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배가 너무 아팠다. 아래가 뻐근하고 온몸의 뼈가 뒤틀린 것처럼 아팠다. 해연은 가냘픈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그 순간 제 위에 있는 남자 뒤로 검은 짐승이 보였다. 아주 선명하게.
검은 짐승은 새까만 안광을 빛내며 그녀를 내려 보고 있었다. 산채만 한 크기도, 당장이라도 그녀를 씹어 삼킬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운 이빨도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해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 아아…….”
저게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비가 오던 밤, 저를 먹은 짐승. 괴물이었다. 얼어붙은 시선이 차츰 무너져 아래로 내려왔다. 기괴할 정도로 부푼 자신의 배와 벌어진 다리 사이로 딱 붙은 남자의 하체. 아니 제게 붙은 것은 남자의 형태가 아니라 검은 짐승의 다리였다. 그녀는 지금 짐승에게 범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사람이 아닌, 짐승에게.
안 돼. 안 돼. 안 돼.
괴물에게 잡아먹혔던 걸로도 모자라 이런 짓까지 당하고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미친 거 같았다. 이 상황이. 아무리 몸을 흔들어도 괴물과 접붙은 아래가 떨어지지 않아서 해연이 비명을 내질렀다.
“아, 아아……아아아악!”
“해연? 나예요, 이현. 현이에요. 제발, 제발 정신 좀.”
“만지지 마!”
남자는, 아니 괴물이 제 얼굴에 손을 대자 해연이 진저리를 치며 그의 손을 쳐냈다. 괴물주제에 다정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더 소름 끼쳤다.
“제발, 제발……. 안 돼, 빼, 빼 줘. 사, 살려…….”
“……안 돼요. 그럴 수 없어.”
그러니까 당신이 조금만 더 참아 줘요. 괴물은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녀의 애원을 단호히 거절했다. 도리어 그녀의 안에 삽입된 무언가가 더욱 크게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괴물의 성기가.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우욱!”
“……!”
해연이 속을 게워 내자 검붉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바닥에 쏟아진 피는 부글부글 기포가 올라왔다가 검은 연기가 되어 스윽 사라졌다. 해연은 그 모습조차 기괴하게 느껴졌다. 비현실적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절대 현실이 아닐 거다.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는 걸 거야. 분명히……. 현실이라면 이런 일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이게 현실이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이런 끔찍한 짓을 당할 바에는!
발작적으로 몸을 경련하는 해연의 몸을 ‘괴물’이 꽉 끌어안았다. 그녀가 발버둥 칠수록 괴물은 더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살갗에 닿는 괴물의 품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해연이 더 크게 비명을 내질렀다. 안 돼, 안 돼. 이러면 너무 현실 같아서 너무, 너무…….
“역, 겨워…….”
해연의 의식이 까무룩 넘어갔다.
챕터 8
해연은 지독한 악몽을 꿨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떴다. 너무 지독한 꿈이어서 꿈에서 깬 지금도 심장이 떨렸다. 깊은 심호흡을 한 뒤 해연은 상체를 일으켜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의 집이 아니었다. 모르는 곳이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지 싶어 주변을 돌아보는데 침대 옆에 단정하게 접힌 가운 위로 호텔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게 보였다.
H&G호텔.
자신의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꽤 비싼 호텔이었다.
‘내가 왜 호텔에 왔지? 나는 분명 어제…….’
어제.
그 순간 해연의 머리에 끊겼던 기억이 좌르르 스쳐 지나갔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선명하고 말도 안 되는 것들이었다. 비가 오는 밤. 자신의 뒤를 쫓던 괴물에게 잡히고, 또 뒤를 이어 나타난 거대한 짐승에게 잡아먹혔다. 그리고, 그리고…….
이현이라는 남자를 만났다.
해연은 양팔로 와락 몸을 감싸 안았다. 귀신에 홀린 것처럼 낯선 남자를 따라가 섹스를 했다. 그런데 그게 자신을 잡아먹었던 짐승이었다. 괴물, 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꿈을 꿔도 말이 되는 걸 꿔야지. 이러니 사람들이 개꿈이라고 하는 거였다. 해연은 의식적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야 했다. 그러면서도 해연의 고개가 배로 향했다. 짐승의 교미처럼 아래가 딱 접붙어 임신한 것처럼 배가 볼록하게 튀어나왔던 모습이 너무 선명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확인을 하려던 거였다.
다행히 배는 납작했다. 부풀기는커녕 도리어 몇 끼를 굶은 것처럼 안으로 쑥 들어가 있었다. 해연은 안도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가 흠칫 굳었다. 다리 사이로 걸쭉한 무언가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해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야. 아니야, 한해연. 그럴 리가 없어…….”
생리할 때가 된 거겠지. 생리혈일 것이다. 뻣뻣하게 정면을 향하던 해연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음부에서 흘러내린 액체가 종아리까지 내려왔다. 희뿌연, 점성이 높은 액체. 정액이었다. 시야가 흔들렸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단 말이야.
아무도 듣지 않는 허공에 내뱉은 말은 울음이 섞여 있었다.
* * *
호텔을 벗어나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계절이 바뀌었다는 거였다. 분명 겨울이었는데, 지금은 추위가 한풀 꺾인 봄이었다. 해연은 멍하니 걸음을 옮겼다. 본능적으로 그녀가 향한 곳은 병원이었다.
