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의 아내-76화 (76/113)

76화.

딱 한 번 주인의 감정에 동화된 적이 있었다. 주인의 피를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그건 그녀가 원해서가 아니었고, 원하지도 않았었다. 이런 무자비한 감정의 동조는 형벌에 가까웠다. 이런 게 따라올 줄 알았다면, 주인의 피를 받아먹는 미친 짓은 하지 않았으리라.

다행히 지금은 주인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서 안주희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주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해연을 놓아줘 놓고 이렇게 매일 졸졸 뒤를 따라다니는 번거로운 행동을 할 이유가 있을까? 예전처럼 그냥 가둬 두는 게 더 낫지 않나?

한해연은 특별한 인간이었다. 정체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제 본질을 꿰뚫어 봤다. 분명 완벽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음에도 한해연은 자신의 꼬리를 잡았었다.

‘게다가 그 냄새…….’

별채에 있던 일족들이 한순간에 정신을 놓고 달려들 만큼 향기로운 냄새. 다행히 자신은 마지막 이성의 끈을 잡고 있어 살아남았지만, 일족들은 주인에게 그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

주인이 돌아온 뒤로, 아니, 한해연이 나타난 뒤로 모든 게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모든 일족 위에 있는 주인이 고작 인간 여자에게 휘둘리는 것 또한.

‘저 여자의 정체가 대체 뭐길래.’

한해연은 골치가 아픈 존재였다. 안주희는 제 아버지, 안재호가 윤경훈과 손을 잡고 수상한 짓을 꾸미고 있다는 걸 결국 주인에게 말하지 못했다. 그런 상태로 일이 터졌다.

아무리 잡종이라 하더라도 일족의 피가 섞인 이상 한해연 옆에 주인이 곁에 있다는 걸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잡종은 한해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건 지난번에 별채에서 벌어졌던 일족들의 흥분 상태와 비슷했다. 놀라운 건, 한번 주인에게 죽었던 잡종이 온몸이 기괴하게 꺾인 채로 다시 달려들었다는 것이었다. 정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잡종은 주인에게 잡히기 직전 폭발했다. 그래, 말 그대로 폭발이었다. 온몸의 살점이 터져 조각조각 났다. 아마 주인이 힘을 쓰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으리라. 그것도 최악의 사태로.

‘아버지의 짓인 건가…….’

안주희는 시후가 횡설수설하며 아버지가 잡종을 채갔다는 말을 떠올렸다. 그런 인위적인 폭발이 그저 우연일 리가 없다. 하지만 완벽하게 확신할 수 없는 이유는 죽었어야 했을 잡종이 다시 살아나 주인을 공격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아무리 교활한 수를 썼더라도 아버지에게 그 정도 능력은 없었다.

그녀는 주인의 등을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이걸 말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어차피 무슨 수를 써도 주인의 힘을 당해 내지 못할 테니 그냥 입을 다물어도 되는 걸까.

‘아니,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먼저 말을 해 놓는 편이 낫겠지.’

하지만 그건 윤일우가 없을 때 해야 한다. 안주희는 묵묵히 주인을 보고 있는 윤일우를 힐끔 바라봤다. 하필 윤일우가 윤시후의 사촌이어서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윤일우가 지금은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속내까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 엮여 있었기 때문에…….

‘교활한 인간.’

제 아버지였지만, 정말 짜증 나는 인간이었다. 자신이 꾸민 일이 수면에 드러나면 모두가 피해를 보도록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원래 그런 인간이었지만, 안주희는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자신이 그 인간의 딸이라는 사실에 환멸이 일었다.

* * *

그저 인정했을 뿐이다.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해도 부정할 수가 없는 감정이었기에. 하지만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가 한 짓까지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쁜 새끼.”

그녀가 짓이기듯 내뱉은 말에도 이현은 그저 옅은 미소만 지었다. 부정도 변명도 하지 않는 남자의 가난한 미소가 아파 보여서 해연은 불쑥 화가 났다. 이 남자에게 약해지는 자신에게. 그리고 자꾸 자신을 약해지게 만드는 이 남자에게.

“왜, 왜 웃어요? 당신이 뭘 잘했다고.”

“…….”

날카롭게 날이 선 말이 당혹스러웠는지 남자의 그린 듯한 미소가 움찔 사그라들었다. 축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는 남자의 행동에 해연의 속이 더 답답해졌다. 그에게 뱉어 냈던 불쾌한 감정이 고스란히 되돌아온 기분이었다.

‘내가 잘못한 거야? 왜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지어?’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몇 번 경험한 남자의 반응으로 보아 제 살 깎아 먹기밖에 되지 않을 게 뻔해 해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불편하게 가라앉은 꺼슬한 감정 뒤에 남자에 대한 동정심을 감췄다. 그를 동정하는 것은 제게 불합리했기에.

