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의 아내-83화 (83/113)

83화.

그게 자신의 최선이었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해연이 힘겹게 꺼낸 말에 이현이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마치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은 꽃처럼 활짝 웃었다. 아래로 살짝 쳐진 눈꼬리가 둥글게 접힌 눈에 더 길어졌고, 웃느라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하얀 치아가 드러났다. 왼쪽 볼에 작은 우물이 살짝 파였다.

‘보조개가 있었구나.’

처음 봤다.

그녀가 원치 않았던, 선택지가 없어 강제로 그와 함께 있었던 기억을 모두 뒤져 보아도 저 보조개를 본 기억은 없었다. 그래서 속이 더 복잡했다. 노력하겠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왜 고작 그 말에 저렇게 기뻐해.

‘이해할 수 없는 사람.’

해연은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저 얼굴을 계속 보니 기분이 이상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현의 확답으로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아직 믿지 않는다는 말과는 달리, 해연은 그가 이런 부분까지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까지 저열한 거짓말을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았기 때문에.

그래, 유영이는 괜찮을 거다. 여기 오기 전에 이미 괜찮다고 확인 전화도 했고, 또 그의 부하가 경호하고 있다고 하니까.

해연은 마지막 남은 긴장을 풀고 어깨를 늘어트렸다. 문득 아까 이현이 그녀가 처음 했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은근슬쩍 넘어갔다는 게 떠올랐다. 해연은 이 이상한 분위기를 환기할 겸 그가 아침에 식사를 가져왔던 걸 다시 언급했다.

“왜 아까 말엔 대답을 안 해요? 이제 아침 가져왔던 그거, 이제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필요 없으면 해연이 버리면 돼요.”

나는 계속 그렇게 할 거니까. 물러서지 않는 이현의 말에 해연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를 보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가, 싫어하는 짓은 안 하는 거 아니었어요?”

그 말에 이현이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해연은 그에게 자신이 겪은 불편을 더 털어놓았다.

“가격대도 그렇고요. 내가 그런 걸 아침에 매번 어떻게 먹어요? 당신 때문에 유영이한테 거짓말까지 해야 했다고요.”

말을 할수록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퉁명스러워졌고, 곧게 뻗었던 가지런한 눈썹이 살짝 아래로 내려갔다. 또 눈에 바짝 힘을 주고 불만을 강조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이현은 웃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했다. 그는 신음 같은 옅은 헛기침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부분은 더 주의할게요.”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요!”

못 알아들었을 리가 없다. 계속 딴말을 하는 건 결국 하고 싶은 건 모두 하겠다는 뜻이었다. 해연이 그를 노려봤지만, 이현은 나긋한 미소만 지었다.

“내가 원하는 걸 하나 들어준다면, 그럼 해연이 원하는 대로 할게요.”

“……조건을, 건다고요? 당신에게 그럴 자격이 어디 있다고.”

해연이 쏘아붙였지만, 이현은 꿋꿋이 그가 원하는 말을 했다.

“당신이 이사할 집, 내가 구할 수 있게 해 줘요.”

“…….”

어이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해연은 화를 내지 않고 차분히 그를 바라봤다. 저 조건을 내가 들어주리라 생각하고 말한 걸까?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면 그녀가 샀던 집을 그렇게 쉽게 내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집.’

해연은 갑자기 든 묘한 예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설마…….’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이 남자는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구와 가전까지 모두 매입하겠다며 돈을 시세보다 더 얹어 줬던 것까지 모두 이해가 됐다. 해연은 미심쩍은 눈으로 이현을 바라봤다.

“혹시 내 집, 당신이 샀어요?”

주저하며 물은 질문에 이현이 살짝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체……. 아니, 다시 내가 살 테니까 다시 팔아요. 왜 그 집을 당신이 사요?”

“그건 안 돼요. 그 집은 이제 내 거예요. 당신이 버리고 갔잖아요.”

이현이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이 해연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했다. 해연은 기가 막혀 입을 떡 벌리고 그를 황망히 바라봤다.

“내가 왜 팔았는지 말해야 해요? 그 이유를 몰라요?”

“……하지만 당신에겐 언제든 버리고 갈 수 있을 정도의 의미밖에 없는 곳이죠.”

우리가 함께했던 기억은 항상 내게만 의미가 있었으니까. 이현이 살짝 눈을 내리뜨고 씁쓸하게 말했다. 아까의 보조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음울한 그림자가 그의 온몸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웃고 있던 얼굴보다 이게 더 자연스러웠다. 해연은 또다시 이상한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꼭 이 모두가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그가 저런 표정을 지어서.

“내가 당신의 집을 가진 게 그렇게 싫어요? 당신이 버린 걸, 주웠을 뿐인데도……?”

“그…….”

‘이게 아닌데. 내가 왜 이 남자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거지?’

자신은 정당한 요구를 한 것뿐이었다. 오히려 그의 행동이 더 뻔뻔한 거였다. 그런데 당연히 싫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뭔가 상처받은 어린애에게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아서. 해연은 말문이 막힌 것처럼 입을 꾹 다문 채 저를 올려다보는 그를 망연히 바라봤다.

가만히 해연의 대답을 기다리던 이현이 조금씩 입술을 당겨 미소를 만들어 냈다. 그건 포기를 담은 듯이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해연은 가슴이 따끔해지는 통증을 느꼈다. 됐다고, 그건 그냥 당신이 가지라고, 이 남자와 쓸모없는 실랑이를 하느니 어차피 팔아 버린 거 그냥 포기하자고 해연이 한발 물러서려고 할 때였다. 이현이 그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돌려줄게요. 당신이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줄 몰랐어요.”

