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의 아내-72화 (72/113)

72화.

남자는 더욱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남자의 심장 박동 소리가 느껴졌다. 남자의 팔이 감긴 허리와 배가, 아니 온몸이 그의 심장 소리에 동조하는 기분이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사람이었다. 사실은 그 인간도, 짐승도 아니었던 끔찍한 외관의 괴물보다도 더 최악의 짓을 했던 남자였다. 그런데 왜 이 품이 안전하게 느껴질까. 세상의 모든 것이 그녀를 공격할 것처럼 날카롭고 거칠고 두려웠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고, 어지러웠던 세상이 남자의 존재로 겨우 안정을 찾은 기분이었다.

온몸을 울리던 남자의 숨결이, 심장 박동이 점차 차분히 가라앉는다. 해연의 숨결도 남자를 따라갔다. 손끝 하나 움직여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겨우 찾은 평온이 깨질 것 같아서.

남자에게 안긴 채 정면을 멍하니 보고 있던 해연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 기묘한 평온은 자신만 느끼는 게 아니었다.

‘뭐지……?’

한바탕 소란이 일었던 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며 의문을 품던 사람들도 원인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몇 번 갸웃하더니 원래 가던 길을 갔다.

그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진 괴물이 도로와 건물에 튕겨 사라졌는데도. 해연은 황망히 거리를 돌아봤다. 모든 것이 이전과 똑같았다. 부서진 것도 없고, 사람이 다치지도 않았다. 그래서 해연조차도 자신이 봤던 것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본능이 회피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잘못 본 거다, 아까 그건. 이전의 기억이, 공포가 몸에 붙어 버려서 다른 걸 보고 착각한 것이 분명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지금 자신의 상태는 비정상이었으니까.

그때, 멍하니 남자의 체온을 느끼고 있던 해연의 몸이 휙 돌아갔다. 순식간에 발밑이 붕 떴다. 단단한 팔이 오금 뒤를 단단히 받쳐 줘서 안정감이 있었지만, 이런 친밀한 자세는 싫었다. 아무리 지금 그로 인해 안정을 찾았다 하더라도.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바로 이 남자였기 때문에.

하지만 지친 몸과 정신은 반항하지 말고 순응하라고, 포기하라고 속살거렸다. 그럼 편해질 거라면서. 그건 무척이나 유혹적이었다. 말 그대로 지금 해연은 너무 지치고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정말 그럴까?’

남자의 가슴에 힘없이 얼굴을 묻고 있던 해연은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정말? 정말 그러면 편해진다고? 하지만 이 남자는 괴물이잖아. 내 몸을 몇 번이고 먹었잖아. 그런데 정말 편해질 수 있어?

‘그럴 리가 없잖아.’

해연은 남자의 어깨를 손으로 밀어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뒤통수를 누른 손에 힘만 더 들어갈 뿐이었다. 해연의 얼굴이 남자의 단단한 가슴에 꾹 눌렸다.

“이, 이거…….”

“위험하니까 잠깐 그대로 있어요.”

위험? 내게 당신보다 위험한 게 있던가? 또 무슨 거짓말로 자신을 속이려는 거냐고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그 순간 뒤에서 소름 끼치는 괴성이 들렸다. 해연의 몸이 흠칫 얼어붙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어?’

하지만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무언가가 터지는 폭발음과 함께 갑자기 거센 바람이 몰아쳤다.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제멋대로 휘날렸다.

“읏……!”

그 순간 그녀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그러고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소름 끼치던 괴성도, 무언가가 터지던 소리도. 미친 듯이 몰아치던 바람도 잠잠히 가라앉았다. 마치 진공 상태에 있는 듯한 적막이 이질적이었다.

다 끝난 건가?

대체 무슨 일이었던 거지? 해연은 이현의 목에 팔을 감을 채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가 흠칫 몸을 굳혔다. 시야가 한참 위에 올라가 있었다.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게도, 이현은 그녀를 안은 상태로 허공에 떠 있었다.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짐승으로 변하기도 하고, 제 정신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다가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던 것도 봤었지만, 그럼에도 믿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니라고, 언젠가 이 지독한 악몽을 깨는 날이 있을 거라고 부정하던 마음이…….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건 또 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분명 무언가가 폭발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래로 보이는 거리는 멀쩡했고, 사람들도 아무렇지 않게 가던 길을 가고 있었다.

아까처럼.

해연은 이 상황이 너무 이질적이고 기괴하게 느껴졌다. 황망히 아래를 내려 보던 해연의 눈이 남자의 팔에 닿았다. 그녀에게 닿지 않도록 살짝 옆으로 벌리고 있는 팔뚝에서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피의 양이 얼핏 보아도 중상이었다.

굳은 얼굴로 남자의 팔을 보던 해연은 천천히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팔이…….”

“괜찮아요, 이런 건. 당신이 신경 쓸 필요 없어요.”

“…….”

