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해연이 나오지 않고 멍하니 서 있자 밖에 나갔던 유영이 집 안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언니 왜 안 나와요? 뭐 놓고 왔어요?”
“어? 아니, 나가……. 가자.”
이미 빌라 주차장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택시 트렁크에 캐리어와 짐을 넣고 두 사람도 뒷좌석에 타자 택시가 출발했다. 해연은 멀어지는 자신의 집을 차창 너머로 하염없이 바라봤다. 저곳에 많은 것을 두고 왔다. 예전에는 그녀에게 많은 의미가 담겼었지만, 지금은 버려야 할 것이 돼 버린 것을.
이게 대체 무슨 기분일까.
꼭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두고 온 듯이 초조해졌다. 해연이 계속 멍한 얼굴을 하고 있자 유영이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괜찮아요, 언니. 괜찮을 거야.”
“……응.”
해연도 그러길 바라며 유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아직도 제 귓가에 달라붙은 누군가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 * *
호텔에서 지낸 지 어느덧 삼 주가 지났다. 그동안 해연은 괜찮아졌다. 아니, 괜찮다고 끊임없이 세뇌했더니 정말 괜찮아진 느낌이었다. 자신도, 타인의 흔적도 없는 단조로운 호텔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더 도움이 됐다.
그런 노력이 통했는지 유영도 점차 해연이 정말 괜찮아지고 있다고 받아들였다. 유영은 괜찮은 집을 싸게 계약해 이사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해연의 집도 나갔다. 내놓기 무섭게 다음 날 팔렸다.
천만 원 정도는 흥정할 생각을 했었는데, 구매자가 흥정은커녕 해연이 꾸민 집이 마음에 든다며 가구와 전자 제품까지 전부 사들여서 안의 가구나 짐을 정리할 청소 비용을 아끼다 못해 돈이 더 들어왔다. 좋아해도 되는 걸까. 아니면, 나쁜 일이 생기기 전의 약간의 행운인 걸까.
계속 생각이 나쁜 쪽으로만 흐르자 해연은 머리를 내저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 없었던 일처럼, 머릿속에서 다 지워 버리고 싶었다. 모두 버리고 왔던 집처럼.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안 그러면 악몽에 몸도 정신도 모두 매몰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괜찮다고,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고 세뇌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괴물이 저를 찾아올 것 같아 매일, 매 순간 두려웠다. 그걸 유영이에게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힘들었다.
마치 수분이 빠져나가 말라가는 나무처럼 해연은 매일매일 조금씩 죽어 가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유영에겐 서울을 잠시 떠나 있을 거라고 말을 해 놨지만, 사실 정확한 계획은 아무것도 없었다. 힘들게 다져 놓은 기반이 완전히 사라지자 막막해졌다.
“언니, 해연 언니.”
“…….”
출근 준비를 하며 말을 걸던 유영은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듣지 못한 것처럼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해연의 몸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언니, 내 말 듣고 있어요?”
“……어? 뭐라고 했어?”
해연이 번뜩 정신을 차리고 머쓱하게 대답하자 유영이 혀를 내찼다.
“무슨 생각을 열심히 했길래 이제야 대답한담?”
“그냥. 그런데 무슨 말을 했었어?”
“이진아 피디님이 언니 내려가기 전에 괜찮으면 얼굴 볼 수 있냐고 하셔서요. 이번이 아니면 영영 못 볼 것 같다고요. 근데 아마 얼굴도 얼굴인데, 프리로 일 좀 해 줄 수 있냐고 물으려고 하는 걸걸요?”
“아…….”
“프리랜서로 일하면 지방으로 내려가도 일할 수 있으니까요. 언니도 괜찮지 않아요?”
“나야 그러면 좋긴 한데, 내가 너무 폐만 끼쳐서…….”
“언니가 일 잘해 주면 우리 회사에 좋은 일인데 무슨 폐를 끼치는 걸 생각해요. 그럼 오늘 저녁 콜?”
유영이 해연의 걱정을 단칼에 쳐내며 코트를 걸쳤다. 그리고 가방을 들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해연도 유영의 뒤를 따라가며 황급히 물었다.
“유영이 너도 같이 보는 거지?”
“아무래도 그게 언니한테도 편하겠죠?”
“응. 부탁해…….”
해연이 그렇지 않으면 못 만날 것 같다고 주저하며 말하자 유영은 내심 한숨을 삼켰다.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저것도 많이 나아진 거였다. 최소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어졌으니까.
이번에 외부 인력을 구해야 한다는 이진아 피디의 말에 해연을 추천한 건 유영이었다.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일상의 일로 바빠지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 일로 연결되어 있으면 살고 있는 곳이 멀어져도 조금 더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어후. 그 개새끼 한 번만 마주쳐라, 진짜. 아주 배때기를 쑤셔 버릴 테니까. 아니, 그 뺀질한 얼굴을 그어야지.’
유영은 활활 타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야 비싼 저녁 얻어먹는 거니까 완전 좋아요. 히히. 그럼 이따 전화할게요!”