“…….”

“대신 내가 원하는 한 가지만 들어줘요.”

“당신이 구한 집에 사는 거라면,”

“아니요. 그건 당신이 이미 거절했으니까 됐어요.”

“그럼…….”

해연은 이현이 다른 조건을 붙이자 그제야 숨통이 조금 트였다. 하지만 안도했던 것도 잠시, 뒤를 잇는 그의 말에 다시 숨이 막혔다.

“한 번만, 딱 한 번만이면 되니까, 언젠가 비가 온다면 나와 같이 그 비를 봐 주세요.”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있던 그가 해연의 손끝에 이마를 댔다. 마치 애원하듯이. 신에게 평생의 소원을 기도하는 것처럼 간절한 모습이었다. 고작 비를 보는 게 뭐가 그렇게…….

‘이제 나랑 봐요.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계속.’

이현과 함께 비를 보면 항상 나쁜 일이 생긴다던 말에 자신이 했던 대답이었다. 해연은 그제야 그가 왜 이렇게 어렵게 말을 하는지, 또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이해했다.

‘그래, 당신과 비를 보면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 같아. 그래서 내가 힘들었어.’

누가 그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도 자신과 비슷한 일을 경험했던 것 같다. 그걸 깨닫는 순간, 해연의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그럼 이렇게 간절한 모습도 그 사람에게 보였을까?’

엉뚱한 방향으로 튄 생각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불쾌했다. 불쾌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머리끝이 누군가 세게 당기는 것처럼 아팠다. 마치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듯한 기분이었다.

해연은 그에게 잡힌 손을 차갑게 빼냈다. 이현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담담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거절당할 거라고 이미 짐작했던 것처럼. 이미 수도 없이 거절당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체념 어린 얼굴이었다.

그 표정이 해연을 더욱 불쾌하게 했다. 대체 왜? 그게 어때서? 이 남자가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 행동을 했다는 것이 뭐가?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라고…….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왜 이런 기분을 느끼는지도 이해할 수가 없어 더 답답하고 불쾌했다. 감정의 제어가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 말고 몇 명에게 이렇게 했어요?”

“…….”

“내가 몇 번째예요? 당신이 제멋대로 홀려서 가지고 놀던 여자가.”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해연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 이 쓸데없는 의문도, 말도 안 되는 분노도. 그런데 이현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해서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다. 꼭 결코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마치 그녀가 유일하다는 듯이. 그런 순수해 보이는 얼굴로 또다시 자신을 현혹시키려는 것 같아서.

그래, 이 이해할 수 없는 분노는 모두 그것 때문일 것이다. 이 남자가 또 저를 속이려고 한다는 걸 알아서. 그것뿐이야. 다른 게 있을 리가 없어.

“갈게요.”

더는 그와 함께 있으면 안 된다. 그럼 지금보다 더 이상한 말을 하게 될 것 같았다. 유영이의 경호를 부탁하러 왔다가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튀어 버린 감정을 당사자인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 남자는 더욱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해연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고 한 발 내디뎠을 때, 그녀는 이현이 묘한 얼굴로 웃고 있는 걸 발견했다.

“……왜, 웃어요?”

그녀가 눈에 힘을 주며 묻자 그는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휘어진 눈매는 여전히 드러나 있어 해연의 신경을 건드렸다. 대체 왜 웃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분명히 후회할 것 같아 해연은 그대로 그의 방에서 나가려 했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잡고 제게로 휙 돌리지만 않았더라면.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와 목덜미를 꽉 잡아 벗어날 수도 없었다. 숨을 크게 들이켜 솟아오른 가슴이 남자의 단단한 가슴팍에 짓눌렸다.

“흣!”

정신없이 입술이 겹쳐졌다. 해연은 제 입술 안으로 파고드는 이현의 혀에 무방비하게 휘둘렸다.

“아읏, 으응, 흣, 아……!”

해연이 눈을 질끈 감은 채 짧은 신음을 연거푸 터트렸다. 다급한 입맞춤이 주는 아찔하고 달큼한 쾌감에 온몸의 감각이 곤두섰다. 해연이 그의 어깨를 꽉 쥐자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 엉덩이를 감싸며 들어 올렸다. 몸이 위로 붕 뜨자 해연은 익숙하게 양다리를 벌려 그의 허리에 감았다.

이러면 안 된다고 희미한 이성이 경고했지만, 이미 남자에게 휩쓸린 육체는 그 경고를 무시했다. 격렬하고 다급했던 키스는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남자의 혀가 그녀의 혀 아래를 나긋하게 쓸고 천천히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것으론 부족하다는 듯이 타액에 젖은 입술을 끊임없이 맞부딪혔다.

젖은 점막이 부딪혔다 떨어지는 소리가 부드러운 한숨에 섞여 야릇하게 울렸다. 달뜬 숨을 흘리며 해연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다 천천히 올라갔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다붓이 웃고 있었다. 이 순간이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이.

이현은 가쁜 숨을 쉬는 해연의 이마에, 볼에, 콧등에 가볍게 입술을 비볐다. 그리고 거칠게 갈라진, 열망에 고조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맹세코, 내게 다른 여자는 없어요. 나에게 여자는 당신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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