남자는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아픈 기색도 없이 고작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좋은 것처럼 웃고 있었다. 그 예뻤던 얼굴이 완전히 초췌해진 상태로. 그래서 그 애써 피어 올린 미소가 아팠다.

해연은 대체 이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밉고, 원망스러운 사람인데,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건지 모르겠다. 해연은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어색하게 시선을 내렸다.

그래, 신경 쓸 필요가 없지. 이 남자는 사람이 아닌, 괴물이니까. 고작 이런 상처로 어떻게 될 리가 없다. 아파하지도 않잖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땅에 내려 주었다. 해연이 중심을 잡고 바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남자는 없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 만에 남자는 모습을 감췄다.

해연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남자를, 이현을 찾았다. 자신을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남겨 두고 어디로 사라진 걸까. 못 박힌 것처럼 남자가 내려 준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있는데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해연은 그가 다시 온 건가 싶어 휙 고개를 돌렸다.

“언니!”

“유영아…….”

그가 아니었다. 누구보다 반가워야 할 사람을 앞에 두고 해연은 그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허망해졌다. 왜 자신이 그를 찾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혼자 남겨진 듯한 상실감을 느끼는 건지도…….

* * *

유영은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해연을 데리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해연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기 위해서였다.

“아, 언니 땀 좀 봐요. 어떡해, 진짜. 내가 데리러 갈걸. 혼자 계속 헤맨 거예요?”

“어? 으응, 괜찮아. 나 그래도 혼자 잘 왔어. 그치?”

가까운 거리였을 텐데 유영이도 그 소동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 이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해연은 어설프게 웃으며 말을 지어냈다. 다행히 유영은 그녀의 거짓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해연의 괜찮은 척하는 어설픈 웃음은 유영에게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네, 장해요. 장한데, 에휴…….”

고작 걸어서 십 분도 안 되는 거리였다. 그런데 거의 삼십 분을 헤매고 다 죽어 가는 얼굴로 가게 앞에서 마주쳤다. 이게 어떻게 혼자 잘 온 거란 말인가.

유영은 괜히 자리를 만들었다고 후회했다. 괜찮아진 줄 알았다.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으면서 혼자 애쓰고 있는 거였는데.

심지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이진아 피디의 필요 이상으로 냉정한 모습도 봤고.

이진아 피디가 한 말은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녀의 직책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때 해야 할 필요는 없는 말이었다. 오늘 이곳에 오는 내내 자신이 해연의 상태를 구구절절 설명하며 양해를 구했기 때문에 더 기가 막혔다.

‘그럴 거면 얼굴은 왜 그렇게 보고 싶어 했대?’

남이니까, 자신처럼 해연 언니와 각별한 사이가 아니니 그럴 수 있다고 이성이 말해 주고 있지만. 유영은 원래 타인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내 것이 가장 중요했고, 내 이득, 내 사람이 가장 우선이었다. 이진아 피디에게 호감이 있던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내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남의 입장 따위 알 게 뭐람.

이성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흥. 난 아주 감정적인 사람이라고!’

사실 지금 바로 호텔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놓고 온 가방도 가져와야 하고, 어쨌든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데 얼굴도 보지 않고 그냥 가기는 좀 그랬다. 게다가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을 텐데 해연 언니만 생각하고 그대로 돌아가기엔 회사에서 계속 볼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긴 했다.

속이야 어떻든 유영은 재빨리 티슈에 물을 묻혀 해연의 얼굴을 살살 닦았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니 아주 새파랗게 질린 게 보여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던 유영의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어휴 속상해. 얼굴이 이게 뭐야. 예쁜 얼굴이 다 상했네.”

유영이 제 새끼를 보살피는 어미처럼 굴자 해연의 얼굴에 살짝 웃음기가 돌았다. 딱딱하게 굳었던 몸도 살짝 긴장을 풀었다. 혼자 잘 왔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 남자가 자신을 구해 주고, 이곳에 자신을 내려 주어서 유영이를 만날 수 있었다.

안도해야 하는데 해연은 도리어 길을 잃은 듯한 막막함을 느꼈다.

큰 폭발음이 들렸었다. 그리고 그의 팔에 큰 상처가 생겼다. 그런데 자신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다친 곳은 괜찮을까? 항상 제 앞에서 웃기만 하는 사람이니 이번에도 안 아픈 척한 게 아닐까?

나타나지 않겠다고 했지만, 자신이 위험해졌을 때는 결국 제 앞에 나타났다. 꼭 계속 따라다닌 것처럼. 그렇다면 지금도 어디선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상처는? 설마 치료도 안 하고 계속 그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유영이와 함께 있는데, 중요한 약속도 있는 상황인데 신경이 온통 그에게 쏠렸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지금 당장 그를 불러내 상태를 보고 싶었다. 다신,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인데, 제 눈에 보이지 말라고 말한 사람이 자신인데, 그런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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