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거대한 바다처럼 표면은 차분했지만, 그 속은 거친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소용돌이에 휘말려 해연의 의식이 점점 노파의 의식 속으로 침몰했다. 마치 원래부터 하나였다는 듯이.
잠시 허공을 보며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노파의 눈이 다시 제 곁에 누운 현에게 닿았다. 재난처럼 비가 쏟아지던 날, 갑자기 나타난 짐승. 사실 보자마자 알았다. 저것이 자신의 인생을 수렁으로 밀어 넣은 악신이라는걸.
‘모를 수가 없지.’
사람이 무수히 죽은 폭우에도 제집만은 멀쩡했다. 가장 허술한 사당이었다. 튼튼하고 관리가 잘된 집도 무너지는데 아주 오래전에 지어진 뒤, 수십 년을 방치된 사당만 무너지지 않았다.
마을 전체에 퍼진 비통한 울음이 사납게 쏟아지는 빗소리와 맞물려 더 소름 끼쳤다. 그리고 하필 그때 나타난 낯선 짐승. 먹을 것을 찾아 산을 자주 오르내렸지만,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형태였다. 얼핏 보면 들개를 닮았지만, 자세히 보면 완전히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들개의 꼬리에 비늘이 있을 턱이 없으니까. 심지어 등엔 깃털이 달린 날개도 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짐승이 하나로 합쳐진 듯한 모양새였다.
‘이번엔 내게 무슨 짓을 하려고 왔습니까?’
마치 어미를 찾는 새끼처럼 어린 모양새를 하고. 하지만 그녀는 속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껏 지겹도록 악신이 제게 했던 일을 경험했기 때문에. 항상 처음엔 좋은 일이 생기는 것처럼 꾸몄다. 절망을 더 깊게 느끼라는 듯이. 그러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아니, 이번엔 그 귀하신 몸으로 직접 제 앞에 나타났으니 이전보다 더 범상치 않은 일이 생기리라.
그럼에도 제게 치대며 어리광을 부리는 짐승을 밀어내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지금 많이 지쳤기 때문이었다.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뜻하는 대로 놀아나 드릴 테니 실컷 재미를 보시고 나를 죽여 주시오.’
이 지긋지긋한 삶만 끝내 주신다면 뭐든 다 해 주리라. 무슨 연유로 자신을 이리 괴롭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가 잠에서 깨어 저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짐승의 눈이 반짝 뜨였다. 반질한 검은색 눈동자가 그녀를 퍽 어여쁘게 쳐다봤다. 비늘이 촘촘히 난 꼬리가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여자는 잠투정하듯 제 무릎 위로 기어 올라온 짐승의 등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현아.”
컹.
짐승이 그녀의 부름에 대답하며 꼬리를 더욱 세게 흔들었다. 여자는 겨울바람 같은 서늘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짐승의 등을 쓰다듬는 손길은 부드럽고 다정했다. 짐승은 악신 주제에 그녀의 속내를 모르고 몸통을 울리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아니, 어쩌면 모두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현. 제가 직접 지어 준 이름. 왜 그랬던가. 그녀는 짐승의 등을 쓰다듬으며 길게 숨을 흘렸다.
‘악신이라 부를 수 없으니까.’
그래, 이유는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악신의 장난에 장단을 맞추기 위해 한 것뿐이었다. 제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이름을 지어 주었던 것은.
한숨도 자지 못했던 밤이 지나고, 해가 떴다. 그 짧은 사이 노파의 숨은 더욱 가늘고 가빠졌다.
새벽에 먹을 것을 구해 온 짐승이 그녀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입을 벌리고 침을 뚝뚝 흘렸다. 노파를 탐스러운 먹이를 보듯 굴던 짐승이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정신이 든 것처럼 뒷걸음치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
백태가 낀 노파의 침침한 시선이 짐승이 뛰어나갔던 문에 닿았다. 이번에는 잡아먹을 줄 알았는데, 오늘도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쿨럭, 노파는 기침을 내뱉었다. 깡마른 등이 발작적으로 움직이다 한참이 지난 후 뚝 멎었다. 낡고 해진 이불 위로 탁한 피와 타액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었다.
지친 낯으로 노파가 그 옆에 털썩 쓰러졌다. 그녀는 제게 죽음이 바짝 가까워졌다는 걸 느꼈다. 원래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짐승과 함께 지낸 후 몸이 급속도로 안 좋아지기 시작해서 이제는 걷는 것조차 힘겨워 더 이상 산을 탈 수도 없었다.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가 눈을 떴을 때는 다시 어둑한 밤이었다. 그녀는 몸을 웅크려 주위를 살폈다. 혼자였다. 어디에도 짐승은 보이지 않았다.
짐승은 대체로 그녀의 곁에 있었지만, 종종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며칠 뒤에 나타나곤 했다. 노파는 짐승이 어디로 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혼자 남은 것이 조금 외로워지기도 했다. 단 한 번도 누군가와 온기를 나눠 본 적이 없었기에 악신과의 기묘한 동거조차도 위안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우습게도…….
시간이 흘러 조금씩 어두웠던 밤이 물러가고 있었다. 어스름한 새벽빛이 군데군데 뚫린 구멍을 통해 새어 들어왔다. 노파는 그 빛이 평소보다 새파랗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느낄 때마다 항상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
‘춥구나.’
마음도 육신도 모두 추웠다. 평소보다도 서늘하고 음산한 공기가 그녀의 주변을 떠돌았다.
그때, 노파의 귀에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목적지가 바로 이곳이라는 듯이.
