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하나가 아니야. 그런 괴물은.’
해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겁먹지 마. 지금 겁에 질려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그럼 이현은? 그리고 이현의 집에 있던 사람들도 같은 괴물인 건가? 안주희도, 윤시후도? 하지만 그들은 나를 공격하지 않았어. 그럼 뭐가 다른 거지?’
사실은 모두 한통속이라면? 이 모두가 또 강이현, 그 남자가 만든 연극이라면? 그럼 어떻게 하지?
‘분명 그가 괴물들의 우두머리 같았어.’
해연은 그에게 세뇌되어 별채에 머물렀을 때를 떠올렸다. 그 기억을 끄집어내는 건 조금이나마 안정을 찾은 그녀에게 가혹한 일이었지만, 제게 일어난 이상한 일들의 실마리를 잡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녀에게 벌어진 모든 일은 강이현, 그 남자를 중심으로 벌어졌기 때문에.
기억을 떠올리려 집중하자 오래된 화면처럼 흐릿했던 기억은 조금씩 선명해졌다. 그래, 모두가 그 남자의 말에 복종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별채는 마치 자신과 그 남자만 있는 것처럼 고요했고, 그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숨을 죽였다. 그래서 꼭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그 남자에게 복종하던 이들이 그의 몸에 상처를 입힐 행동을 했다고?’
해연의 속에서 다시금 이현에 대한 의심과 경계심이 솟아올랐다. 어쩔 수가 없었다. 고작 한 번 구해 줬다고 모든 의심을 풀기엔 그동안 그로 인해 겪었던 일들이 해연에게 지울 수 없는 큰 상흔을 남겼기 때문에. 하지만 그런 해연을 말리는 것은 어제 그가 보였던 눈빛과 표정이었다.
“…….”
해연은 피가 배도록 깨물고 있던 입술을 벌렸다. 이성은 가장 먼저 그를 의심하라고 하는데, 감정은 그가 한 짓이 아니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어제 자신을 향한 그의 눈은 거짓이 아니라고…….
‘모르겠어. 뭐가 맞는 건지. 바보가 된 기분이야…….’
차분히 상황을 정리하고자 했는데, 도리어 모든 것이 꼬인 기분이었다. 해연은 힘없이 소파에 주저앉았다. 이 짧은 고민만으로도 기력이 다한 느낌이었다.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던 해연의 상념이 다시 유영이에게 닿았다. 자신의 불운이 유영에게까지 닿았을까 봐 두려웠다. 그래, 너무 오래 유영이의 곁에 있었던 것 같다. 더 빨리, 제게서 멀리 떼어 놨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이렇게 불안하지 않았을 텐데. 그때, 불현듯 어젯밤 이현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유영이는 왜 건드렸어? 옆집에 이사 왔다던 그 남자, 당신이 부리는 사람이잖아.’
‘……믿지 않겠지만, 경호였어요. 당신 집은 위험한 위치에 있으니까. 이유영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당신에게 더 미움받을 거 같아서.’
경호. 해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래, 유영이의 곁에도 그의 부하가 지키고 있었어.’
그렇다면 지금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어제 병원에 갔을 때, 유영이 화장실에 갔다가 로비에서 그의 부하를 마주쳤다고 했으니까. 유영이 아무것도 모른 채 다신 만나지 못 할 줄 알았던 이웃을 만났다며 들떠 했던 말이 그때는 그렇게 끔찍했는데, 지금은 마치 구원처럼 느껴졌다. 설혹 그게 경호가 아니라 감시라 하더라도.
해연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신발조차 신을 정신이 없었다. 맨발 그대로 호텔 복도의 카펫에 서서 이현이 머물고 있을 방의 벨을 누르려던 해연의 손이 움찔 멈췄다.
‘만약 지금의 불안감이 그저 기우일 뿐이라면…….’
다시 한번 스스로를 검열하던 해연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은 유영의 안전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다. 그리고 무슨 자신감인지는 몰라도 그가 유영이를 건드릴 정도로 비열한 짓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제 느꼈던 그의 감정이 진심이라면…….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를. 제발 이번만큼은 당신을 믿게 해 줘.’
이현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큰 절박감에 져 버린 해연은 벨을 향해 천천히 떨리는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벨에 닿기 직전, 문이 달칵 열렸다.
* * *
윤일우가 출근한 이유영의 뒤를 따라간 뒤, 안주희는 주인에게 잡종과 관련된 일을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윤시후와 저까지 얽어서 말할 생각은 아니었다. 아버지, 안재호가 벌인 짓 위주로 적당히 각색해서 말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주인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의 입이 제멋대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떠벌렸다.
“……아버지와 윤정호가 같이 일을 벌이고 있고, 윤시후는 그걸 제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그 일에 연관되기 싫어 윤시후에게 입을 다물라고 했으며, 아마 윤일우도 이 일에 협조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여 필요 이상으로 솔직하게 말하자 안주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현은 그런 안주희의 얼굴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곧 그의 시선이 안주희를 지나쳐 문에 닿았다.
