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전화 안 받네.”
유영은 이진아 피디와 먼저 식당에 자리 잡고 앉아 있다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해연에게 몇 번이고 전화했지만, 해연은 도통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핸드폰이 꺼진 것 같진 않은데……. 유영이 핸드폰을 들고 입술을 깨물자 물을 마시던 이진아가 물었다.
“안 받아요? 혹시 여길 못 찾고 있는 거 아닐까요?”
“호텔에서 엄청 가까운데……. 피디님 저 잠깐 호텔에 갔다 올게요.”
더 이상 앉아서 기다리기만 할 수 없어 유영이 직접 찾으러 간다고 하자 이진아는 어딘가 초조한 얼굴로 유영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금 있으면 오시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걱정돼서요. 피디님, 만약 저 나가고 나서 해연 언니 오면 전화 주세요.”
“……네, 그럴게요. 그런데 유영 님.”
“네?”
핸드폰만 달랑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던 유영은 이진아의 부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연 님과는 아무래도 일은 함께 못할 거예요. 이제 저희 쪽에서 더 배려하긴 힘들 것 같아서요. 약속을 이미 몇 번이나 어긴 상태인데, 오늘까지 시간을 못 맞추신 건 조금 난감해요.”
협업하게 된다 하더라도 일정을 맞출 수 있을지 이제 신뢰할 수 없다고 이진아가 딱 잘라 말했다. 유영은 함께 해연을 걱정해 주었던 이진아가 저렇게 냉정하게 말할 줄 예상하지 못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황급히 해연의 상태를 설명하려던 유영은 먼저 말을 덧붙이는 이진아의 냉정한 얼굴에 입을 다물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돼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테니까. 알잖아요, 약속을 지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해연 님 실력이나 커리어면 저희가 아니어도 일을 구하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 않을 거예요. 아무튼 유영 님도 빨리 다녀오세요. 걱정되신다면서요.”
“……네에…….”
유영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겨우 대답했다. 맞다. 해연 언니와 이진아 피디는 아무런 친분이 없는 상태였는데, 제게 상냥한 모습에 나중에 해연 언니와 이진아 피디가 친해지면 셋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해도 좋을 것이라고 저 혼자 멀리 나가 있었다. 이게 당연한 거였는데.
그럼에도 조금 빈정이 상했다. 저 말을 굳이 지금 해야 했나. 와야 할 사람이 오지 않아 걱정돼서 찾으러 간다는데. 진짜 불가피한 사고라도 당했을 수도 있잖아. 게다가 어찌나 냉정하게 말하는지 꼭 얼굴 좀 보고 싶다고 매일 괜찮은지 안부를 묻던 사람이 맞는지도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아니,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급해 죽겠는데 이진아 피디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바람에 시간만 낭비했다. 유영은 이진아 피디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후 해연을 찾기 위해 서둘러 호텔로 향했다.
“…….”
혼자 남은 이진아는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이었는데. 마지막까지 좋은 사람으로 남아도 됐었는데. 그런데 한해연이 오지 않는 것이 괴물의 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한해연과 거리를 벌려야 한다는 본능이 그런 말을 하게 만들었다.
‘정말 이제 끝인가?’
이제 한해연 때문에 괴물에게 맞고 목이 졸리고, 위협을 당하는 일은 없는 건가.
이진아는 한해연의 존재가 없을 때만 해도 이보다 더한 지옥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충분히 비참하고 힘들었다. 하지만 한해연이 나타난 뒤로 자신의 인생은 더욱 힘들어졌다. 그러니 한해연이 빨리 죽어 줘야 했다. 괴물이 한해연을 먹는다면, 그럼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곳도 지옥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았다.
그래, 한해연이 이곳에 올 수 있을 리가 없다. 오늘의 약속은 한해연을 호텔에서 불러내기 위한 목적 외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한해연이 호텔에서 나오는 순간, 괴물이 움직였으리라.
호텔 안에 있을 때 처리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괴물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유영이 알아서 한해연을 밖으로 끄집어낼 핑곗거리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이진아는 다시 물을 따라 마셨다. 목이 타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바로 일어나 돌아갈까 하다가 그래도 혹시라도 이유영이 돌아올지 모르니 잠시만이라도 자리를 지키자는 생각에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지금 집에 가 봤자 한해연의 시체나 보게 될지도 모른다.
괴물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당분간 여기 있어야지.
그렇게 바랐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속이 답답하고 비참한 걸까. 꿋꿋이 웃고 있던 이진아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아무도 날 비난할 수 없어.’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하면 똑같은 선택을 하리라. 그러니까, 그러니까…….
“안녕, 해연 님. 잘 가요.”
날 원망하지도 말고. 그게 당신의 운명이었을 뿐이니까. 이진아는 미약하게 올라오는 죄책감을, 자기 비하를 내리눌렀다.