의사는 넋이 나간 해연을 보고 조심스럽게 경찰서에 제출할 진단서가 필요하냐고 물었지만, 해연이 발작적으로 거부하자 내심 안도한 얼굴로 사후 피임약만 처방해 줬다.
해연이 그다음으로 향한 곳은 집이었다. 언덕을 올라 빌라에 도착했다. 비밀번호를 눌러 집 문을 열자 자신의 물건이 아닌, 타인의 물건이 보였다.
‘유영이…….’
남자에게, 괴물에게 허락을 받아 가며 섬뜩한 일을 겪은 유영이를 제집에 있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괴물의 집에 들어가 살았다. 괴물들이 살고 있는 곳에.
“그게 다 현실이구나…….”
자조적인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해연은 집에서 나와 차가운 현관문에 기대 주저앉았다. 왠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자신의 집이 아닌 것 같아서였다. 아니, 사실은 제가 본 것을 부정하고 싶어서였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바닥을 보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자국 소리가 몇 번 울리다가 우뚝 멈췄다.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해연, 언니? 언니야?”
“유영아…….”
“왜 그동안 연락도 안 되고……!”
눈이 뜨거워서 유영이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눈을 깜박여도, 비벼도 뜨거운 물이 자꾸 눈동자에 고였다.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목구멍이 콱 막힌 것처럼 뜨겁고 답답해서 유영이의 이름을 부르는 게 해연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 언니 왜 울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 아, 아니. 빨리 안으로 들어가요. 아직 추운데 왜 밖에서 그러고 있어?”
유영이 해연을 일으켜 세운 뒤 재빨리 문을 열었다.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곳인데 유영이 오자마자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섰다. 아니, 유영이 머뭇거리는 해연을 잡아끌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영은 해연을 거실에 둔 채 허둥지둥 보일러를 켜고 침대의 온수 매트를 최대치로 올렸다.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여서 지금은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그런 것보다 일단 따뜻하게 몸을 녹여야 했다.
“언니, 빨리 침대에 누워요.”
“……유영아…….”
“응, 유영이 맞아요. 맞으니까 일단 몸 좀 녹여요. 빨리, 응? 몸을 좀 녹여야 진정이…….”
“유영아.”
해연은 자신을 방으로 잡아끄는 유영이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흐어어엉, 울었다. 해연이 몸을 덜덜 떨면서 통곡 같은 울음을 터트리자 가만히 안겨 있던 유영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유영이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의연하던 언니가 이렇게까지 울 정도면 분명 안 좋을 일을 겪었으리라. 아주아주 안 좋은 일. 할 말이 많은데, 너무너무 묻고 싶은데 꾹 눌러 참았다.
한참을 울다가 탈진한 해연은 유영이가 따뜻하게 데워 놓은 침대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익숙한 공간, 익숙한 사람이 함께 있는 것에 안도감이 들어 침대에 눕자마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해연은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유영이의 손을 쥐었다. 자고 싶지 않았다. 그럼 또 악몽을 꿀 거 같아서 무서웠다.
“유영아, 나…… 무서워. 자면 너 없을까 봐…….”
“아무 데도 안 가고 옆에 있을게요.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한숨 푹 자요. 자도 돼.”
유영이 다른 손으로 제 손을 잡은 해연의 손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러자 해연의 눈꺼풀이 깊게 잠겼다.
유영은 해연의 숨이 깊어진 걸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잡은 손을 떼고 부엌으로 향했다. 분명 아무것도 안 먹었을 테니 죽이라도 만들 생각이었다.
해연과 연락이 되지 않는 내내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경찰에 신고해도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사실 실종이란 말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지속적으로 찾아오는 자신을 경찰은 심드렁한 얼굴로 네네, 알겠습니다, 하고 건성건성 대답할 뿐이었다.
혹시라도 끔찍한 일을 겪어 다신 볼 수 없을까 봐 겁이 나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분명 그 새끼겠지. 그 얼굴만 뺀질했던 이현이라는 놈.’
죽여 버릴 거야. 유영은 죽을 휘휘 젓다가 울컥했다. 그 새끼가 해연 언니를 데려간 뒤 연락이 두절됐고, 저렇게 안쓰러운 꼴로 나타났다. 자신이야 가장 끔찍한 일까지 상상했던 터라 살아 있는 모습을 봐서 다행이었지만, 일을 겪은 당사자인 해연 언니는 다를 것이다.
‘대체 무슨 험한 일을 겪은 걸까…….’
유영은 죽이 다 만들어지자 가스 불을 끄고 뒤 돌았다가 헉, 작은 비명을 질렀다. 분명 침대에 있던 해연이 언제 나왔는지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언니, 왜 여기 나왔어. 빨리 침대로 가요.”
“……너 없어서…….”
“죽 만드느라, 이제 안 갈게. 나도 같이 누울까요?”
“응.”
해연은 유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해연이 먼저 침대에 눕고 그 옆에 유영이 누웠다. 잠깐 눈을 붙였다 뗐을 때 유영이 보이지 않아서 놀랐다. 그러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고 밥 냄새가 나서 유영이 집에 있다는 걸 알고 안도했다. 지금 해연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유영이뿐이었다. 해연은 유영이의 손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 유영이의 체온이 느껴지자 거짓말처럼 다시 눈이 감겼다.
멀어지는 의식 밖으로 유영이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걱정시켜서 미안하다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뒤늦게서야 그 생각이 났지만, 수면에 빠진 몸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