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원하는 대로, 할 테니까, 그러니까, 이제 내 눈앞에서 사라져……. 다신, 나타나지 마…….”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이런 비참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데, 제어가 되지 않았다. 해연은 손으로 눈을 가렸다.
“가, 제발…….”
눈을 감았다 뜨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한참 뒤에 해연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가 바라던 대로 남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 * *
“네? 집 나갔어요?”
유영은 공인 중개사에서 온 전화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 징그럽게 나가지 않더니 드디어 집이 나갔다고 한다. 해연 언니가 돌아온 다음 날에.
‘타이밍 한번 끝내주네.’
다행이긴 한데 뭘까, 이 찝찝한 기분은. 유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 중개료는 나가시는 분이 내는 거 알죠? 계약 기간보다 일찍 빼는 거니까.
“알고 있거든요!”
집에 도둑이 들었다고 해도 그게 왜 자기 책임이냐며 발을 빼던 집주인은 유영이 집을 내놓는다니까 중개료까지 떠넘겼다. 그때는 제 사정이 급해 일단 알겠다고, 빨리 집이나 내놔 달라고 했는데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유영의 목소리에 짜증이 비치자 중개업자는 멋쩍게 헛기침하더니,
-나가는 날짜는 어떻게 할지 들어올 세입자하고 상의하세요. 연락처는 문자로 드릴게요.
라는 말을 끝으로 빠르게 전화를 끊었다. 유영은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기가 막힌 얼굴로 바라봤다. 그러다 집에 있을 해연 언니에게 생각이 닿았다.
‘집이 나간 건 좋은데 해연 언니는 어떻게 하지?’
그 상태로 혼자 두기는 좀 걱정됐다. 병원 가는 것조차 무섭다고 떠는 사람인데…….
‘아니, 집은 구해 놓고 당분간 언니 집에서 살면 되지.’
상태가 조금이라도 좋아질 때까지만이라도. 해연 언니는 자칫 잘못하면 안 좋은 행동을 할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설마…….
유영은 황급히 핸드폰에서 해연의 번호를 눌렀지만, 전원이 꺼졌다는 음성만 들렸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렇게 생각해도 계속 안 좋은 상상만 이어졌다.
도저히 회사에 있을 수가 없어 바로 가방을 정리했다. 그대로 사무실을 뛰쳐나가려다 휴가 결재를 받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후, 내 정신 좀 봐.”
유영은 다시 자리에 앉아 PC를 켰다. 그 부산스러운 행동에 때마침 그 옆을 지나고 있던 이진아가 유영에게 말을 걸었다.
“유영 님, 무슨 일 있어요?”
“아, 피디님! 저 오늘 반차 써도 될까요?”
“반차요? 정말 무슨 일 있어요?”
“……그, 어제 해연 언니가 왔는데 좀 걱정돼서요.”
유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솔직히 사정을 말했다. 해연과 연락이 되지 않는 동안, 이진아와 그 문제로 여러 번 상담한 적이 있었다. 같은 여자기도 했고, 해연의 안부를 여러 번 묻기도 해서 조심스럽게 꺼내니 함께 걱정해 주었다. 그런 만큼 사정을 이해해 주리라 생각했다.
“해연 씨요? 정말요?”
“네, 그래서 저 지금 조퇴하려고 하는데, 결재 바로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당연히 해 줘야죠. 그런데 어디서 보기로 했어요? 근처면 저도 잠깐 봐도 될까요?”
“그건 조금……. 지금은 좀 다른 사람과 만나기 힘든 상태거든요. 죄송해요.”
“괜찮아요. 그럼 나중에 함께 보자고 해 주세요. 그동안 저도 많이 걱정했었거든요.”
“당연하죠! 꼭 전할게요. 어, 그런데 피디님 아직도 감기 안 나으셨어요? 마스크 엄청 오래 쓰고 계신 것 같아요.”
“……나아가고 있어서 더 조심스러워서요. 제가 사무실에 감기 퍼트리면 안 되잖아요.”
이진아가 볼을 꿈틀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 순간 볼을 완전히 가리고 있던 하얀 마스크가 살짝 아래로 내려왔다. 유영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피디님, 볼에 멍이…….”
“아!”
유영의 지적에 이진아가 황급히 손으로 볼을 가렸다.
당황해 얼굴을 가리는 모습이 뭔가 이상했다. 그동안 감기라고 마스크를 쓰고 다녀서 몰랐는데, 옅은 보라색의 흔적은 멍이 분명했다. 꽤 면적이 크고, 흐릿해서 확신은 못하겠지만, 왠지 손자국 같기도 했다. 설마……. 유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피디님, 혹시 무슨 일 있으셨어요?”
“사실 밤에 불 안 켜고 화장실 가다가 책장에 부딪혀서……. 다들 유영 씨처럼 오해할까 봐 그냥 감기라고 했던 거였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설명하기도 번거롭고요. 그러니까 못 본 척해 주세요.”
멋쩍게 웃는 모습이 정말 별거 아닌 거 같았다. 해연 언니가 연락되지 않는 동안 진심으로 걱정해 주며 상담도 해 줬던 터라 두 사람은 많이 가까워진 상태였다. 해연 언니만큼은 아니지만, 앞으로도 오래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이라 누군가에게 맞은 게 아니라는 말에 유영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그래도 조심하세요. 밤엔 미등이라도 꼭 켜시고요. 위험해요.”
