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하…….”
누구 때문인데? 해연은 괴물의 말이 기가 막혀 짧게 웃었다.
“내 몸이야,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네가 무슨 상관…….”
“그럼 이렇게 하죠. 당신이 자해할 때마다 이유영의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는 걸로.”
“……!”
끔찍한 협박에 해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그녀가 눈을 홉뜨고 괴물을 멍하니 바라보자 괴물이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재차 경고했다.
“그러니까, 이유영이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당신 몸을 아껴요.”
“이 개새끼…….”
“개새끼라니요. 난 ‘괴물’이잖아요.”
잊었어요? 괴물이 스스로를 괴물이라 칭하며 손을 뻗어 해연의 볼을 쓰다듬었다. 이번엔 해연의 몸이 떨려도, 괴물의 손은 그녀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선뜩한 체온이, 살갗이 아주 천천히 그녀의 볼을 따라 움직였다. 해연은 얼어붙은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것만 지켜 주면 당신 앞에서 꺼져 줄 테니까. 당신에게 나쁜 조건은 아니죠.”
“……왜, 왜 나한테 이래. 내가 뭘 잘못했다고…….”
왜냐고? 괴물은 한숨처럼 웃었다.
“그러게요. 왜 당신이었을까. 가능하다면, 나도 당신과 상관없어지고 싶은데.”
그런데 그게 안 돼요. 괴물이 설핏 웃으며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제겐 끔찍한 이 상황이 괴물에겐 웃을 수 있는 일인 것 같았다. 꼭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사과하는 것도 가증스러웠다. 해연이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물었다.
“날 가지고 놀아서……. 재밌, 었어?”
“…….”
그린 듯이 웃고 있던 괴물의 입술이, 눈이 딱딱하게 굳었다. 해연은 미묘한 쾌감을 느꼈다. 자신이 아픈 만큼 괴물을 상처 입혔다는 사실에.
‘상처, 라고? 내 말 어디에 괴물이 상처 입을 구석이 있지?’
그러니, 지금 괴물의 아픈 얼굴은 제가 만들어 낸 착시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전처럼 제 머리를 마음대로 휘저어서 그렇게 보이도록 괴물이 손을 썼거나.
그녀의 생각을 입증하듯, 괴물이 다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었어요, 무척. 가능하다면, 평생 그렇게 살고 싶었을 정도로.”
“이―!”
짝.
해연이 있는 힘껏 손을 휘둘렀다. 괴물의 얼굴이 왼쪽으로 돌아갔다.
“아…….”
돌아간 채로 멈춰 있던 괴물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해연은 주춤 뒷걸음질 쳤다. 괴물이 웃고 있었다. 마치 기쁘다는 듯이. 그게 기괴하게 느껴졌다.
“왜, 왜 웃…….”
“당신이 내게 손을 대서요. 다신 날 만지지 않을 줄 알았거든요.”
“……당신 미쳤어?”
괴물은 부정은커녕 더 짙게 웃었다. 해연은 지금 괴물이 웃는 것을 보고 아까 그토록 신경을 거슬리게 했던 미소가 부자연스러웠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괴물이 제게만은 항상 웃었다는 게 기억났다. 다른 사람을 볼 땐 무표정했던 괴물의 얼굴이 저를 볼 때만은 꽃이 피듯 흐드러지게 웃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해연은 그때처럼 웃고 있는 괴물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 시간이 길어지자 괴물의 웃음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괴물은, 그는, ……이현은 곤란한 얼굴로 애원하듯 말했다.
“나를 그렇게 보면 안 돼요.”
“……왜?”
“입 맞추고 싶어지니까요.”
그럼 당신이 날 더 싫어할 게 분명한데, 그래도 된다고 착각하게 된다고 그가 낮게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방금 전까지 유영이를 걸고 협박하더니 이젠 키스를 하고 싶다고? 자신이 들은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해연이 하얗게 질려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이현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순식간에 입술이 맞붙었다.
“으읍! 읍! 으으으으읍!”
강제로 밀고 들어온 혀가 해연의 입안을 무자비하게 헤집었다. 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안고 있어서 해연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니, 해연이 몸부림칠수록 시간이 갈수록 힘이 빠지는 해연과 달리 남자는 더욱 강하게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해연의 몸에 힘이 완전히 빠지자 거칠게 움직이던 남자의 혀가 점차 부드러워졌다. 해연은 남자의 혀가 제멋대로 제 혀를 감싸고 쓸고 탐하는 걸 그대로 방치하며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길 바랐다.
“…….”
“…….”
그녀가 반응하지 않는 걸 깨달은 남자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해연은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저를 또다시 농락하며 즐거워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살짝 시선을 내린 남자의 얼굴은 마치 패잔병 같았다.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처럼.
해연이 쳐다보는 걸 알았는지 남자는 일그러졌던 입술을 꿈틀거리더니 입꼬리를 위로 들어 올렸다. 하지만 전혀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남자도 알았는지 당혹스럽다는 듯 시선을 피하고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왜……. 당신이 그런 얼굴을 해?’
차마 입 밖으로 꺼내 물을 수가 없었다. 그럼 가당치도 않게 남자가 울 것 같아서. 그럼, 그럼 꼭 내가 잘못한 것 같아질까 봐.
