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그러니까 당신은 이만 나가는 게 좋겠어요.”
내가 정말 미쳐서 당신을 덮치기 전에. 그의 목소리가 욕망을 담고 낮게 가라앉았다. 성기는 이미 부풀어 올라 속옷을 적시고 있었다. 해연이 그의 팔을 잡았을 때부터 그랬다.
멍하니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해연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아래로 흘러 불쑥 부풀어 있는 남자의 중심부에 닿았다. 멍하니 풀려 있던 해연의 얼굴 훅 달아올랐다. 그녀는 벌떡 일어서 그에게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해연의 비난에 그가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아, 정말 위험한데. 그도 문제지만, 조금 전부터 해연의 아래에서 그를 유혹하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당장이라도 고개를 처박고 핥고 싶을 정도로 야한 냄새가.
이현은 해연을 향해 다가갔다. 그가 가는 만큼, 해연도 뒤로 물러섰다. 조금씩, 조금씩 해연의 냄새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그건 이현에게 폭력적이기까지 했다. 잡종 따위를 상대했던 것보다 더 위협적이고 그를 굴종시키는 해연만 가질 수 있는 무기였다.
그의 눈에 해연의 변화가 선명하게 보였다. 가슴이 부풀어 올랐고, 숨결이 살짝 가빠졌다. 하얗던 피부에 붉은 기가 돌고 있었고, 붉고 예쁜 작은 입술이 벌어져 평소보다 뜨거운 숨을 뱉었다. 아마 아래는 그녀가 흘린 애액으로 축축하게 젖었으리라. 해연은 많이 젖는 편이었으니까. 이 정도라면 스스로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몸이 젖고 있다는걸.
이현이 눈을 살짝 찌푸렸다.
“정말 곤란해요.”
“뭐, 뭐가요…….”
완연히 긴장한 얼굴로 해연이 더 뒤로 물러섰다. 이현도 더 앞으로 다가갔다.
“알잖아요, 내가 당신보다 당신 몸을 더 잘 아는 거. 지금 내가 왜 이러는지, 당신이 지금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당신도 느끼고 있겠죠.”
응? 그가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침내, 해연의 몸이 문에 닿았다. 뒤가 막힌 해연이 문에 등을 딱 붙인 채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이현이 입을 맞출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해연은 그를 밀어내지도 못한 채 몸을 움찔 굳혔다. 온몸이 긴장되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의 손이 해연을 향해 다가왔다. 닿을 듯, 닿지 않는 미묘한 거리에서 그의 손끝이 그녀의 입술부터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가쁘게 오르내리는 가슴을 지나 허리에 머물렀을 때였다.
달칵.
이현은 그녀의 뒤로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해연의 몸을 반대로 돌려 열린 문을 바라보도록 했다.
“가요, 빨리. 내가 정말 나쁜 짓을 하기 전에.”
“……!”
그는 도망치는 해연을 잡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참고 또 참았다. 지금은 그녀가 제게 미세하게나마 틈을 보인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아주 큰 수확이었기에.
그의 방 바로 맞은편, 해연이 들어간 호텔 룸 문이 완전히 닫혀 그녀의 옷자락마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그도 천천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해연의 몸이 닿았던 차가운 문에 이마를 대고 한숨을 뱉었다.
“해연, 한해연…….”
그는 이 좁은 호텔 방에 가득 배인 해연의 냄새를 흠뻑 들이켰다. 머리를 들끓게 만드는 냄새였다.
이 호텔에서 그가 잡아 놓은 방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해연을 가장 좋은 곳에서 지내도록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권리가 지금 그에게 없었다. 그래서 이 한 층을 모두 비워 외부인이 들락거리지 못하도록 막아 놨다. 전부터 머물고 있던 숙박객이 강제로 옮겨진 방에 말썽을 부리긴 했지만, 그 비용까지 모두 처리해 줘서 큰 소란은 나지 않았다. 그래서 해연은 그가 한 짓을 몰랐다. 물론 알아도 상관없지만, 모르는 편이 해연을 보호하기 편했다. 괜히 해연의 심기를 건드려 그녀가 호텔을 바꾸기라도 하면 일이 좀 복잡해졌을 테니까.
그는 해연이 어설프게 감은 붕대 위로 입술을 묻었다. 해소되지 않은 욕망으로 머리가 자글자글 끓고 있었지만, 자신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이 만족스러워서 참을 수 있었다.
* * *
“하아, 하아…….”
해연은 빠른 속도로 오르내리는 가슴을 손으로 꾹 눌렀다. 문을 닫았는데도 바로 뒤에 그가 있는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잡아채 제 다리를 벌리고 안으로 불쑥 들어올 것 같은…….
“무슨 짓이야……. 왜 반응하는 건데?”
축축하게 젖은 아래가 선연히 느껴졌다. 이현의 욕망을 본 후, 몸이 자동적으로 반응했다. 해연은 남자의 욕망을 바라며 제멋대로 조였다가 풀어지는 속살의 움직임에 얼굴을 붉혔다. 수치스럽다. 그런데 그 수치조차도 몸을 흥분시켰다.
경계심을 너무 쉽게 풀었다. 아주 조금 불쌍해 보였고, 아주 조금 흔들렸을 뿐인데, 고작 그 작은 틈으로 남자는 순식간에 그녀에게 침범했다. 만약 그가 보내 주지 않았더라면. 그럼 어떻게 됐을까? 해연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미쳤어!’
아무리 넋을 놓아도 그렇지, 어떻게 그 사람을 상대로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이렇게 쉽게…….
