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약속? 그럼 따라다니지도 말았어야지. 사람을 신경 쓰이게 하는 짓은 다 하고는 약속이라는 말을 꺼내는 남자가 어이없었다. 하지만 그 덕에 떨림이 완전히 가라앉았다. 해연은 남자의 팔을 떼어 내고 몸을 휙 돌렸다. 그러고는 그의 다치지 않은 팔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혹시라도 유영이 잠에서 깨기라도 하면 곤란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리를 피한 거였다.
이현은 순순히 그녀를 따라왔다. 그의 시선은 줄곧 제 팔을 잡을 그녀의 손에 닿아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간 해연이 그의 팔을 떨치듯 놓았다. 해연은 묘한 아쉬움이 담긴 그의 시선을 피하며 방금 전까지 그의 팔을 잡았던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어, 어디, 예요?”
이현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당신이 머물고 있는 방. 없으면 지금이라도 잡아요…….”
돈이 많은 사람이니 호텔 방 하나 잡는 건 별로 어렵지도 않을 것이다. 해연의 말에 이현이 모호한 눈으로 그녀를 잠시 보다가 해연의 방, 바로 맞은편에 있는 문을 열었다. 이럴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정말 이렇게 가까이에 잡았을 줄은 생각하지 못한 해연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너무 기가 막힌 나머지 미세하게 남아 있던 경계심마저 사라져 버렸다. 해연은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이럴 거면, 이럴 거였으면서 그런 약속은 왜 했어요?”
검은색 셔츠만 입은 늘씬한 등이 흔들리더니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 순간, 남자는 그녀의 뒤로 손을 뻗어 문을 닫았다. 철컹, 잠금장치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해연의 몸이 움찔 굳었다. 하얗게 질린 해연의 얼굴을 보면서도 그가 또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커다란 남자의 몸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해연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지만, 곧 차가운 문에 부딪혔다.
“당신도 알고 있었잖아요. 내가 놓아줄 리가 없다는걸.”
“……!”
“게다가 기껏 참고 있는 사람을 부르기까지 하고. 단둘만 있을 수 있는 공간까지 스스로 굴러들어 왔는데…….”
이현이 문에 등을 딱 붙이고 선 해연의 볼을 손으로 쓸었다. 그는 얼어붙은 해연의 눈을 직시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이렇게 쉽게 따라 들어와요, 응?”
내가 했던 짓을 다 기억하고 있으면서. 원래 낮았던 목소리가 더욱 낮아져 위험하게 들렸다. 차가운 손가락이 볼을 쓸었다가 살짝 떨어졌을 때, 그의 팔뚝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녀의 입술에 툭 묻었다. 그래서 해연은 본능적으로 돋아 나온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 할 거예요?”
“…….”
“내가 싫어하는 짓, 할 거냐고.”
해연은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디서 나온 확신인지, 그는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못할 거라는 걸, 해연은 알고 있었다. 뛰어내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 그 뻔하디뻔한 행동에도 못 견디고 뛰쳐나와 놓고 이제 와서 위협이라니.
정신없이 흔들리던 해연의 눈이 단단해지자 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렸다.
“……당신은, 너무 사랑스럽고, 또 너무 약았어요.”
그렇게 두려워하고 겁에 질렸으면서, 결국 또 단단해졌다. 약한 듯, 약하지 않은 여자. 겉모습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본질은 늘 같았다.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 이렇게나 예쁜데, 내게 마음 한 자락 주지 않는 여자…….
“그래서 계속 나쁜 짓을 하고 싶어요. 언제나, 매 순간, 계속.”
그러니 빨리 여기서 도망치라고, 그가 속삭였다.
* * *
‘도망치라고?’
해연은 거의 맞붙을 듯이 가까이에 있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녀가 떨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가 떨고 있는 걸까. 그렇게 혼란스러울 정도로 마주한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위협을 받고 있는 그녀보다 훨씬 더 겁먹은 것처럼.
“가요, 제발. 날 싫어하면서 착각하게 하지 말고.”
“…….”
“나는, 괴물이잖아요…….”
“……!”
스스로 괴물이라고 말하는 그의 씁쓸한 표정에 해연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많이 봤던 표정이었다. 익숙하고 또 익숙한 얼굴. 순간 해연의 머리에 그의 얼굴과 흐릿한 어린 남자아이의 얼굴이 오버랩 됐다.
‘…….’
해연은 멍하니 그의 눈을 바라봤다. 남자의 새까만 눈동자가 기억이 날 듯 나지 않았다. 분명히 익숙한데……. 기억, 해야 하는데…….
해연이 기억해 내려 할수록 아이의 형체는 더욱 흐려졌다. 그러다 이내 사라져 버렸다.
‘방금 뭐였지?’
