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유영은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발끝에 닿는 돌을 툭 쳤다. 좋은 일인데, 쓸쓸했다. 예전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언니가 사라졌다가 나타난 뒤 뭔가 더 집착하게 된 느낌이었다. 혼자가 된 기분이 너무 싫어서.
“에휴.”
어쩔 수 없지. 언니가 빨리 돌아오길 바랄 수밖에. 그리고 언니가 가기 전까지 실컷 붙어 있어야지. 은근슬쩍 가지 말라고 보채면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해연 언니는 마음이 약하니까.
만에 하나 정말 해연 언니가 제주도로 내려간다 해도 낫기 위한 거니까 응원해 줘야 한다. 유영이 허공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고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그리고 지금 가장 먼저 신경 써야 할 건 해연 언니가 아니야.’
이진아 피디. 어제 감정이 틀어진 채 헤어졌던 이진아 피디와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지가 가장 중요했다.
회사에 출근한 유영은 가장 먼저 이진아 피디가 어디 있는지부터 살폈다. 해연 언니에겐 괜찮다고 큰소리쳤지만, 사실은 이진아 피디의 눈치가 보였다.
이진아는 피디고, 자신은 일개 사원이라는 게 문제였다. 상사의 ‘기분을 상하게 한 괘씸죄가 어떤 식으로 돌아올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걱정한 것과 달리 퇴근 시간이 다 되도록 별다른 일이 없었다. 이진아 피디가 출근하지 않은 것이다. 그간 팀원들의 휴가에 관대했던 것과는 달리 이진아 피디는 단 하루도 휴가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은 채 무단결근을 했다.
유영으로서야 다행인 일이었지만, 안 하던 결근을 하필 자신과 트러블이 있고 바로 다음 날 했다는 게 조금 꺼림칙했다.
‘별일 아니겠지.’
그동안 안 쉬고 달렸으니 몸이 축났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어제 필요 이상으로 예민했던 이진아 피디의 행동도 조금은 이해가 갔다. 물론 이 생각이 틀릴 수도 있지만…….
‘아, 모르겠다. 피디가 아프든 말든 내가 알 게 뭐람.’
솔직히 말이야 바른말이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다 이진아 피디가 한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 줬을 뿐이었다. 이걸로 꼬투리 잡으면 그때 대처하면 된다. 유영은 계속 긴장하고 있던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스트레칭했다.
‘이따가 퇴근하면 언니랑 쇼핑 가자고 할까?’
이제 이사할 때가 다가왔으니 새로 살 가구를 보러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제 해연 언니도 밖에 외출하는 게 그리 힘들지 않은 것 같으니까.
‘겸사겸사 외식도 하고.’
미리 연락해 둘까 하다가 유영은 일단 호텔에 가서 해연의 상태를 확인한 뒤에 묻는 걸로 결정을 내렸다. 괜히 미리 연락하면 분명 언니 성격에 자기 몸 상태가 어떻든 그러자고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만약 해연 언니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으면 그냥 호텔에 있으면 되었고, 외출을 한다 해도 어차피 회사와 호텔은 거리가 가까워서 쇼핑할 시간은 넉넉했다.
신나게 꺼냈던 핸드폰을 다시 내려놓으려던 찰나, 해연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야, 꼭 텔레파시라도 통하는 것 같네.”
유영이 비실비실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네에, 이유영입니다!”
-유영아, 별일 없어?
별일 없냐니? 뜬금없는 질문이기도 했고, 해연 언니의 목소리가 조금 긴장한 듯 굳어 있었다. 그게 이상해서 유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해연 언니가 걱정할 만한 게 뭐가 있지. 곰곰이 고민하던 유영은 아, 하며 감탄사를 터트렸다.
“피디님 때문에 걱정했구나. 피디님 오늘 출근 안 했어요. 휴가인가 봐요.”
-……그래? 그거 말고도 아무 일 없었고?
