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뒤에서 거대한 힘을 가진 누군가가 쫓아오고 있었다. 이현의 명령으로 호텔 주위를 돌고 있던 순혈은 더욱 다급하게 날개를 휘저었다. 전속력으로 날고 있음에도 그건 점점 더 가깝게 느껴졌다. 곧 따라잡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더 속도를 내고 싶었지만, 오랜 비행으로 날개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자신이 본 것을 주인에게 빨리 보고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걸 발견했다.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이물질이 순식간에 인간의 형체로 바뀌었다.
하지만 절대로 인간일 리가 없었다. 인간이 허공에서 뚝 생겨날 리도 없었고, 마치 주인의 앞에 서 있을 때처럼 보는 것만으로 온몸이 떨릴 리도 없었다.
‘대체 정체가 뭐지?’
같은 일족일 리가 없다. 그 정도의 힘이 있는 일족이 있다면 지금까지 몰랐을 리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그들과 비슷한 이종족이 또 있다는 건가?
급박한 순간에 어울리지 않는 의문이 든 순간, 순혈의 날갯짓이 살짝 느려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거대한 물체가 순식간에 따라잡은 순혈의 목을 물고 거세게 내동댕이쳤다.
반항할 틈도 없이 목이 꺾였다. 괴물은 새에서 인간의 형태로 변한 순혈의 시체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인적이 없는 어둑한 거리에 뼈가 씹히는 소리가 울렸다.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살점은 물론, 뼈와 핏방울 하나까지 남김없이 목구멍에 집어넣은 괴물이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이렇게 쉬울 수가.
순혈을 보면 꽁지부터 말고 도망쳐야 했던 과거와는 전혀 달랐다. 이번엔 순혈이 저를 보고 도망쳤고, 별로 어렵지 않게 죽였다. 너무 쉬웠다. 너무 쉬워서 웃음만 나왔다.
크르르륵.
목을 울려 하울링을 하던 괴물이 이번엔 이진아의 집을 향해 내달렸다. 한산한 바람을 타고 하얀색 깃털 몇 개가 허공을 떠돌다 사라졌다.
* * *
괴물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진아는 계속 거실을 서성였다. 초조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왜 한해연을 먹지 않은 거지? 왜, 왜 멀쩡히 살려 둔 걸까? 한해연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화를 참지 못해 저를 때리고 괴롭히던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제 정말 끝일 줄 알았는데…….’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초조하고 힘들어야 하는 걸까? 이진아는 신경질적으로 거실의 베란다 창문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쾅.
소음이 없는 조용한 새벽이라 충격음은 더욱 크게 울렸다. 제가 낸 소리에 놀라 황급히 유리창에서 손을 떼던 이진아의 눈에 말도 안 되는 모습이 보였다.
“헉―!”
유리창 너머로 괴물이 보였다. 그러니까, 이십 층 높이의 허공에 서서 그녀를 보고 있는 괴물의 모습이. 그 믿어지지 않는 모습에 이진아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쳤다.
‘자, 잘못 본 거겠지. 아무리 괴물이라도 몇십 미터의 허공에 어떻게 떠 있어?’
너무 오래 깨어 있어서 헛것을 본 모양이었다. 이진아는 제가 본 것을 부정하며 눈을 꽉 감았다가 조심스럽게 떴다. 하지만 아까보다 더 말도 안 되는 모습이 보였다.
“흐, 흐아아……!”
이진아의 다리가 덜덜 떨리다 못해 풀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괴물이 유리창 안으로 몸을 들이밀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유리를 통과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괴물을 피해 엉덩이를 뒤로 끌었다.
그 모습을 본 괴물은 마지막 다리까지 여유롭게 유리를 통과하며 히죽 웃었다. 이진아가 겁먹은 꼴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하여간, 눈치는 참 빠르다니까. 그래서 퍽 마음에 들었었다. 지금까지는. 괴물은 완전히 집 안에 들어와 천천히 이진아를 향해 다가갔다.
이제 숙주는 필요 없었다. 그러니 이제 처리해야 할 때였다.
괴물은 처음부터 이진아를 살려 줄 생각이 없었다. 적당히 이용하고, 적당한 때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나마 이진아가 그 어떤 숙주보다 더 처신을 잘해 와서 애초에 생각해 뒀던 기간보다 오래 살려 둔 거였다.
그래도 그간의 정을 생각해 고통 없이 보내 주리라. 괴물은 이진아의 앞에 주저앉아 짐짓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오빠가 그동안 진아를 너무 고생시켰지?”
“무, 무슨…….”
“이제 놓아줄 때도 됐으니까. 어때, 좋아?”
“……!”
창백하게 질렸던 얼굴에 의심과 함께 살짝 희망이 돋아 올랐다. 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진 괴물의 말에 꺼멓게 죽었다. 괴물이 낄낄 웃었다.
“우리 진아 이제 엄마 아빠 만나러 가자.”
“……무, 무슨, 시, 싫어, 살려, 살려 줘, 제발…….”
이진아가 정신없이 애원했다. 하지만 자꾸 목소리가 떨려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제발, 제발, 살려 줘. 그동안 말 잘 들었잖아. 한해연은 살려 두고 왜 날 죽이려고 해? 왜 나만. 흣……!”
퍽.
괴물의 손이 이진아의 왼쪽 가슴에 박혔다. 이진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괴물은 이진아의 심장을 손에 쥔 채 “잘 가, 진아야. 부모님께 오빠 안부 잘 전하고.” 하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손을 쑥 빼냈다. 심장이 뽑힌 이진아의 몸이 뒤로 풀썩 넘어갔다. 즉사였다.
