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새벽에 냄비 한가득했던 죽을 다시 데우며 유영이 해연에게 물었다.
“속은 어때요? 밥 먹을 수 있겠어요?”
“응.”
“……이번에는 진짜 무리하지 말아요. 또 토하면 언니 진짜 큰일 날 거 같으니까.”
“그럴게.”
해연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유영이 살짝 눈을 흘겼다. 그러고는 오는 길에 마트에서 사 온 동치미와 장조림을 종이 가방에서 꺼내 접시에 담으며 흘리듯 말했다.
“아, 저 오늘 집 나갔다고 전화 왔어요.”
“정말?”
“참 시기적절하게도요.”
“…….”
“어휴, 언니가 왜 눈치 봐요. 그리고 그렇게 티를 내니까 듣지 않아도 누가 원인인지 알겠잖아요.”
“미안해.”
해연이 고개를 푹 숙였다. 유영이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언니 이렇게 만든 거, 그 강이현이라는 놈 맞죠?”
“…….”
“뭐 그 새끼 아니면 누구겠어요. 근데 주소 알죠?”
유영이 동치미의 무를 작게 썰기 위해 꺼낸 식칼을 들고 눈을 새파랗게 빛내며 물었다. 단발에다 볼이 통통한 유영이 식칼을 들고 눈을 희번뜩 빛내니 꼭 사탄의 인형에 나오는 처키 같았다. 해연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몰라.”
“모르긴 뭘 몰라요. 알잖아요. 말해 봐요. 진짜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그런 말을 할 거면 칼이라도 내려놓고 말해야지. 해연은 유영의 손에 들린 식칼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모른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말 몰랐다. 항상 차를 타고 가긴 했지만, 그 길이 안개 낀 것처럼 뭉개져서 기억나지 않았다. 이것도 괴물이 한 짓이리라. 해연은 새삼 깨달은 사실에 속이 긁히는 걸 느꼈다. 설사 안다 해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 모르는 게 오히려 더 좋은 걸 수도 있었다.
해연은 죽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는 걸 보고 얼른 가스 불을 껐다. 국자로 그릇에 죽을 적당히 담고 식탁으로 옮겼다. 유영은 그런 해연을 가만히 주시했다. 해연은 뒤통수로 느껴지는 따끔한 시선에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정말 몰라. 알아도 몰라. 그러니까, 너도 그냥 넘겨 주면 안 될까?”
“그게 언니한테 더 나아요?”
“……응.”
“그래요, 그럼 일단 그렇게 해요.”
유영은 어떻게든 멀쩡하게 보이도록 애쓰고 있는 해연을 굳이 흔들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고 나의 원한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 새끼가 해연 언니를 쉽게 놓아줬다는 게 사실 믿기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얼굴만 빤지르르한 놈은 해연 언니에게 굉장히 집착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물론 단 한 번 본 것만으로 확신하긴 어려웠지만.
유영은 자신이 꽤나 눈치가 빠르고 감이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게 자신의 무기라는 것도. 간혹 너무 약삭빠르게 굴어서 타인의 아니꼬운 시선을 받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살아왔는데 뭐 어쩌라고. 지들도 부모도 없이 혼자 살아 보라지.
아무튼 그렇게 쌓아 온 촉이 말하길, 그 새끼는 분명 해연 언니를 좋아했다. 엄청, 아주 많이. 물론 그게 해연 언니를 이렇게 만든 걸 용서해 줄 면죄부는 아니었다. 다만, 그 과도한 집착이 이런 결과를 낳은 게 아닐까 싶은 거였다.
‘아니지.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유영은 반찬을 담은 그릇을 식탁으로 옮겨 해연의 앞에 앉았다.
“언니, 테이림 이진아 피디님 기억하죠?”
“어? ……그럼, 기억하지.”
해연은 자신이 민폐를 끼친 사람이 유영이 하나만이 아니란 걸 새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테이림과 면접을 진행했었지. 유영이가 말을 꺼내고 나서야 기억이 났다. 회사 면접 하나 보지 않았다고 크게 치명적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업계에 안 좋게 소문이 나면 조금 타격이 가긴 할 거다.
‘일을 더 할 수 있긴 할까.’
하긴 해야겠지. 평생 일 안 하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많은 건 아니니까. 해연은 언제 죽을 생각을 했냐는 듯이 결국 먹고 살 궁리를 하게 되는 게 우스웠다.
“언니랑 연락 안 될 동안 제가 피디님하고 상담을 많이 했었거든요. 피디님도 걱정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언니 만났다니까 괜찮냐고, 얼굴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지금은 조금…….”
“당연하죠. 지금 언니가 누굴 만나요. 자기 몸 추스르는 것만으로도 힘든 사람이. 나중에요, 나중에.”
유영이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해연은 그런 유영을 가만히 바라보다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유영아, 나 괜찮으니까 너는 빨리 집 구해서 나가.”
해연의 담담한 말에 죽을 떠먹던 유영의 손이 뚝 멎었다.
“나도 집 내놓을 거야. 사실 아까 부동산에 전화해 놨어.”
“……그래요, 그럼 우리 집 같이 구해요. 아니면 당분간 집 합칠까요?”
“아니, 나 당분간 서울이 아니라 지방으로 내려가 있으려고. ……그래, 제주도도 괜찮겠다.”
“말이 되는 소릴 해요. 언니 혼자 어떻게 있으려고요?”
“어차피 너 회사에 가 있을 땐 혼자인걸. 그리고 서울에 있기 싫어. 조용한 곳에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고 싶어.”