“에이, 무슨 일 있을 게 뭐가 있어요. 계속 일만 했지. 그러는 언니는 뭐 하고 있었어요? 점심은 먹었어요?”
-응, 먹었어. 퇴근은 언제 할 거야?
“아잉, 우리 언니 내가 벌써 보고 싶구나? 여섯 시 땡 치면 칼같이 튀어 나갈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유영이의 애교에 해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응, 빨리 와야 해?
“네에!”
유영은 이왕 통화하는 거 외식하자고 말을 할까 고민하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해연의 상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다음에 말하기로 했다. 짧은 통화를 마친 뒤 유영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 * *
‘뭐지?’
불만이 가득 찬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던 윤시후는 묘하게 어수선한 바깥 분위기에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주인이 돌아온 뒤로 조심하기도 했지만, 만월이 뜨는 시기의 일주일간은 바깥 생활을 하던 일족들까지 모두 본가로 돌아와 조용히 칩거해야 한다. 만월은 일족이 억누르고 있는 본성을 일깨우기 때문이었다. 식인이 금지되고, 인간과 섞여 살기로 결정한 뒤로 생긴 불문율이었다.
그런데 가장 조용해야 할 만월에 이렇게 일족들이 어수선하게 돌아다니다니. 아무리 낮이라고는 해도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심지어 보수적인 윤시후의 아버지 윤경훈도 자리를 비웠다. 그래서 매일 아버지의 감시를 받으며 꼼짝없이 방에 처박혀 있었던 윤시후에게 틈이 생겼다.
‘가만히 있으란다고 순순히 말을 들으면 내가 윤시후가 아니지.’
청개구리 같은 그의 성격으로는 본가에 꼼짝없이 갇혀 있는 게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 주가 되도록 본가에 얌전히 있었던 것만으로도 할 만큼 한 거였다.
‘어차피 규율을 안 지키는 건 나뿐만이 아니니까 괜찮겠지, 뭐.’
나중에 아버지가 뭐라고 하면 대거리할 핑곗거리도 생겼으니 이 어수선함이 윤시후에겐 아주 큰 이득이었다. 마침 창문 근처로 지나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조심 본가를 빠져나오는데 윤시후의 시야에 이상한 게 보였다. 바닥에 검은 연기 같은 게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저게 뭐지?’
자세히 보기 위해 상체를 앞으로 당기던 윤시후는 누군가 지나가는 기척에 다시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
바닥에서 꿈틀거리던 것은 그 지나가던 일족의 다리에 감겼고, 바로 모습이 사라졌다. 꼭 헛것을 본 것처럼.
‘잘못 봤나?’
윤시후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만월이 뜨는 시기라 이상한 환각을 본 건가 싶기도 했다. 원래 그런 때니까. 윤시후는 맹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방금 봤던 것을 흘려보냈다. 깊게 생각하는 건 그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에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그에게 더 급한 일이었다. 윤시후는 정원의 나무 사이로 몸을 숨기며 움직이다 훅, 담을 뛰어넘었다. 다행히 담 밖에도 사람이 없었다. 윤시후는 얼굴 가득 화색을 띠우며 본가로부터 더 멀리 떨어졌다.
본가로부터 완전히 멀어지자 열심히 주변을 경계하던 윤시후의 얼굴에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이 뒤가 더 문제였다. 본가를 빠져나온 것까진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일단 해연 누나네 한번 가 볼까?”
하지만 단숨에 달려간 한해연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몸이 흐물흐물하게 풀어질 정도로 달달한 한해연의 냄새는 거의 나지 않고 주인의 냄새만 지독하게 풍겼다. 윤시후는 우웩, 헛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며 밖으로 나왔다.
‘그럼 다들 어디에 있는 거지?’
너무 오래 본가에만 박혀 있었더니 최신 정보가 업데이트되지 않은 게 문제였다. 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고민하던 윤시후는 가장 먼저 주인 옆에 있을 안주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받지 않아 끊으려던 찰나, 달갑지 않아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왜 전화했어?
