고 볼과 귀로 흘러내렸다.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조용히 해연을 바라보고 있던 이현이 입술 끝에 맺힌 눈물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닦았다. 물기에 젖은 입술이 그의 손끝을 따라 힘없이 벌어졌다.

아까와 다른 조심스러운 접촉에 해연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리고 그 손을 뻗어 남자의 셔츠를 잡아끌었다. 아주 약한 힘이었지만, 그는 순순히 해연이 이끄는 대로 허리를 숙였다.

해연은 아주 가까이에 다가온 남자의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얇은 표피가 찢어져 핏물이 배어 나왔지만 남자는 약한 신음만 흘릴 뿐, 계속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해연은 그를 밀어내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은 채 가는 한숨을 흘렸다.

이 떨림은 누구의 것일까. 당신? 아니면 나인가.

아니,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살짝 내리뜬 해연의 눈이 완전히 감겼다. 그 순간 이현의 혀가 그녀의 입술 안으로 파고들었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그의 혀가 부드럽게 그녀의 혀에 감겼다. 점막과 점막이 맞부딪히는 건 내밀한 속을 온전히 나누는 듯한 묘한 감각을 느끼게 했다.

섣부른 기쁨도, 설렘도 없어 도리어 더욱 깊은 격정이 흐르는 입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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