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미쳤나 봐…….”
“네?”
해연이 숨소리처럼 가냘프게 중얼거린 말에 유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못 들었어요. 무슨 말이었어요?”
“아니, 그……. 아, 이진아 피디님은 어디 계셔? 내가 너무 늦어서 또 폐를 끼쳤네.”
“아,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잠깐만, 언니 얼굴 살짝 옆으로 돌려 봐요.”
“아직도? 어떡해. 빨리 가야지.”
해연이 화들짝 놀라 이럴 때가 아니라며 화장실에서 나가려고 하자 유영이 해연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고정했다.
“아이참. 가만히 좀 있어요. 어차피 늦은 거 일이 분 더 늦는다고 달라지지 않거든요?”
“하지만.”
“이 상태로 가면 오히려 더 민폐예요. 피디님이 언니 보고 얼마나 놀라겠어요.”
“……그렇게 심해?”
“어어어엄청 심해요. 그러니까 내가 다 됐다고 할 때까지 가만히 있어요.”
유영이의 단언에 해연은 우습게도 이런 모습을 그도 봤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또…….’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유영은 열심히 손을 움직여 해연의 얼굴을 이리저리 만지더니,
“좋아요. 딱 적당히 아파 보이면서 예쁘네요.”
하고 만족스러워했다.
“자, 이제 가요.”
후딱 얼굴만 보고 바로 호텔로 돌아가자며 유영이 해연을 끌고 이진아가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향했다. 해연은 화장실을 나오며 슬쩍 주변을 돌아봤다.
‘어디 있을까? 아니, 있긴 한 건가?’
만약 있다면 제발 그 팔 좀 치료해. 이건 당신이 좋아서 신경 쓰이는 게 아니야. 그냥, 그냥…….
‘그냥 다친 사람을 보면 누구에게나 드는 얄팍한 걱정일 뿐이야.’
그래, 고작 그 정도의 감정일 뿐이다. 해연은 계속 그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고개를 억지로 돌렸다.
* * *
‘한, 해연……?’
이진아는 이유영의 뒤로 보이는 한해연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한해연이 살아 돌아온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대체 왜, 왜 한해연이 아직도 살아 있는 거지?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녀는 늦어서 죄송하다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는 한해연을 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오랜만에 봬요, 해연 님.”
이진아는 죽도록 한해연이 반가웠다. 너무 반가워서 그대로 끌고 괴물에게 데려가고 싶을 정도로. 그녀는 아주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한해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한해연은 잠시 주저하더니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이유영에게 들었던 바론 꽤 안 좋은 일을 겪은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제 손과 마주 잡은 한해연의 손은 상처 하나 없이 고왔다. 손의 감촉은 관리를 잘 받은 것처럼 아주 매끄러웠고, 따뜻했다.
‘안 좋은 일을 겪었다고?’
한해연은 조금 초췌해 보이긴 해도 예전에 봤을 때보다 예뻐졌다. 피부도 좋았고, 살짝 수심이 잠긴 듯한 시선을 내리깐 눈은 도리어 매력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저런 모습으로 무슨 안 좋은 일을 겪어? 이진아는 속으로 조소했다.
안 좋은 일을 겪은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저 여자 때문에 괴물에게 맞고 목이 졸리고, 죽을 뻔한 자신이. 그러니 저 여자가 괴물에게 먹혀 줘야 하는데 왜 아직도 살아 있는 거야? 대체 당신은 뭐가 그렇게 특별해서?
해연은 제 손을 꽉 쥐고 놓아주지 않는 이진아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피디님? 저, 손을 좀…….”
“어머, 죄송해요. 너무 반가워서 그만.”
이진아는 그제야 해연의 손을 놓았다. 살짝 저릿한 손을 다른 손으로 주무르며 해연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해연은 이진아에게 먼저 지난 일에 대해 사과했다. 아무리 저쪽에서 그 일에 대해 꺼내지 않고 있더라도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피디님, 저번 면접 때 연락을 드리지 못했던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개인적인 일로 경황이 없어서…….”
“어머, 지난 일인걸요. 괜찮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도…….”
해연은 억지로 입술을 끌어 올렸다.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는 이진아가 이상할 정도로 불편했다. 만약 이 자리에 유영이만 없었더라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을 정도로.
갑자기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처음 봤을 때는 시원시원한 성격이라 호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지금 이진아가 예전과 다른 태도를 보인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달라진 게 없는데, 묘하게 불편하고, 어색하고……. 그래, 꺼려진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앉으세요. 식사는 뭘로 하실래요? 아직 안 드신 거 맞죠?”
“아니요, 그게.”
식사라니, 그렇게까지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해연이 거절의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유영이 먼저 치고 나왔다. 유영은 아예 의자에 놓고 왔던 숄더백을 어깨에 메기까지 했다.
“피디님, 해연 언니가 많이 아파서 바로 호텔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지금까지 기다려 주셨는데 정말 죄송해요.”
“……네?”
유영의 말에 이진아의 미소가 살짝 굳었다. 간다고? 이렇게?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해연을 잡아 놔야 한다. 잡아서, 잡아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괴물에게 데려가야 한다. 하지만 제 다급한 마음도 모르고 이유영은 한해연의 팔짱을 끼고 나갈 준비를 했다.
“멀쩡해 보여도 아까 엄청 비틀거려서 지금 병원에 가 보려고 하거든요.”
