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열심히 조식을 먹던 유영이 탁자 위에 있던 리모컨을 들어 티브이를 켜 채널을 돌리다 아침 뉴스에서 멈췄다. 해연의 시선도 티브이에 닿았다. 아나운서는 한동안 정치에 관련된 소식을 전하다가 범죄에 관련된 이슈로 전환했다. 현직 판사가 지하철에서 몰카를 찍다가 현장에서 체포됐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유영과 해연의 표정이 혐오감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다 유영이 “아, 맞아.” 감탄사를 터트리며 예상치도 못한 말을 했다.
“언니. 그, 전 회사 유영환 팀장 기억하죠? 언니 퇴사하도록 괴롭혔던 인간.”
“응? 기억하지. 왜?”
“저 퇴사하는 날 엄청 큰일이 났었거든요.”
“무슨 일……?”
“몰카 걸렸대요.”
“……뭐어?”
웬 몰카? 해연이 혐오하는 표정을 지었다. 생긴 것도 멀끔하고 옷도 깔끔하게 잘 입고 다녔다. 항상 외제 차를 자랑하듯 타고 다녀 지하철에서 몰카를 찍고 다닌다는 건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방금 뉴스에서도 현직 판사가 몰카 찍다 체포됐다고 나오긴 하지만, 같은 회사에서 일했던 사람이 그런 짓을 했다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뉴스나 기사에서만 나오던 남의 일이 불쑥 현실이 된 불쾌한 기분. 다른 것도 아니고 몰카라니. 지저분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유영환, 그 새끼도 저기 뉴스에 나온 판사처럼 지하철에서 몰카 찍다가 피해자가 검사여서 현행범으로 체포됐대요. 이혼도 할 것 같다 그러더라고요. 아니, 지금쯤이면 했겠죠.”
“잘됐네. 그런 놈은……. 아, 설마 회사에서도 이상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여자 화장실에 설치해 놨다거나. 쓰레기 같은 변태 하나 때문에 별걸 다 걱정하게 됐다.
“노노. 그건 아니에요. 그날 몰카 탐지기 검사해 봤는데 화장실은 깨끗했어요. 숙직실하고 휴게실도요.”
“……그나마 다행이네.”
그나마. 정말 그나마였다. 여자 직원들을 촬영한 이상한 영상이 웹상에 떠돌아다니는 건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에. 해연은 생수 뚜껑을 따 단숨에 들이켰다.
“사장은 뭐래?”
“여자 화장실에 몰카 검사해 봐야 한다니까 예민 떨지 말라 그래서 거기 여직원들 전원 나올 기세였어요.”
“와…….”
“우리 업계 좁잖아요. 커뮤니티에도 글이 올라오기도 했구요. 언니는 빨리 탈출한 게 다행이었어요. 신이 도운 거죠. 새로 들어왔던 인간들도 쓰레기지만, 사장도 쓰레기였으니까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인걸.”
“그래도 이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해연이 유영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도 갑작스러웠다. 회사를 나간 이후 큰일이 계속 겹쳐 일어나다니. 사람이 죽고, 또 다른 사람은 명예에 큰 타격이 올 만한 범죄가 걸렸다. 그럼 피디는 어떻게 됐지……?
“피디는 어때?”
“저 퇴사한 다음 얼마 안 돼서 쫓겨났대요.”
인과응보예요. 유영이 포크로 샐러드를 푹, 찍으며 차게 말했다.
“사장이 저한테 은근슬쩍 언니 회사 들어갔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기가 막혀서. 지가 쫓아낸 거나 다름없으면서!”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모른다고 했죠. 뭐, 진짜 모를 때였구요…….”
“……미안.”
“미안하라고 한 말 아니거든요?!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다구요. 언니 괜찮아진 것 같아서 그런가, 갑자기 생각났네. 근데 더 통쾌한 게 뭔지 알아요? 거기 망했어요. 크크.”
“정말?”
연이어 터지는 놀라운 일에 해연은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리 쫓기듯 퇴사를 했다 해도 오래 정을 붙이고 다닌 회사가 그렇게 빨리 망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네에. 사원들 줄줄이 나가지, 투자금 막혔지, 사장이 별수 있겠어요? 쪼올딱 망했지.”
마지막까지 완벽한 엔딩이라며 유영이 키득키득 웃었다. 살짝 기분이 묘한 해연과는 달리 속이 시원해 보였다.
“정말 가차 없네?”
“저는 천성이 부정적인 애거든요? 언니 앞에서만 좀 내숭 부리는 거예요.”
“그건 절대 아닐걸?”
“네?”
해연의 단호한 부정에 유영이 눈을 크게 떴다.
“넌 천성이 긍정적인 애야. 어릴 때부터 혼자 힘으로 독립해서 서울에서 지금까지 버텼잖아. 그런 생활을 하다 보면 사람은 팍팍해질 수밖에 없어. 그런데도 넌 어떻게든 웃으려고 노력하잖아. 속이 어떻든 겉으로라도 그런 노력을 할 수 있는 건 아무나 못 해. 나도 그렇고.”
그 남자처럼. 해연은 저도 모르게 연상된 남자의 웃음에 가슴이 뜨끔했다. 그래, 전혀 쉬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뭐? 그걸 가엽다고 봐주어야 할 이유가 해연에게 없었다. 해연이 머릿속에서 그 남자를 밀어내고 있을 때, 유영이 쑥스럽다는 듯이 볼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그건 언니가 절 너무 잘 봐 줘서 그래요.”
“물론 그것도 있지. 나한테 넌 귀엽기만 하니까.”
“으휴.”
유영이 불쑥 달아오른 얼굴을 손부채질하며 살짝 시선을 내렸다. 유영은 잠시 침묵하더니 해연을 슬쩍 보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언니. 제가 왜 언니 옆에 찰싹 붙어 있는지 아세요?”