남자는 한참 뒤에서 손을 내렸다. 아까처럼 비루한 표정이 아닌,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은 채. 다행이었다. 해연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저런 얼굴이 차라리 나았다. 계속 그 표정이었다면, 분명 마음껏 미워하지도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정신 차려. 정신 똑바로 차려, 한해연.‘
저 남자는 사람을 홀리는 괴물이었다. 그렇게 당해 놓고도 왜 또 흔들리는데? 바보야?
해연이 정신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단속하고 있을 때, 남자는 또다시 그녀를 뒤흔드는 말을 꺼냈다.
“임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은 임신하지 않았으니까.”
“거짓말.”
“나도 거짓말이었으면 싶지만……. 정 의심스러우면 조금만 기다려요. 당신 몸이 임신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증명할 테니까.”
스스로 증명할 거라고? 잠시 혼란스러워하던 해연은 곧 남자의 말이 생리를 말하는 거라는 걸 깨달았다. 일부러 안심시키려고 하는 거짓말이 아닐까? 해연이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자 남자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해연도 알겠지만, 당신이 내 아이를 낳게 하는 방법은 나한테 아주 쉬워요. 당신을 이대로 두는 게 아니라 강제로 내 굴에 가두고 아이를 낳을 때까지 묶어 두고 숨만 붙여 놓는다면 되죠. ……아니요, 정말 하겠다는 건 아니니까 제발 그렇게 떨지 말아요.”
남자는 하얗게 질린 해연을 끌어안을 것처럼 양팔을 내밀었다가 갑작스레 정신이 들었는지 몸을 흠칫 굳히며 팔을 내렸다. 그리고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래 봤자 좁은 욕실에 함께 있었기에 두 사람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다. 하지만 해연에겐 그 정도만으로도 숨통이 트였다.
끔찍한 예시였지만, 그래서 더 설득력이 있었다. 해연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우습게도 이 남자에게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을 때보다 지금이 더 편했다. 이제 끝난 건지, 아닌지 모른 채 막연히 두려워하는 것보다 체념이 더 편하기 때문이었다.
해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하,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지금이 더 편하다니.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어이없고 기가 막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나약하고 약해빠진 자신이 경멸스럽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해연은 완전히 지쳐 버린 채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해연이 침묵을 지키는 내내 남자도 석상처럼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뭐람. 해연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내가 살아서 당신에게 좋은 게 뭐야?”
“…….”
“그게 당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나는…….”
어려운 질문을 들었다는 듯이 남자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떨렸다. 그는 무언가를 바라는 얼굴로 그녀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빛도 스며들지 않을 것 같은 깊고 어두운 검은 눈동자에 반질한 갈망이 맺혔다. 해연은 가슴이 덜컥 내려가는 느낌에 황급히 남자의 입을 막았다.
“아니, 말하지 마! 말하지 마! 듣고 싶지, 않으니까…….”
만에 하나라도 좋아한다는 말이 저 입에서 나오기라도 하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건 너무 끔찍했다. 그러니 그건 절대로 아니어야 했다. 거짓이라도 그런 말은 나오지 말아야 했다.
해연이 발작하듯 진저리를 치자 남자는 살짝 벌렸던 입술을 다시 닫았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침묵이 다시 찾아왔다.
“……유영이는 건들지 마. 그럼 정말 죽을, 테니까.”
해연은 자신의 말이 스스로도 어이없었다. 제 목숨을 두고 괴물과 협상이라니. 그것도 괴물은 저를 살리려고 하고, 자신은 죽겠다고 협박하고 있었다. 반대여야 하는데, 그래야 맞는 건데, 저 괴물은 또 그걸 안도한 얼굴로 알겠다고 한다.
이 모순적인 상황이 말하는 게 단 하나뿐이어서, 해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속지 마, 한해연. 분명 다른 목적이 있을 거야. 해연은 저 남자가 제게 했던 짓들을 다시 되새겼다.
제 몸을 씹어 삼키고 제 이지를 흩트려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다. 그 모든 행위에 자신의 의지는 전혀 없었다. 섹스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해연의 기준으로 강간이었다. 그러니 그건 사랑, 이라는 역겨운 감정 따위가 아니다. 그런 감정으로 포장하는 게 더 혐오스러웠다.
해연을 더 끔찍하게 만드는 건, 제가 먼저 저 남자를 향해 섹스를 조르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억지로 당하기만 했다면 그건 남자를 향한 혐오감만 가지면 된다. 하지만, 아무리 제 의지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자신이 먼저 섹스를 졸랐던 기억은 혐오의 화살을 안으로 향하게 했다.
‘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힘겹게 살아왔어도 잘 살았다고 자부했었다. 고아라는 사실 때문에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스스로를 더욱 단속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엇나가면 이런 애한테 자신의 세금이 나가는 걸 짜증 내는 사람들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으니까. 혼자 힘으로 이 집을 샀을 때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정부 보조금을 받던 불쌍한 아이가 아니라, 이젠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것도 뿌듯했다.
‘그런데 이젠 내가 부끄러워.’
그 모든 기억을 지우고 싶었다. 저 남자를 제 머리에서 도려내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떻게든 저를 향해 웃어 보이려는 저 남자가, 저 끔찍한 괴물이……. 불쌍하게 느껴지는 이 미친 것 같은 감정에서도. 해연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