그녀의 침묵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남자가 쓴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기울어진 상체를 천천히 세웠다. 금방이라도 다시 사라질 것처럼. 해연이 다급히 남자의 팔을 꽉 잡았다.
“가지 마―!”
“…….”
“아직, 아직 할 말이 남았어. 난 이제 도망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아직 당신이 사라지면 안 돼. 아직 이 남자와 한자리에 있는 게 편하지 않았다. 사실은 무서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겁이 난다. 하지만, 하지만, 이 남자가 사라지면, 이 무서운 세상에 혼자가 된 것 같아 더 겁이 났다. 그렇게 자신을 괴롭혔던 남자가 주는 기묘한 안정감에 도망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가장 무서워해야 할 사람의 곁이 가장 안전하게 느껴진다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해연의 얼굴이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가지 마.”
해연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잡힌 채 가만히 있었다. 해연은 살짝 시선을 내려 자신이 잡고 있는 그의 팔을 바라봤다. 하필 다친 팔이었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피로 그녀의 손까지 흠뻑 젖었다. 해연은 흠칫 놀라 황급히 손을 떼었다.
“왜 치료하지 않았어요? 병원에 있었잖아. 그런데 왜…….”
“해연이 불쌍하게 생각해 줄까 봐요.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신경 써 줬으면 싶어서, 그래서 그랬어요.”
남자의 황당한 말에 해연이 번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 남자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고작 그딴 것 때문에 이렇게 큰 부상을 치료하지 않았다고?
“당신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미쳤어?”
“…….”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 주제에 남자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해연이 놀라 몸을 문에서 살짝 떼자 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작게 열린 문 사이로 나타난 사람은 안주희였다. 그녀는 해연에게 붕대와 소독약, 연고가 든 약상자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저희 말은 전혀 듣지 않으셔서……. 제발 부탁드려요, 해연 님.”
해연이 얼떨결에 상자를 받자마자 안주희는 이현의 눈치를 보고 바로 문을 닫고 나갔다. 해연은 멍하니 닫힌 문과 제가 들고 있는 상자와 이현을 차례로 바라봤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이런 걸 건네주고 간 이 상황이 황당했다.
“주세요, 당신이 그런 것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
이현이 그녀가 들고 있는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해연은 입술을 꾹 깨물고 그대로 그를 끌고 현관을 지나 넓은 방 한가운데 있는 소파 쪽으로 향했다. 그녀에게 끌려와 강제로 소파에 주저앉은 남자는 해연을 당혹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왜…….”
“입 다물고 있어요. 당신이 예뻐서 이러는 거 아니니까.”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이걸 당신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 해연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남자의 팔을 살폈다. 상자에서 소독약과 붕대를 꺼내긴 했는데 움푹 파인 상처가 너무 심각해 보여서 선뜻 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완벽한 조각 같던 미끈한 형태가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섣불리 손을 대기도 어려웠다. 이렇게 큰 상처를 고작 이딴 걸로 처치하고 방치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병원에 가야…….”
해연이 몸을 벌떡 일으키려고 하자 남자가 황급히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아니요, 당신이 해 줘요. 그럼 다 괜찮아질 것 같으니까.”
제발, 남자가 애원하듯 말했다. 해연은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도 회의적이었다. 괜찮아져? 이런 상처가 어떻게 괜찮아질 수 있어? 자신은 의사가 아니었다. 처치를 해 봤자 소독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제 상식으로는 이 상처는 병원에 가서 바로 수술실로 들어가야 할 정도였다.
이런 상처를 입었으면서, 고작, 제게 불쌍해 보이고 싶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 하나로 계속 방치하고 있었다고?
아무리 이 남자가 인간이 아니라도,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 감각이 아예 없는 게 아닌 이상은…….
해연은 떨리는 눈으로 얌전히 팔을 내민 채 그녀를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는 이현을 바라봤다.
‘당신 대체 나한테 왜 이래? 왜 마음껏 미워하지도 못하게 하는 건데?’
왜 자꾸 마음이 약해지게 만드는 거야? 대체 왜?
사실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 남자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외면하려 발버둥 쳤던 해연은 결국 이 가련한 얼굴을 한 괴물의 감정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 *
이현과 한해연이 함께 있는 모습을 처음 본 윤일우가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껌벅거렸다. 이미 수차례 주인이 한해연 앞에서 약한 척하던 모습을 봐 왔던 안주희는 그것 보라며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물론 윤일우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도 처음에는 한해연 앞에서 꼬리를 살랑거리는 주인의 모습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었으니까.
좋아하는 인간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 일부러 잡종 따위에게 부상당하다니. 그런 자존심도 없는 짓을 할 만한 일족은 없었다. 이건 주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다만, 그녀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품에 끼고 돌았던 한해연을 왜 놓아주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