“네에, 저도 반성 많이 했어요. 그런데 바로 나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 맞다! 피디님 저 먼저 가겠습니다! 반차 결재 꼭 부탁드려요!”
“그래요…….”
이진아는 부산스럽게 사무실을 뛰어나가는 이유영의 뒷모습을 끝까지 주시했다. 투명한 자동문 너머로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이진아는 며칠 전 머리끝까지 화가 난 채 나타난 괴물에게 맞았던 흔적을 손으로 더듬었다. 괴물은 정신을 차리기 전까지 순혈이라는 알 수 없는 말과 한해연을 악에 받친 듯 외쳐 댔다. 한해연이 사라진 후 괴물은 간혹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에게 화풀이를 하긴 했지만,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죽는 줄 알았는데…….’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죽을 위기를 넘겼던 것처럼, 이번에도 결국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어딘가에 숨어 있던 한해연도 다시 나타났다.
드디어.
이진아는 아주 오랜만에 억지로 만들어 내지 않은, 오로지 진심만이 가득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 * *
해연은 유영이 퇴근하기 전에 샤워하고 제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화장도 할까 하다가 그건 오히려 더 인위적으로 보일 것 같아 말았다. 대신 입술만 살짝 밝은색으로 칠했다. 그러니까 조금은 사람 몰골로 보였다.
해연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유영에게 조금이라도 멀쩡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유영이를 떼어 놓는 게 수월해질 것 같아서.
‘나하고 더 엮여서 좋을 게 없으니까.’
유영이 제집에 오게 된 원인도 그 남자가 만든 것이 아닐까 의심이 갔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해연은 지친 얼굴로 눈을 감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 숨조차도 힘겹게 흘러나왔다. 숨을 쉬는 게 힘들 정도로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아파서.
이미 자신으로 인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었다. 유영이만이라도 안전하게 둬야 했다.
해연은 남자가 했던 협박을 가슴에 깊이 새겼다. 또 자해하면 유영이의 손가락을 하나씩 자른다고 했다. 그 남자는 충분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았다. 제게도 했었으니까.
해연은 자신의 집을 천천히 둘러봤다.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할 때가 왔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눈에 담아 둘 생각이었다.
다 놓고 나가야지. 가구나 그런 건 다 새로 사면 된다. 서울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가도 좋을 것 같았다. 여기서 먼 곳이라면 어디든.
그 남자에게서 멀어지겠다는 꿈을 꾸는 건 아니었다. 제집에 갑자기 나타났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것처럼 그 남자에겐 장소의 여부는 상관없었으니까. 게다가 원한다면 자신이 어디로 가든 찾아낼 테니 무의미한 도피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멀리 가야 유영이 자신을 떼어 놓는 걸 납득할 것 같아서였다. 무조건 혼자여야 했다. 괜히 자신하고 같이 있다가 나쁜 일에 유영이까지 얽히게 하면 안 된다. 절대로.
해연은 떨리는 손을 맞잡아 힘을 꾹 줬다. 유영이 바로 믿진 않겠지만, 이 모습을 며칠 보이면 덜 걱정하겠지.
두 시.
생각보다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 새벽부터 심력을 쏟는 일들이 많아서인지 깜깜한 밤이라도 된 것 같았는데…….
유영이는 최소 다섯 시간은 더 지나야 퇴근할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어떻게 견디지, 걱정하던 때였다. 현관문 번호 키가 빠르게 눌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활짝 열렸다. 해연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설마…….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아직 회사에 있어야 할 유영이였다.
“해연 언니, 나 왔어요!”
“왜 벌써 왔어? 회사는?”
“반차 썼어요. 걱정돼서 일이 손에 안 잡혀서 그냥 튀었…….”
후다닥 신발을 벗고 상체를 세운 유영이 해연을 보고 말을 멈췄다. 유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해연은 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얼굴이 뭐가 이상해 보이는 걸까. 조금 전에 거울을 봤을 땐 분명 괜찮았던 거 같은데…….
“무리하지 말라니까. 나 걱정할까 봐 일부러 꾸몄죠?”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무슨. 집에 있는데 입술은 왜 칠해요?”
차라리 귀신을 속이라며 유영이 혀를 내찼다. 해연은 머쓱하게 손을 꼼지락거렸다.
“정말 그런 거 아니야. 언제까지 정신을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 정신 똑바로 차려야 살지.”
“……정말요?”
“정말이야.”
해연은 계속 연습했던 대로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그러자 유영이 “뭐, 노력이 가상하니 일단 믿어는 드릴게요.” 하며 짐짓 관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연은 픽, 바람 빠진 소리로 작게 웃었다. 어차피 바로 믿을 거란 생각은 안 했다.
어릴 때 부모님을 잃은 고아들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눈치를 살피는 기술을 가장 먼저 터득하게 된다. 하지만 유영은 그중에서도 유별나게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유영은 어깨에 걸치고 있던 숄더백을 내려놓고 코트를 벗었다. 그리고 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해연은 그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