문을 투과해 그 뒤를 보는 이현의 입술이 부드럽게 올라갔다. 무심했던 눈도 사르르 무너져 웃음기가 담겼다. 해연이 문 앞에 서서 벨을 누를지 말지 망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들어가세요. 방해하지 말고.”
“……네.”
이대로 그냥 넘어가 주는 걸까?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주인을 다그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신 역시 주인 앞에서 아버지와 다를 바 없어졌기 때문에. 차라리 고민하지 말고 진작 말했어야 했다. 괜히 이것저것 재며 제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다 더 안 좋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안주희는 참담한 얼굴을 푹 떨군 채 스윽, 몸을 숨겼다.
안주희가 사라지자 이현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는 해연 대신 문을 열었다. 갑자기 열린 문에 놀란 해연이 손을 들어 올린 채 흠칫 몸을 굳혔다. 이현은 그런 해연을 보며 다정히 물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요?”
“……그, 아침에 가져왔던 거, 이제 그런 짓 하지 말라고…….”
이게 아닌데. 이 말을 하려고 온 게 아닌데 선뜻 유영이를 보호해 달라고 요구하는 말을 꺼내는 게 어려웠다. 막상 얼굴을 보니 이 남자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정말 옳은 건지에 대한 확신이 옅어졌기 때문이었다.
해연이 초조한 얼굴로 그를 빤히 보자 이현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해연의 맨발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왜 신발도 신지 않고 왔어요.”
그녀가 땅에 발을 대고 걷는 것조차도 아까워 매번 안고 다녔던 것이 무색하게 해연은 남들이 구둣발로 짓이긴 바닥에 맨발로 서 있었다. 그는 해연의 의사도 묻지 않은 채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성큼 방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그녀를 앉혔다.
해연이 반항할 새도 없었다. 이현은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해연의 차가워진 발을 따뜻한 수건으로 감싸 닦은 뒤 손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그녀의 발을 조심스럽게 만지고 있는 남자의 표정이 너무 기분 좋아 보여서 더럽다고, 그러지 말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기분이 묘했다. 아주 친밀한 사이가 아니면 하지 못 할 행동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 절대로. 그런데 남자의 섬세한 손길에 혼자 있을 때는 정신없이 요동치던 마음이 조금씩 안정적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제 일마저 이 남자가 벌인 연극인가 하며 의심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보호받는 느낌. 두려운 것은 이 남자가 모두 해결해 줄 것 같았다. 이 사람이 여전히 두렵고 무서운데, 동시에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안도감이 들었다.
이현은 입가에 완연한 미소를 단 채 곧고 긴 발가락과 복숭아뼈가 도드라진 발목을 부드럽게 쓸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당신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잖아요. 말해 봐요.”
그는 마치 그녀의 사정을 모두 꿰뚫고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해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말을 곱씹었다.
정말 하고 싶은 말.
뭐부터 물어야 할까. 당신의 정체가 뭔지, 어제 나를 죽이려던 그 괴물은 뭔지, 유영이도 보호해 줄 수 있을지, 당신을…… 믿어도 되는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도리어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해연이 머뭇거리자 이현은 특유의 느린 목소리로 그녀를 다독였다.
“천천히 말해도 돼요. 기다릴 수 있으니까.”
“…….”
이현의 말에 마지막 긴장도 툭 풀어졌다. 해연은 수많은 물음 중에 지금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을 골라냈다.
“유영이, 지금도 지키고 있어요? 경호…….”
“믿어요?”
“네?”
무슨 말이지? 경호했다는 말이 거짓말이었다는 뜻인 걸까? 해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자 이현은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유영은 계속 지키고 있어요. 하지만 그걸 당신이 믿을 수 있냐는 뜻이었어요.”
“…….”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내 말을 당신이 믿는 건 다른 문제죠. 다시 물을게요. 믿어요, 내 말?”
“나는…….”
몇 번이고 열렸다 닫힌 해연의 입에서 차마 믿는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지금까지 수없이 제게 했던 건 뭐였는데? 그걸 겪었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믿을 수 있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믿지 못한다는 말도 선뜻 나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를 의심하고 있었으면서 지켜 달라고 부탁하려고 왔기에.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모순적이었다.
해연이 아무 말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에도 이현은 해연의 발을 즐거운 얼굴로 만지고 있었다. 너무 작아 귀여운 새끼발가락의 발톱을 만질 때는 참지 못하고 낮은 웃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 순간 심각한 사람은 오직 저뿐인 것 같았다. 해연은 깊게 생각하던 자신을 책망하며 슬쩍 발을 뒤로 당겼다. 소파 아래의 빈 공간으로 두 발을 밀어 넣은 뒤 그가 마지막으로 만졌던 발가락 끝을 구부려 바닥에 문질렀다. 남자가 만졌던 감각이 지워지길 바라며.
이현은 아쉬운 듯 소파 아래로 숨은 해연의 발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눈길에 해연의 발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해연은 아예 발을 소파 위로 올려 양팔로 무릎을 당겨 안았다. 그리고 손으로 발끝을 감싸 그의 시선에서 가렸다. 그러자 간지러웠던 감각이 조금이나마 완화됐다.
“믿어 볼게요. 이번엔…….”
“…….”
“노력할 테니까,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당신도 날 믿게 해 줘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