넌 나랑 붙어 있으면 안 돼. 해연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만약, 만에 하나 정말 그 괴물의 새끼를 뱄다면……. 그래, 그 끔찍한 상황을 대비해서라도 혼자 있어야 했다.
“나랑, 있는 것도 힘들 정도예요?”
“응, 미안해, 유영아. 부탁이니까, 나 혼자 있게 해 줘…….”
“혼자 두면 언니가 자……아, 아니, 나쁜 생각할 것 같단 말이에요.”
어휴, 내 주둥이. 유영이가 황급히 말을 바꾸자 해연이 옅게 웃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긴 숨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보고 유영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언니 진짜 많이 아프구나. 아주 많이…….’
혼자 두기 불안한데, 또 계속 붙어 있자니 자신 때문에 마음껏 아파하지도 못하고 이렇게 안으로만 삭혀 속이 병들 것 같았다. 고작 하루 만에 저한테 멀쩡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랑 계속 연락할 거죠?”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하루에 한 번 영상 통화할 거고, 메시지는 수시로 보낼 거예요. 전화 하루라도 안 받으면 그날로 내가 내려갈 거니까 명심해요.”
“응응.”
“집 구하기 전까지는 언니 옆에 있을 거예요. 나 당장 내쫓을 생각하지 말아요.”
“그건 당연한데, 나 여기 집 나갈 때까지 호텔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죽 빨리 먹고 우리 짐 싸자.”
“네?”
웬 호텔? 유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해연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여긴, 그 사람도 왔었거든.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생각이 나서 그냥 여길 버리려고.”
“아…….”
“그러니까 너도 나랑 잠깐 호텔에서 생활하자.”
유영이의 집을 구할 때까지만. 해연은 아주 작은 유예를 두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정도는 제게도 필요했다. 자신의 인생에서 유의미한 사람은 유영이뿐이어서. 소중한 사람과 헤어지기 전에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요, 그럼. 언니가 편한 대로 해요. 근데 차라리 단기 오피스텔을 구하는 게 낫지 않아요?”
호텔은 비싸잖아요. 유영이 금전적인 부담을 느꼈는지 소심하게 의견을 피력했다. 해연이 피식 웃었다.
“너 집 언제 나갈 줄 알고. 그리고 비용은 내가 낼 거니까 괜히 지갑 열 생각하지 마. 이 기회에 우리 호캉스 한번 해 보자.”
“이 언니 좀 봐? 호텔 비용이 얼만데 그걸 혼자 내요?!”
“괜찮아, 언니 그 정도 돈 있어. 넌 돈 아껴. 이사 갈 집은 역세권에 보안 괜찮은 곳으로 구해야 하니까.”
“그렇지만…….”
수중에 있는 돈이 넉넉하지 못한 건 사실이라 현실을 생각하면 섣불리 돈을 쓸 수도 없었다. 이 와중에도 돈에 연연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 싫어 유영이 입술을 삐죽였다. 해연이 그런 유영의 손을 꽉 잡았다. 따뜻한 체온. 고집스러우면서도 다정한 아이.
‘내게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런데 나는 너한테 계속 폐만 끼치게 돼.’
해연은 눈에 다시 물기가 돌자 억지로 눈에 힘을 줬다. 여기서 울면 안 된다.
“정말 괜찮아. 지방은 서울보다 집값도 싸고. 그리고 나 때문에 가는 건데 왜 네가 부담할 생각을 해. 난 그냥 네가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걸.”
“……알았어요. 그런데 호텔은 어디로 갈 거예요?”
“테이림 근처에 괜찮은 호텔 있더라고. 사실 이미 예약했지!”
“와, 언니 그럼 나한테 후 통보한 거였어요?”
“응, 빨리 여기서 나갈 생각만 했는걸. 너 회사 가고 혼자 있으니까 안 되겠더라.”
해연이 가벼운 어조로 말했지만, 유영은 그 속에 담긴 뜻을 생각하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해연 언니 혼자 호텔 비용을 내는 건, 빚지기 싫어하는 제 성격으론 조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병원 가기도 무섭다고 떨던 사람이 여기서 도망치고 싶을 정도라면 고집을 부릴 일이 아니었다. 유영도 어깨를 살짝 들었다 내리며 숨을 크게 내쉬고 아직 남은 찜찜한 마음을 털어 냈다.
“좋아요, 그럼 밥부터 먹고 짐 챙겨요. 빨리 먹어요, 다 식었다.”
“응응.”
해연은 입고 있는 옷과 신발, 신용 카드와 신분증만 챙기고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다. 짐을 싸는 건 모두 유영의 옷가지뿐이었다. 유영은 큰 캐리어 두 개에 자신의 짐을 대충 챙긴 뒤 해연을 향해 물었다.
“정말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을 거예요?”
“응, 다 버리고 새로 살 거야.”
여기 있는 모든 것에 그 괴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새 옷을 사면 바로 버릴 것이다. 그때 콜택시가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해연은 곧 내려간다고 말한 뒤 유영을 돌아봤다.
“아직 멀었어?”
“다 됐어요. 이제 가요!”
유영이가 캐리어를 딱 닫고 벌떡 일어섰다. 해연이 하나, 유영이 하나 그리고 잔짐을 다른 손에 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유영이 먼저 나가자 해연은 마치 누군가가 저를 잡아당기는 것 같은 기분에 뒤돌아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지 말라고 제 발을 잡고 울며 매달리는 듯한…….
심장 어딘가가 아프게 조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