“누나 어디야?!”
-……왜?
“왜긴, 나도 거기 가려고…….”
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끊어진 전화에 눈을 반짝이며 말하던 윤시후의 얼굴이 구겨졌다. 다시 재발신을 눌렀지만, 이번엔 아예 핸드폰의 전원이 꺼져 있었다.
“와,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이럴수록 더 오기가 생긴다는 걸 모르나 보지? 살짝 약이 오른 채로 윤시후는 타깃을 바꿔 이번엔 사촌 형 윤일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윤일우도 마찬가지로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간다는 기계적인 목소리에 윤시후는 헛웃음을 흘렸다.
“존나 빡치네……?”
분명 일부러 안 받는 거였다. 윤시후는 해연의 빌라 주차장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쭈그려 앉아 머리를 굴렸다. 이렇게 되면 기껏 본가에서 도망쳐 나온 보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 마음도 없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고, 오지 말라고 하니 더 가고 싶잖아?”
게다가 제겐 아직 한 가지 방법이 더 남아 있었다. 바로 이유영. 한해연과 친밀한 이유영은 지금 회사에 있을 게 분명했다. 일우 형이 매일 이유영의 뒤를 따라다니며 경호했기 때문에 잘 알았다. 하물며 잡종 때문에 본가에 갇히다시피 하기 전까진 저도 이곳에 있으면서 이유영과 나름의 친분을 쌓았으니 이유영에게 접근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럼 한해연에게 갈 방도가 생길 것이다.
“그런데 이유영의 회사가 어디였지?”
방법을 생각해 낸 것까진 좋았는데, 거기까지 가는 게 문제였다. 심지어 본인에게 직접 들은 거였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 잊어버렸다.
“씨이…….”
당장 뛰쳐나갈 것처럼 벌떡 일어섰던 윤시후는 다시 쭈그려 앉아 머리를 싸맸다.
* * *
해연은 유영과의 통화를 끝낸 뒤에도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무사하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어딘가 꺼림칙했다.
‘안 좋은 일은 밤보다 낮에 더 많이 일어났다. 특히 밤에서 새벽이 오는, 사람이 가장 방심하는 시간에.’
불현듯 떠오른 말에 해연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메마르고 황폐한 목소리는 마치 절대적인 진실을 말하는 듯 담담해서 더 섬뜩했다.
‘어디서 들었지?’
분명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기억이 날 듯 나지 않았다. 불안한 얼굴로 서성이던 해연은 번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오늘 꾸었던 꿈이다. 그 꿈의 주인공이었던 노파가 중얼거렸던 말. 아니, 노파의 생애를 압축시킨 말.
그 꿈의 마지막도 새벽이 오던 시간이었다. 새파랗도록 창백한 새벽의 빛이 내릴 때, 노파는 누군가 일으킨 방화에 죽었다. 그와 함께 아침에 유영의 얼굴로 드리워졌던, 유영의 얼굴마저 하얗게 가렸던 빛이 떠올랐다.
그건 우연일까, 아니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징후였을까. 이유를 알 수 없던 이상한 꿈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아니야, 그건 그냥 꿈일 뿐이잖아. 그런 걸 현실과 연관 지어 생각한다는 게 더 이상해.’
하지만 그 이상했던 꿈이 아무 의미도 없다고 쉽게 치부하기엔 해연에게 그동안 이상한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났다. 사소한 어떤 징후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게 당연한 거였다. 오히려 지금까지 방만하게 호텔에서 지냈던 것이 더 이상하다.
‘그래, 어제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해연은 황망한 얼굴을 손으로 거칠게 쓸었다. 이현이 팔에 심각한 화상이 입을 정도로 큰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구해 주기 직전,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짐승도 사람도 아니었던 괴물의 얼굴을 봤다. 그 괴물은 자신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났던, 비가 오던 밤에 저를 납치했던 괴물과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