그 뒤로는 두 사람 다 침묵만 지켰다. 해연은 남자의 얼굴을 절대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남자의 상처에 의미 없는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어차피 병원에 가지도 않을 것 같으니 눈앞에서라도 사라지라는 기분으로 하얀 붕대로 꼼꼼히 상처를 가렸다.

“유영이는 왜 건드렸어? 옆집에 이사 왔다던 그 남자, 당신이 부리는 사람이잖아.”

“……믿지 않겠지만, 경호였어요. 당신 집은 위험한 위치에 있으니까. 이유영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당신에게 더 미움받을 거 같아서.”

“그러게요……. 정말 못 믿을 말이네요.”

“…….”

이현은 더 변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해연이 못 믿는 게 당연했기 때문에. 사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치우고 싶은 존재가 이유영이었다. 자신은 어떻게 해도 갖지 못하는 해연의 애정을 큰 어려움 없이 독차지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 하지만 그렇기에 더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 저열한 질투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힘들어하는 해연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사람의 존재였다.

청혈이 움직였는데도 해연의 곁에 사람이 남아 있다는 건 그가 지금까지 경험한 것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도 남아 있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유영은 오히려 전보다 더 해연에게 애정을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해연이 제게 조금이나마 틈을 보이고 있었다. 고작 이런 상처 따위로.

무언가 변하고 있다.

이현은 해연의 배를 모호한 눈으로 바라봤다.

‘저것 때문인가?’

분명 실패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기운이 해연의 자궁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 아니, 그도 모자라 마치 아이가 자라고 있는 것처럼 시간이 갈수록 그가 부었던 것 이상으로 기운은 커지고 있었다.

이 변화가 또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는 알 수 없다. 그가 시도했던 것들이 족족 안 좋은 쪽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에. 그럼에도 그는 무언가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이전과 달라지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

이거면 된다. 예전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력하게 해연의 죽음을 보지 않아도 되니까. 조금이라도 발버둥 칠 수만 있다면 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해 볼 작정이었다. 결말이 똑같은 파국이더라도. 그 파국에는 기필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해연의 무덤에 바칠 것이다.

다신, 절대 아무것도 되풀이될 수 없도록.

‘모두 끝내 버려야지.’

그가 생각한 마지막이란 이런 것이었다. 사실은 단 한 번도 긍정적인 미래를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발버둥 치면서도 끝은 똑같이 비참하리라고, 같잖은 희망을 짓밟은 채 절망이 우뚝 서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의식이 생긴 이후 단 한 번도 희망을 배워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삶은 언제나 고통과 절망뿐이었다. 그에게 주어질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는 듯이. 쓰레기는 오물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세상의 모든 것이 그를 조롱하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기뻐.’

분명 이 사실을 알면 해연이 그를 더욱 증오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뻤다. 온몸이 떨릴 정도로.

그는 해연이 어설프게 붕대를 감아 놓은 팔뚝을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상처는 별거 아니었다. 하지만 해연의 눈엔 다른 것 같았다.

‘고작 이런 상처 하나로 당신의 동정을 받다니…….’

이현이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웃자, 해연의 눈이 뾰족해졌다.

“왜, 왜 웃어요?”

“좋아서요. 너무, 너무 행복해서…….”

이렇게 당신과 눈을 마주치고, 대화를 나눌 수 있고, 한 공간에 단둘이 있을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해연의 의식을 조종해 혼자만의 사랑을 할 때도 이렇게까지 기쁘지 않았다.

아니, 그때는 외로웠다. 해연이 제게 좋아한다는 말을 했을 때는 심장이 타들어 갈 것처럼 아팠고, 괴로웠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했던 걸 후회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해연과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있을 수 없을 테니까.

‘비록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늘 그랬으니까. 그러니 그때까지 이 행복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하고 싶었다.

해연은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가 내보인 감정이 당혹스러워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짧은 숨을 연달아 내쉬는 해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현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해연의 몸이 흠칫 튀었다.

“지금, 키스하고 싶다고 하면 안 되겠죠?”

“다, 당연한 말을……!”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확 돌아간 해연은 열망을 띈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고 훅, 숨을 들이켰다. 한번 붙들린 눈이 떼어지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미 흙탕물이 되어 버린 웅덩이에 커다란 돌이 거세게 떨어진 느낌이었다. 안 그래도 얕은 바닥이 온통 파헤쳐져 정신없이 흔들려 버린 제 속이 온통 까뒤집히는 것 같은 불안감마저 들었다.

고작 손이 잡히고, 눈만 마주하고 있을 뿐인데, 해연은 덫에 걸린 새처럼 나약하게 떨었다.

“해연…….”

그가 더 가까이 왔다. 마치 입을 맞출 것처럼. 본능적으로 해연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온도가 높은 숨이 흘러나오는 도톰한 입술을 이현이 깊은 눈으로 훑었다. 당장이라도 집어삼켜 저 뜨거운 안을 온통 헤집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짓을 하면 안 되겠지. 어떻게 좁힌 거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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