“그, 아니……. 이렇게 빨리요? 오랜만에 봤는데 조금 더……. 아, 저희 일 얘기도 해야 하잖아요.”
“네? 무슨 일이요? 피디님이 아까 일은 없었던 걸로 하자고 하셨잖아요?”
“…….”
그랬다. 이렇게 한해연이 살아 올 줄 모르고. 이진아가 입을 꾹 다물자 유영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내일 회사에서 보자며, 한해연을 끌고 나갔다.
잡아야 하는데, 잡을 명분이 없었다. 이진아는 이유영과 함께 문을 열고 나가는 한해연의 등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 * *
유영이 해연을 끌고 음식점 밖으로 나오면서 뚱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진짜 웃긴 사람이야. 아까는 언니 늦는다고 칼같이 일 같이 못한다고 그러더니 무슨 일 얘기람.”
“그래도 회사에서 계속 볼 사람인데 그렇게 말해도 괜찮겠어?”
자신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유영은 사정이 달랐다. 피디면 그 팀의 가장 상급자인데 괜히 유영이 미운털이 박힐까 걱정이 됐다. 해연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유영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자기도 은근히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해연의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뭐, 그거 가지고 싫은 티 내면 이직하죠, 뭐. 회사가 거기뿐인가?”
“그래도 좋은 회사잖아. 너도 꼭 들어가고 싶어 했고…….”
이런 입바른 말을 할 거였으면 아까 했어야 했는데. 해연은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 유영의 마음을 더 무겁게 한다는 걸 깨달았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었다. 계속 의지하고 있는 걸로도 부족해 유영이의 직장 생활에까지 안 좋은 영향을 끼치다니. 제게도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라고는 해도 결과론적으로 피해를 끼쳤다는 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갑자기 눈을 떠 보니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원래 이러지 않았는데……. 무력감이 해연의 가슴을 쿵 하고 세게 내려쳤다. 해연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유영이 왜 그러냐며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그건 언니가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언니도 누가 나를 그렇게 대하면 화 안 나겠어요?”
“그거야, 당연히…….”
말할 것도 없이 화가 날 것이다. 해연이 주저 없이 대답하자 유영이 활짝 웃었다.
“그것 봐요! 자, 그럼 우리 이제 병원 가요!”
“뭐?”
무슨 병원? 해연이 의아해하자 유영이 해연의 팔짱을 척, 하고 꼈다.
“언니 얼굴 너무 하얗게 질려서 안 되겠어요. 수액 하나만 맞아요.”
유영은 그대로 해연을 근처에 있는 병원 응급실로 끌고 갔다. 아무리 해연이 괜찮다고, 그냥 호텔로 가자고 해도 유영이 너무 강경히 주장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응급실은 번잡하고 소란스러웠다. 자신보다 더 위급한 환자가 많은 곳에서 침대 하나를 차지해서 느긋이 수액을 맞고 있는 게 민망했다. 그리고 병원에 있으니 이현의 팔에 났던 상처가 더 신경 쓰였다. 피가, 너무 많이 흘렀었다.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그 사람인데.
해연이 초조한 얼굴로 아직 꽉 차 있는 수액 팩을 힐끔거리자 유영이 팔짱을 끼고 눈을 부릅떴다.
“한 시간은 걸린다고 했으니까 자꾸 그렇게 보지 말아요.”
“으응…….”
“오늘 나 걱정시킨 벌이니까 내 생각을 해서라도 언니가 참아요.”
“알았어.”
해연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영은 해연의 옆에 앉아 핸드폰을 뒤적거리며 무심히 말했다.
“제주도로 내려간다는 소리 하지 말고 언니 나 이사할 때 같이 들어가요.”
“뭐?”
“나중에, 언니가 진짜 괜찮아졌다고 생각이 들면 안 잡을 테니까 괜히 고집부리지 말라구요.”
“유영아, 나 정말 괜찮아. 이것도 엄청 많이 나아진 거고, 또 더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까…….”
“됐구요. 이제 언니 말 안 들을 거니까 얌전히 내가 하자는 대로 해요. 그럼 얌전히 링거 맞고 있어요,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
해연은 한숨을 삼켰다. 오늘 괜히 약속을 잡아서 유영이의 걱정만 더 키웠다. 이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렇다고 유영이 하자는 대로 할 생각은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 당장이라도 떨어지고 싶었다. 아까 겪었던 걸 생각하면, 그 끔찍하고 이상했던 일들은 아직 끝난 게 아닌 것 같았으니까.
‘또 무슨 일이 생길까. 이게 끝이 아니라면, 지금까지보다 더 안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는 걸까?’
그녀는 자신이 이상할 정도로 담담하게 그 일을 떠올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이유 또한.
‘그 남자 때문이야…….’
위험한 일이 생기면 또 그 남자가 나타나 구해 줄 것 같아서. 그런 마음이 남자에 대한 미움까지 희석시켰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제게 그 어느 누구보다 위험한 사람이 강이현, 그 남자였다.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끔찍하다고 말한 게 바로 얼마 전인데 오늘 한번 구해 줬다고 이렇게 쉽게 마음이 돌아설 수 있는 건가.
‘계속 나를 그런 눈으로 보니까.’
자신을 향해 온 힘을 다해 웃는 미소가 도리어 아프게 느껴지는 건 그의 눈이 너무 깊어서였다. 힘든 사람은 난데, 그 남자가 더 괴로운 얼굴을 해서 이런 당치도 않는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꼭 내가 잘못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