* * *
괴물은 점점 가까워지는 한해연을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운이 좋았다. 제 머리에 칩을 박아 넣은 개 같은 새끼가 같잖은 짓을 하기 전에 이진아가 먼저 한해연을 만나기로 했다고 시간과 날짜를 받아 왔다. 이진아를 죽이지 않은 보람이 있었다. 괴물이 낄낄 웃으며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언제 머리가 터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좆같은 것들을 엿 먹여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마지막 만찬은 놈들이 감싸고도는 한해연이면 차고 넘쳤다.
흥분이 전신을 타고 오르자 몸이 울룩불룩 움직이며 본체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괴물은 아직 아니라고 본능을 꾹 눌러 내렸다.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고 또 기다려서 확실히 잡아먹어야 할 때를 노려야 한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식욕을 참아 본 경험은 없었다. 하지만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다. 분명 순혈의 개새끼 중 하나가 한해연의 뒤를 지키고 있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직접 본 한해연은 여러모로 특별했다. 한해연이 거리에 나오는 순간, 그 미친 듯이 달콤한 냄새가 그가 숨어 있는 곳까지 몰려들었다.
한해연은 달콤한 냄새만 나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 월등히 강한 존재가 여자의 안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건 괴물이 순혈에게서 맡았던 냄새보다 더욱 강렬했다. 저걸 먹는다면 저 힘을 빼앗을 수 있을 거만 같아서 흥분으로 몸이 뒤틀렸다.
한해연의 집을 지키고 있는 것들로도 짐작하긴 했지만, 이건 급이 달랐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욕심이 났다. 먹이도, 힘도, 순혈에 대한 아주 작은 보복도 할 수 있을 다시 오지 않을 기회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렇게 재밌게 가지고 놀던 걸 잡종인 제게 빼앗기면 볼만한 얼굴이 될 것이다.
‘씨발, 저런 걸 왜 밖에 내돌리고 있는 거지?’
자신이었으면 보는 순간 피 한 방울, 뼈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집어삼켰을 것이다. 하긴, 그게 뭐가 중요한가. 그래서 제게도 기회가 온 거지.
귀한 냄새가 나는 여자는 곧 그의 손아귀에 들어올 것처럼 스스로 제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여자의 냄새가 더욱 짙어졌다. 괴물의 눈이 몽롱하게 풀어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괴물은 한해연에게서 나는 냄새에 신경이 모두 쏟아진 탓에 관자놀이 근처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는 걸 몰랐다. 칩이 심어진 곳이 조금씩 부풀고 있음에도 아무런 통증조차 느끼지 못했다. 마치 인지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처럼 입을 벌리고 더러운 침을 뚝뚝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 더 한해연이 가까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인내심도 인지 능력과 함께 사라졌다. 완전히 본체로 변한 괴물은 주저 없이 자신이 서 있던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 * *
멍하니 풀려 있던 해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 허공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피할 새가 없었다.
쾅―!
하지만 그것은 해연의 근처에 도달하기 직전 그녀의 뒤에서 뻗어 나온 힘에 튕겨 굉음과 함께 뒤로 밀쳐졌다. 사람의 형상을 한 것이 형편없이 구겨진 채 바닥과 건물에 튕겨 아주 먼 곳까지 떨어져 나갔다.
빠아아아앙―!
“꺄아아아악!”
“뭐, 뭐야?!”
날카로운 경적과 사람들의 비명이 도로를 가득 울렸다. 급박하게 커브를 튼 차에 치이기 직전 누군가에 의해 뒤로 밀쳐진 해연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녀를 칠 뻔한 운전자는 미안하다는 사과도 없이 혼잡한 차들 사이에 섞여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뭐였지? 해연은 지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도로를 크게 울렸던 경적도 먼 곳에서 울리는 것처럼 둔탁하게 들렸다. 차에 치일 뻔했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위험한 걸 봤다.
광기에 젖은 샛노란 눈동자를 하고 그녀를 향해 주둥이를 크게 벌린 채 쏟아져 내려오던 괴물은 털이 수북한 짐승 같은 얼굴과 달리 인간의 체형을 하고 있었다.
그건 분명히…….
‘그 괴물하고 비슷했어.’
그날. 자신의 인생이 바뀌게 됐던 그 끔찍했던 날에 자신을 납치했던 인간도, 짐승도 아니었던 괴물과.
거의 다 묻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었다. 그 괴물보다 이현이 제게 했던 짓이 너무나도 선명했기 때문에. 하지만 한번 떠오른 기억은 휘몰아치듯 쏟아졌다. 해연의 몸이 공포로 얼어붙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쉬이, 진정해요. 괜찮아, 아무도 당신을 해치지 못해.”
“흐읏……!”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누군가 자신을 안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남자가, 절대로 나타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이현이라는 것도. 그 덕에 정신이 들었다. 해연은 남자를 밀어내지 않은 채 가만히 허공을 바라봤다. 누군지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온몸이 그를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으니까. 남자의 체온도 냄새도 심지어 숨결마저도 너무나 익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