괴물은 이진아의 심장을 툭, 바닥에 버렸다. 이제 인간의 육체 따위에 식욕이 돌지 않았기 때문에. 괴물은 이진아의 시체를 내버려 둔 채 넓은 거실 창 앞에 서서 검은 밤을 밝히고 있는 도심의 불빛을 느긋하게 바라봤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세상의 모든 것이 제 발밑에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 기분이 진짜가 되려면 놈들을 처리해야 할 것이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
순혈을 먼저 사냥할지, 아니면 한해연을 먼저 잡아먹을지. 괴물은 두 가지의 선택지를 놓고 느긋이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둘 다 엮여 있다. 한해연을 잡으려면 그년을 지키고 있는 순혈들을 처리해야 한다.
쉽게 끝내고 싶진 않았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순혈들의 눈치를 보며 숨죽여 살았던 것을 보상받으려면. 똑같이 되돌려 줘야지. 좆같은 기분을 고스란히 느끼게 하면서.
그는 유리창 위로 이진아의 피로 물든 제 손을 올렸다. 검붉은 피가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 투명한 유리를 더럽혔다.
가만히 제 손을 보던 괴물은 천천히 몸을 돌려 이진아의 시체를 바라봤다.
“내 동생은 정말 쓸모가 많단 말이지.”
시체조차도.
* * *
다행히 늦지 않게 잡종을 처리했다. 안재호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하필 주인의 바로 앞에서 칩이 터진 것이 문제였다. 자칫 이 일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반역자로 낙인찍히는 건 시간문제였기 때문에.
그가 바라는 건 한해연을 처리하는 거지 주인에게 해를 끼치고자 함이 아니었다. 도리어 주인이 있어야 그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
‘조금 더 신중했어야 했어.’
인간 여자가 살아야 얼마나 산다고 그걸 못 참았을까. 안재호는 초조하게 서재를 서성였다.
‘주희, 그 애가 말을 할 리가 없어.’
똑똑한 애다. 제 말에 고분고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사리 분별도 하지 않고 멋대로 굴 리가 없었다. 그래, 만에 하나 주희가 제멋대로 행동하려 해도 옆에 윤일우가 함께 있으니 제어가 될 것이다. 잡종의 머리에 박았던 칩을 터트린 것이 윤일우였으니까.
주인이 아무리 대단한 힘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산산 조각난 잡종의 머리를 파헤치진 못할 것이다. 그래, 그러니 이 일은 아예 없었던 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안도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제가 벌인 일이 들통났을 때의 대처도 생각해 놔야 한다. 안재호는 주인이 깨어난 이래로 일족에는 무관심한 채 인간에게만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일족들을 떠올렸다. 아직 결정적인 사건이 없으니 잠자코 있지만, 분명 아주 작은 심지만 붙여도 부글부글 끓어오를 것이다.
만약 반역으로 몰리게 된다면?
‘그렇다면 정말 그렇게 만들면 되지.’
안재호의 심장이 아까보다 더 빠르게 뛰었다. 그래, 그러면 된다. 주인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일족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의 시선이 창문을 환히 비추고 있는 둥그런 달에 닿았다. 만월.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기 딱 좋은 밤이었다.
10챕터
언제 잠들었을까. 심장이 너무 뛰어서. 그리고 마음이 심란해 계속 뒤척였는데 어느 순간 잠든 모양이었다.
해연은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확실할 수 있는 건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현실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한 노파와 그녀의 곁을 맴돌고 있는 검은 짐승에 고정되어 있었다.
검은 짐승.
해연이 이현을 통해 보았던, 그녀에게 끔찍한 상처를 남겼던 그것과 동일한 모양새를 가진 짐승이었다. 인간 상태의 이현을 보았을 땐 그나마 괜찮았지만, 저 모습으로 보니 새삼 섬뜩했다. 하지만 다른 곳을 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꿈이어서 그런지 모든 것이 그녀의 의지에서 벗어나 있었다.
해연에게 안 좋은 짓을 했던 것과 달리 짐승은 노파와 함께하는 내내 매우 온순했다. 노파와 짐승은 둘이서 서로를 의지하듯 모든 것을 함께했고, 사뭇 다정하고 오붓했다. 마치 가족 같았다. 오래된 집은 거의 무너질 듯 낡았다. 바람이 심하게 불 때는 안까지 외풍이 몰아쳤다. 그들은 다 해진 천을 함께 나눠 덮으며 추위를 났다.
힘겨워 보이는 삶이었지만, 둘이 함께였기에 포근해 보였다. 하지만 한순간 무릎에 기대 잠든 짐승을 보는 노파의 눈이 차가워졌다. 가족은커녕 증오스러운 원수를 보는 듯한, 한 톨의 애정도 보이지 않는 서늘한 눈. 짐승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해연의 가슴마저 서늘해질 정도였다.
아까까진 저런 눈이 아니었다. 그런데 대체 왜, 무슨 연유로 그렇게 자신을 따르는 짐승을 저렇게 보는 걸까. 노파의 마음을 알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해연의 의식이 노파와 합쳐졌다.
해연은 노파가 지나온 삶을 스쳐보며 탄식했다. 노파의 삶은 해연이 감히 이렇다 저렇다 판단을 내릴 수 없을 정도로 황폐했다. 저도 딱히 평탄한 삶을 살지 않았지만, 노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해가 떠 있는 시간에는 늘 그녀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다. 밤이라고 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낮보다는 나았다. 태어난 순간부터 노파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