안 좋은 예감은 늘 그렇듯이 적중했다. 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사당이 불타기 시작했다. 낡은 나무는 순식간에 불씨가 번져 타올랐다. 그녀는 서슬 퍼런 불꽃이 저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가만히 바라봤다. 피할 수도 없었지만, 피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도리어 드디어 끝이 왔구나, 하는 희열이 그녀의 마음에 차올랐다. 불꽃이 낡은 이불까지 닿았을 때, 그녀는 사라진 짐승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보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제 죽음을 본 악신이 어떤 식으로 웃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것이 화마에 휩쓸리기 직전에 든 마지막 상념이었다.
잠시 후 폭우가 내리치고 불이 꺼졌지만, 낡은 사당은 이미 순식간에 불타 노파가 존재했던 모든 흔적이 사라진 채 황량한 검은 재만 남았다. 힘겨운 삶을 오래 버틴 것치고 허망한 끝이었다. 하늘을 울리는 천둥과 번개. 그리고 산 전체를 울리는 거대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그녀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 * *
꿈은 거기서 끝났다. 천천히 눈을 뜬 해연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이상한 꿈이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꿈. 객관적으로 보면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그녀가 이입한 노파가 너무 담담해서 해연도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저…….
꿈에서 깨기 전에 들었던 처절했던 짐승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남았다.
해연은 손을 들어 왼쪽 가슴을 꾹 눌렀다. 고작 이상한 꿈을 꿨을 뿐인데, 왜 이렇게 감정이 뒤숭숭한 것인지. 그녀는 이불을 걷어 내고 침대에서 나왔다.
여덟 시. 해연은 유영이 자고 있는 방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원래는 이쯤이면 먼저 깼을 유영이 아직 안 나오는 걸 보면 피로가 꽤 쌓인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영은 매일 해연의 아침 준비를 해 주고 출근했었다. 해연이 혼자서는 밖에 나가지 못하니 끼니를 거를까 봐 신경 써 준 것이다. 그렇게 받기만 했다.
‘이번엔 내가 준비해 줘야지.’
유영이가 그랬듯, 호텔 조식을 테이크아웃하면 될 것이다. 해연이 가볍게 외투를 걸치고 프런트에 전화를 하려던 때, 누군가 벨을 눌렀다.
“이 시간에 누가…….”
두려움 섞인 의문은 인터폰을 확인한 순간 해소됐다. 작은 화면에 이현의 얼굴이 보였다. 참 뻔뻔한 사람. 한번 불러냈다고 이젠 제 마음대로 나타나는구나. 이러면 기껏 집을 팔고 호텔 생활을 하는 의미가 없었다. 물론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 집을 처분했을 테지만.
‘어쩔까.’
이대로 문을 열어 주면 남자는 더 뻔뻔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유영이 나오기 전에 저 남자를 보내긴 해야 했기에 해연은 한숨을 깊게 내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 앞엔 분명 문을 열기 직전까지 있었던 남자는 온데간데없고 꽤 큰 종이 가방만 바닥에 남아 있었다.
해연은 몸을 숙여 종이 가방을 들어 올렸다. 안에는 정성껏 포장된 음식이 들어 있었다. 가방까지 따뜻한 걸 보아 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해연이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이런 걸 가져오라고 했어?’
해연은 이현이 있을 맞은편 방의 문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시 되돌려 줘야지 하고 한 발 떼었을 때, 유영이 등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
“언니 거기서 뭐 해요? 설마 나갔다 온 거예요? 혼자?”
“어? 어, 어어…….”
새벽부터 유영이가 나타나는 타이밍이 참 묘했다. 해연은 어설프게 웃으며 음식이 든 가방을 든 채 문을 닫았다. 유영은 해연이 들고 있는 호텔 이름이 쓰인 종이 가방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혼자 나갔다 왔나 보네요? 와……. 나 너무 놀랐어요. 세상에, 언니 진짜 괜찮아졌구나.”
“으응…….”
유영이의 호들갑에 해연이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럼 유영이 이현의 방에 쳐들어갈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너무 늦게 일어나서 어떡하지 걱정했는데 요렇게 언니가 준비해 줄 줄 몰랐어요. 언니 저 빨리 씻고 나올게요!”
유영이 화장실로 휙 들어가 버린 후, 해연은 망연한 얼굴로 종이 가방을 탁자 위에 올렸다. 꼼짝없이 먹어야 할 판이었다. 해연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또 그에게 휩쓸리는 기분이었다.
가방에 든 포장 용기를 탁자 위에 올려 식사 준비를 하는 사이 유영이 가볍게 세수하고 나왔다.
“와 이거 프리미엄! 이 조그만 거에 구만 원이던데. 아침에 왜 이렇게 비싼 걸 사 왔어요?”
“그냥, 잘 먹고 나가라고…….”
프리미엄이라고? 포장 용기부터 고급스럽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비싼 건지 몰랐다. 물론 그 사람에게는 별로 부담스러운 금액이 아닐 테지만, 유영이나 제겐 한 끼 식사로 사용하기엔 꽤 벅찬 금액이었다. 그것도 아침 식사로는 더더욱.
‘차라리 적당한 걸로 사 오지.’
프리미엄이라는 말답게 수프부터 빵, 스테이크, 샐러드, 생수까지 제대로였다. 유영이 냉큼 고기부터 입에 물고 감탄했다.
“대박. 완전 맛있어. 언니 최고.”
“그래? 많이 먹어.”
“네에! 그래도 이런 건 오늘만이에요. 다음부턴 이렇게 돈 많이 쓰지 말아요.”
“응, 그럴 거야. 오늘만 특별히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먹어.”
한번 거짓말을 하니 걷잡을 수가 없었다. 해연은 부드러운 빵을 작게 뜯으며 유영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유영은 해연이 혼자 나갔다는 거에 더 놀란 모양인지, 해연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