“응?”
“사실 좀 음흉한 속셈이 있었는데 몰랐죠?”
“속셈?”
“사실 저 언니랑 언젠가 말 트고 싶었어요. 친자매처럼 막 반말도 하고 싸우고. 다 그걸 위해 다져 놓은 기반이거든요.”
난 또 무슨 속셈이라고. 해연은 유영의 말에 가볍게 웃었다. 유영도 웃으며 아련히 과거를 회상했다.
“사실 제가 처음에 언니 좀 질투했었잖아요. 나도 꽤 열심히 발버둥 쳐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더 대단한 사람이 있네? 똑같이 고아인데 너무 수준이 차이 나고 그래서 말도 퉁퉁거리고 그랬는데, 언니가 나 아파서 병가 냈을 때 한여름에 엄청 큰 수박하고 삼계탕 들고 우리 집에 찾아와서…….”
“그 삼계탕 내가 직접 한 거거든요?”
해연이 생색을 내자 유영이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아요. 그래서 좀 뭐라고 해야 하지……. 그때 언니 같은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 했었어요. 히히 웃기죠?”
웃고는 있지만, 유영의 눈에 살짝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해연은 그런 유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유영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해연은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그래서 찾아간 거였기 때문에. 아플 때 혼자 앓는 것만큼 외로운 게 없었으니까. 그런 마음이 통했는지, 그날을 기점으로 유영의 태도가 확 변했다.
해연이 유영의 손등을 가볍게 쥐었다.
“엄마는 못 되지만 언니는 가능해. 사실 우리 지금도 그런 사이잖아. 말 편하게 해도 돼.”
“어, 그건 좀……. 아니, 우리 그런 사이 맞는데, 아직 말을 놓는 건 좀 이른 거 같아요. 마음의 준비가 덜 됐어요.”
더듬더듬 말을 놓으려던 유영이 아, 도저히 안 되겠다며 손을 내저었다. 유영이 멋쩍게 웃는 얼굴을 향해 빛이 환하게 들어왔다. 아침 볕이 유리를 투과해 더욱 날카롭게 빛을 내자 유영의 얼굴이 순간 흐릿하게 보였다. 꼭 사라질 것처럼. 해연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유…….”
“앗, 미쳤나 봐. 언니 나 출근! 수다 떨다가 지각할 뻔했어요.”
해연이 말을 붙이기도 전에 유영이 큰일 났다며 벌떡 일어나 화장대로 달려갔다. 몇 분도 되지 않아 신속하게 화장을 마친 후 옷을 갈아입고 바로 뛰어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혼자 남겨진 해연은 멍하니 유영이 사라진 문을 바라봤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왜 무서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서웠다. 꼭 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든다.
해연의 시선이 방 안에 길게 침투한 빛에 닿았다. 커튼을 닫지 않아 열린 창문으로 창백할 정도로 푸른빛이 조금씩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해연은 황급히 일어나 커튼을 쳤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얇은 커튼 사이로 빛이 일렁거리며 그녀에게 닿기 위해 몸을 뻗었다.
그저 해가 뜨고 있을 뿐이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섬뜩한 걸까.
그때, 다시 문이 덜컹 열리며 유영이가 되돌아왔다.
“언니!”
“급하다더니. 혹시 뭐 놓고 갔어?”
“아니요. 언니 빨리 이쪽으로 좀.”
유영이 문 앞에 서서 해연을 향해 손짓했다. 대체 뭐지? 해연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자 유영이 그녀의 손을 덥썩 쥐고 제 머리에 척 얹었다. 그러더니 해연의 손바닥에 제 머리를 비볐다.
“아, 좋다. 이거 엄청 그리웠어요.”
유영이 살짝 볼을 붉힌 채 베싯 웃었다. 제가 괜찮아지고 있다고 판단하자마자 응석을 부리기 시작하는 유영의 행동에 해연은 속이 무척 상했다. 그녀가 괜찮은 척하는 만큼, 유영이도 괜찮은 척, 의젓한 척하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제게 의지가 되어 주기 위해서였겠지.
고맙고 짠하고 미안했다. 해연은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꾹 누른 채 유영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너 퇴근하고 오면 질리도록 해 줄게.”
“진짜? 약속?”
“약속.”
“헤헤, 그럼 저 다시 갈게요! 이따 봐요!”
유영이 팔을 크게 휘휘 저으며 다시 뛰어갔다. 근래 조심스럽게 해연의 안색을 살피던 모습과 달리 이전처럼 밝아진 모습이 보기 좋았다. 다시 혼자 남았지만, 이번엔 별로 무섭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던 것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해연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도 이런저런 일을 겪고 나니 별것도 아닌 일에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리라.
* * *
‘어휴, 괜한 말을 해서는. 민망해 죽는 줄 알았네.’
호텔을 나온 뒤 유영의 발걸음은 속도가 확 줄어들었다. 사실 그렇게 늦지 않았다. 그냥, 제어를 하지 못하고 튀어나온 속마음이 민망해서 도망친 거였다. 그런데 도망쳐 놓고 예전에 해연 언니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게 생각나 저도 모르게 유턴해 버렸다.
‘진짜 갑자기 뭐람.’
아주 별의별 짓을 다 하고 있었다. 애도 이렇게까지 어리광을 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유영은 뜨끈하게 달아오른 얼굴에 손부채질했다.
해연 언니가 괜찮아진 것 같아서 오만 감정이 다 들었다. 안도감과 이제 자신이 해 줄 게 없다는 상실감. 옆에 더 붙어 있을 시간이 확 줄어든 초조함. 이제 해연 언니가 제주도에 내려간다 해도 잡을 명분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