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해연은 파티션 커튼이 쳐진 좁은 공간을 가만히 바라봤다. 분명 여기에 있다. 그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강이현, 당신 여기 있어?”
소란스러운 응급실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 건가. 해연은 아까보다 조금 더 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강이현!”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없다고? 그럴 리가……. 해연이 더 큰 소리로 부르려는 순간, 파티션 커튼이 휙 쳐지더니 유영이 돌아왔다.
“와 병원 화장실에도 사람 엄청 많아요. 응급실이 원래 이렇게 붐볐나……. 언니 왜 그래요?”
유영은 아직 물기가 덜 닦인 손을 휘휘 내젓다가 해연의 놀란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갑자기 커튼이 쳐져서 조금 놀랐어……. 빨리 왔네.”
“엥? 뭐가 빨라요. 나 화장실에서 엄청 줄 오래 섰는데.”
유영이 수액 팩을 살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해연이 생각에 빠진 듯이 멍하니 넋을 놓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와, 많이 줄었네요. 좀 있다가 링거 빼 달라고 해도 되겠다.”
“그래……?”
“네, 아 그런데 나 아까 병원 로비에서 아는 사람 봤어요.”
“누구?”
“음, 사실 이거 아주아주 지난 일이고, 별일 아니어서 말 안 했던 거거든요? 듣고 놀라지 말아요.”
“뭔데? 무슨 일 있었어?”
“아, 언니 심각해졌다. 진짜 별일 아니구우……. 나 언니네 집에 들어왔던 날이요. 언니 동네 골목, 밤에 진짜 무섭더라고요. 지난번에 검은 옷 입은 체격이 엄청 좋은 남자가 내려오는데 저 진짜 겁먹어 가지고 완전 쪽팔린 짓 했잖아요.”
“밤엔 택시 타라고 했잖아!”
침대에 앉아 있던 해연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너무 놀라서 손이 덜덜 떨렸다. 링거 줄이 팽팽하게 늘어나자 유영이 깜짝 놀라서 해연을 다시 침대에 앉혔다.
“아이, 진짜 아무 일도 아니었다니까. 무슨 일 있었으면 내가 지금 언니랑 어떻게 있어요. 아무튼 진정하고 끝까지 좀 들어 봐요. 알고 보니 그 검은 옷 입은 남자가 옆집 사는 사람이었어요. 제가 소리 엄청 크게 질러서 경찰도 오고 난리였는데, 다행히 그 남자가 잘 처리해 줬구요.”
“……그나마 다행이네.”
잠깐. 옆집에 체격이 좋은 남자가 살았었나? 해연의 빌라는 한 층에 세 가구가 사는데, 하나는 해연처럼 여자 혼자 살고, 또 하나는 강아지를 키우는 노부부가 산다. 유영의 말이 맞다면 자신이 강이현, 그 남자 집에 있던 사이에 이사를 왔다는 말일 거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집이 비워지고 다른 사람이 이사 왔다는 게 뭔가 석연치 않았다.
“정말 괜찮은 사람 같았어? 위험해 보이진 않고?”
“어? 언니는 모르세요?”
“응. 아무래도 내가 나가 있던 사이에 이사 온 모양이네.”
“그렇구나……. 근데 좋은 사람 같았어요. 제가 진짜 진상처럼 소리 고래고래 질러서 경찰도 오고 난리였는데, 그 사람이 다 해결해 줬거든요. 그리고 출근할 때 마주쳤는데도 당연한 거라고, 오히려 자기가 겁줘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더라구요.”
“그러게. 진짜 좋은 사람이네.”
“네. 그리고 엄청 잘생겼어요. 키도 크고, 몸도……아.”
“참나. 그새 얼굴도 보셨어요?”
“히히히히.”
저도 민망했는지 유영이 우스꽝스러운 소리로 웃었다. 해연도 웃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유영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이름에 표정이 움찔 굳었다.
“거기 형제들 다 잘생겼더라고요. 윤시후라고, 그 남자 남동생이 있었는데 걔는 완전 바로 아이돌 데뷔해도 될 정도였어요. 형하고 달리 성격도 좀 치대는 편이라 덕후 몰이 잘할 것 같은, 왜 약간 반항아처럼 말 안 들을 거 같은데 은근 애교 많은 타입이요.”
“윤, 시후……?”
윤시후. 강이현의 집에서 봤던 그 남자애와 이름이 똑같았다. 다른 사람이라는 안이한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유영이가 제집에 오게 됐던 계기도 그 남자 때문일 게 분명했으니까. 그렇다면 조금 전 병원 로비에서 봤다는 그 남자도 강이현의 수족이리라.
‘유영이까지 감시하고 있었어?’
별다른 일은 한 것 같진 않지만, 옆집까지 들어와 있을 정도로 유영이의 가까이에서 있었다는 게 소름 끼쳤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마음속 어딘가에 안도감이 들었다. 불러도 오지 않는 그 남자가 결국 제 곁에 있다는 반증 같아서.
“그러고 보니 나름대로 친해졌었는데 인사도 못하고 왔네. 또 볼 수 있으려나.”
“그러게…….”
정신이 다른 데로 팔린 해연이 구색만 맞춘 호응을 하자 유영이 “어휴, 영혼 없는 대답 봐.” 하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진짜 보면 눈이 개안한다니까요? 하긴, 언니는 별 감흥 없으려나? 더 잘생긴 사람을 봤, 아, 실수…….”