게다가 너무 빨리 나온 탓에 정말 묻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다. 그의 정체가 뭔지, 왜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나는지.
‘그게 가장 중요한 건데.’
해연의 몸이 문을 타고 주르륵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무릎을 세워 앉은 채 팔에 얼굴을 묻었다.
“멍청아. 왜 또 넘어갔어…….”
학습 능력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을까. 해연이 자괴감으로 괴로워하고 있을 때, 화장실에 가려고 잠깐 깼던 유영이 문에 기대 주저앉아 있는 해연을 보고 기겁했다.
“깜짝이야! 언니 안 자고 거기서 뭐 해요?”
“어? 어어, 그게…….”
“왜 현관 쪽에서 그러고 있어. 설마 이 시간에 혼자 밖에라도 나갔다 왔어요?”
엉겁결에 잠에서 확 깨 버린 유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연을 바라봤다. 해연이 어설프게 웃으며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필 이러고 있는 걸 걸려서는.
“그냥, 바람 좀 쐬고 싶어서……. 근데 시간이 너무 늦은 거 같아서 안 나갔어. 정말이야.”
“잘했어요. 이 시간에 어딜 나가. 몇 시지? 헐, 두 시. 언니 빨리 자요.”
“으응.”
평소라면 더 꼬치꼬치 캐물었을 텐데 자다 나와서인지 유영은 해연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유영이 하품을 하며 화장실로 들어가자 해연도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로 올라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도 모자라 양손으로 볼을 감쌌다. 손에 닿는 얼굴이 뜨거웠다.
* * *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새벽, 동그랗게 떠 있던 달이 구름에 가려져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그 순간 스산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어둑한 밤을 타고 바닥에 깔려 있던 미세한 먼지들이 바람을 타고 이현이 흘렸던 피의 흔적을 중심으로 검은 연기를 내며 뭉쳤다.
처음엔 저를 덮은 먼지들을 튕겨 내며 융합을 거부하던 검은 피는 그럴수록 더욱 집착적으로 달라붙는 먼지에 덮여 점차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그러자 눈에 보이지도 않던 아주 작은 조각들이 피와 합쳐져 기이한 모양새로 변했다. 시간이 갈수록 더 빠른 속도로 커지던 그것들은 거품처럼 올록볼록 덩어리가 부풀었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하면서 좀 더 명확한 형태를 갖춰 나갔다.
세포가 분열하듯 점점 커지더니 머리가 먼저 생겨나고 그다음엔 팔, 다리가 나왔다. 인간 비슷한 형태가 되었을 무렵, 샛노란 눈동자가 초점이 잡히지 않은 채 스르르 움직였다.
이현에 의해 죽었던 괴물이었다. 머리에 심어졌던 폭탄이 터져 온몸이 산산조각 났던 괴물은 허공에 떠돌던 이현의 피를 머금고 다시 재생했다.
이지가 없이 풀어진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괴물이 멍하니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다 한해연이 머물고 있는 호텔에 도달하는 순간 확, 하고 초점이 잡혔다.
세로로 주욱 그어진 동공이 팽창했다. 이현의 피로 육체를 만들고, 해연의 냄새로 이지를 되찾은 괴물이 고개를 내려 제 손과 다리를 확인했다.
‘내가 왜 살아 있지?’
죽었던 기억이 생생했다. 한해연의 냄새에 취해 정신을 놓고 달려들었다가 여자의 뒤에 있던 무서운 것에 의해 죽었다. 그런데 왜, 살아 있는 거지?
그것도 이전보다도 더욱 강한 힘으로.
어떻게 되살아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살아 있다는 것과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괴물은 천천히 제 몸을 살폈다. 온몸에 정제된 힘이 돌았다.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던 살인 충동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 자체가 바뀌었다. 강해진다는 게 이런 기분이라고, 세포 하나하나가 꿈틀거리며 외쳤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달콤한 쾌감이었다.
이걸 순혈들은 일상처럼 느끼던 거겠지? 불공평하다. 고작 순혈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이런 힘을 독차지하는 그들이 증오스럽다.
손을 접었다 폈다 하며 새로 생긴 육체의 힘에 전율하던 괴물이 큰 소리로 웃었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
전신에 힘이 넘쳐났다. 잡종이라고 멸시당할 일이 없으리만큼 순도 높은 힘이. 괴물은 이 정도면 순혈들을 능히 상대하고도 남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저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윤시후라는 놈과 제 머리에 칩을 심었던 늙은이. 그리고 마지막엔 저를 죽였던 가장 강했던 놈까지 괴물의 뇌리에 차례대로 스쳐 지나갔다.
“좆같은 새끼들. 다 죽여 버릴 테다.”
그리고.
“한해연…….”
그년을 먹어야지. 괴물은 한해연의 냄새가 물씬 흘러나오는 호텔을 노려봤다. 무언가에 막힌 것처럼 막이 처져 있었지만, 괴물에게는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그저 먹고 싶기만 했다면 지금은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힘이 더욱 강해지는 느낌이었다.
괴물은 한해연을 먹으면 이보다 더 정순한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마치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지시를 내리는 것 같았다. 한해연을 먹으면 그 무엇보다 완전한 힘, 그 어떤 것보다도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고.
“……!”
그 순간, 괴물의 눈이 번뜩이며 위로 올라갔다. 화려한 도시의 불빛을 품은 새까만 밤하늘 사이로 목적지를 향해 날고 있는 하얀 새가 보였다.
괴물의 입이 주욱 찢어졌다.
순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