“그래, 이따 봐. 일 잘하고.”
“네에!”
유영이 문을 열고 손을 크게 흔들었다. 해연도 웃으며 유영이를 따라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문이 닫히고 혼자 남게 되자 웃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진아 피디…….”
유영이 신경 써 준 것 같아 그러겠다고 했지만, 사실 그리 만나고 싶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잠적한 자신을 걱정해 주고, 또 일도 주겠다고 할 정도로. 그런데 왜 이렇게 그 사람을 만나는 게 내키지 않을까.
해연은 이게 모두 그 남자와 있었던 일로 생긴 후유증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 꺼림칙한 감정이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진아 피디가 아니어도, 다른 누구였더라도 이런 기분을 느꼈으리라.
‘그래, 분명히 그럴 거야…….’
그러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해연은 여전히 불안하게 술렁이는 가슴 위로 손을 꾹 눌렀다.
* * *
저녁 일곱 시. 해연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약속 장소는 그녀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걸어서 십 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있는 식당으로 정해졌다. 화장도, 옷도 모두 갖춰 입고서도 해연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남자로 추측되는 사람이 그녀 옆에 서서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
“아,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해연이 과도하게 놀라 몸을 떨자 남자는 그녀를 의아하게 보다가 사과했다. 해연은 남자의 목소리가 낯설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안도했다.
“아니요, 저야말로…….”
해연은 남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시선을 내리깐 채 살짝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이 대신 버튼을 눌러 버린 탓에 엘리베이터가 그녀가 있는 층으로 빠른 속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해연은 긴장으로 차갑게 식은 손가락을 다른 손으로 주물렀다.
그때 정면을 보고 있던 남자가 해연에게 불쑥 말을 걸었다.
“혹시 무슨 향수를 쓰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네?”
“냄새가 굉장히 좋아서요.”
냄새? 무슨 냄새? 해연은 불쑥 튀어 오른 경계심에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향수를 쓰지 않아서…….”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다행히 바로 엘리베이터가 섰다. 남자가 먼저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해연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엘리베이터 안을 바라봤다. 지금 들어간 사람과 먼저 타고 있던 남자 한 명, 총 두 명이 아직 앞에 서 있는 그녀를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해연은 뭔가 자신만 이상한 세상에 떨어진 기묘하고 불안정한 기분을 느꼈다. 살갗이 곤두선 기분에 해연은 공연히 손으로 목을 쓸었다.
“안 타세요?”
해연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던 남자가 물었다.
“……아뇨, 먼저 가세요. 죄송합니다.”
해연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도저히 탈 수가 없었다. 그러자 곧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사람의 기척이 모두 사라졌다. 해연은 계속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서 있었다.
왜 이렇게 혼자 불안해하는 걸까.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호텔에서 지내는 내내 계속 객실 안에서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핸드폰도 새로 개통했고, 옷이나 기본적인 생필품을 쇼핑하기도 했다. 그땐 이 정도가 아니었다.
‘아, 그렇구나.’
그동안은 매번 유영이 그녀와 함께 있었다. 그래서였나보다. 아주 조금은,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던 건 모두 유영이 덕분이지, 그녀 혼자 극복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곧 유영이와 떨어져야 할 텐데, 정말 나는 괜찮을까.
‘괜찮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어.’
지금까지 붙잡고 있는 것도 염치없는 짓이었으니까. 해연은 조금이라도 빨리 유영에게서 멀어져야 한다고 새삼 깨달았다. 유영의 곁이 편해서, 너무 넋을 놓고 있었다.
그래. 혼자 밖에 나가는 걸, 사람을 만나는 걸 언제까지 두려워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 지금이 오히려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유영이가 아직 있을 때, 홀로 서는 연습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
하지만 해연의 각오와는 다르게 그녀의 몸은 아직 홀로서기를 감당하지 못했다. 하필 퇴근 시간대여서 거리는 온통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호텔 밖으로 나온 해연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갇혔다.
해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제 몸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마치 어느 순간 자신을 공격할 것 같았다. 샤워한 지 얼마 안 돼 건조했던 피부가 순식간에 흘러내린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코트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에서 벨이 울리며 진동했지만, 해연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럴 정신이 없었다.
혼잡한 길거리에서 넋이 나간 채 길을 막고 서 있는 해연은 사람들의 짜증을 유발했다.
“잠시만요, 지나갈게요.”
“아……!”
“아, 안 그래도 복잡해 죽겠는데 길 한복판에 서서 뭐 하는 거야. 짜증 나게.”
“읏!”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그녀의 어깨를 밀치고 지나갔다. 해연은 한 손으로 부딪힌 어깨를 감싸고 혼란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눈이 너무 어지러웠다. 사람들도, 건물들도, 도로도, 신호들도 모두 한데 뭉쳐서 어그러져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분별이 되지 않았다.
해연의 동공이 흐릿하게 풀어졌고, 옅게 화장했던 피부가 땀으로 젖어 머리카락이 달라붙었다. 정신이 완전히 나가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라 어디론가 떠밀리듯 움직였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