미친, 내 입 어떡해. 유영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썹을 아래로 축 내리고 해연의 눈치를 살폈다.
“히잉, 언니, 미안해요. 마침 병원이니까 의사 쌤한테 내 입 좀 꿰매 달라고 할게요.”
“괜찮아. 별것도 아닌데 무슨.”
“그래두우…….”
“진짜 괜찮아. 언니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니까 오버하지 마세요, 이유영 씨.”
해연이 유영이의 볼을 살짝 잡아당기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자 유영이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괜찮아요? 아니, 정말? 진짜? 레알?”
의심스러운 듯이 유영이 몇 번이고 물었고, 해연은 유영이 물을 때마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괜찮을 수밖에. 자신이야 말로 그 사람에게 구해지고, 조금 전에는 나타나라고 이름을 부르기까지 했었으니까. 그러니 유영이의 실수 한 번에 예민하게 굴 이유가 없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불안감일까, 안도감일까. 아니면 그 모두가 다 합쳐진 걸까.
‘이곳에 있는 거면 제발 그 팔 좀 치료해 줘. 당신한테 신경 쓰고 싶지 않단 말이야.’
걱정해야 할 것은 그 남자가 아닌데. 아까 그 알 수 없던 일을 더 신경 써야 하는데.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이 이해할 수 없는 감정까지 모두 그 남자 때문이었다. 그녀는 한숨처럼 긴 숨을 흘리며 잘게 떨리는 손을 말아 쥐었다.
* * *
수액을 다 맞고 호텔로 돌아가니 열한 시였다. 유영이 피곤한 얼굴로 하품하며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해연은 소파에 앉아 시계를 가만히 바라봤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그 남자는 나타날 기색이 없었다.
‘정말 나타나지 않을 거야? 내가 부르는데도?’
그렇게 제 마음대로 자신을 휘두르더니, 별것도 아닌 약속은 참 잘도 지켰다. 그럴 거라면 따라다니지도 말았어야지. 구해 주지도 말고, 그런 눈으로 보지도 말고. 신경 쓰이게 하지도 말았어야 했다.
“바보 같아, 정말…….”
강이현이 아니라, 자신이 바보 같았다. 인간도 아닌 괴물을 뭐 하러 걱정하는 건데. 게다가 내가 부른다고 그 남자가 즉각 나타나야 할 이유도 없잖아. 무슨 자신감이야?
그 사람은 날 좋아하는 게 아니라, 제 마음대로 가지고 논 것뿐이었다. 지금도 구해 주는 척하면서 또 자신을 홀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애절한 눈빛과 목소리와 미소에 마음에 약해져 또다시 멍청하게 구는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해연은 소파 위로 다리를 올려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 남자가 거짓말을 하지 않은 건 있었다.
임신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
호텔에서 지낸 지 일주일 뒤, 남자의 말대로 생리가 시작되었다. 생식 능력이 없다던 말이 정말이었을까. 사실 해연은 아직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강이현은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간인 자신을 듣기 좋은 말로 홀린 뒤, 또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아니야, 그만하자.’
의심해 봤자 지금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끝도 없는 의심은 혼자만 괴로워지고, 힘들어질 뿐이었다. 오로지 자신만.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해연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이상한 일들이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불길한 직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알아야 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휘둘리기만 하는 건 싫었다. 그건 지금까지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에.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호텔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창문 크기가 작았지만, 상체를 내밀기엔 충분했다. 봄과 겨울의 경계선에 선 바람이 해연을 향해 몰아쳤다. 호텔은 빌딩이 빼곡한 거리에 있어 그 틈새로 바람이 세게 불었다. 샤워를 한 뒤 그대로 늘어트린 상태였던 머리카락이 바람에 제멋대로 날렸다. 해연은 꼭 뛰어내리기라도 할 것처럼 아래를 가만히 내려 보며 그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만약 이래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쩌지.’
모르겠다. 왜 이런 짓까지 해 가며 그 남자를 봐야겠는지를. 해연은 제 목숨을 두고 강이현에게 협박하고 있는 자신의 행동이 우습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수렁에서 한 발 내딛기 위해선 그 남자를 만나야 했다. 반드시.
창문 밖의 높은 허공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문 해연이 창틀에 한 발을 올렸다. 그리고 나머지 발을 마저 올리려고 했을 때였다.
“……!”
순간. 다급한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휘감았다. 해연의 몸이 뒤로 훅 끌려갔다. 그렇게 나오라고 해도 보이지 않던 남자가 결국 나타났다. 이 웃기지도 않는 자살 위협으로. 그녀는 남자의 존재에 본능적으로 올라오는 공포를 내리눌렀다.
‘떨지 마. 무서워하지 마. 지금 그딴 건 아무것도 도움 되지 않아.’
해연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고개를 내려 제 허리에 감긴 그의 팔뚝을 확인하니 예상대로 아까 다친 그대로였다. 이 상태로 계속 나를 따라다녔던 건가.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속이 울컥 뒤집혔다. 자신도 바보 같았지만, 이 남자는 더 이상했다.
“아까, 왜 불렀는데 나오지 않았어요?”
떨지 말아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이 불러내 놓고 겁을 먹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해연은 상체를 들썩이며 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침착해. 침착하자, 한해연. 할 수 있어.’
해연이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 남자는 그동안에도 계속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해연의 숨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을 무렵, 마지못한 듯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