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그때 현관문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이진아가 돌아왔다. 신발을 벗고 고개를 들던 이진아는 숨을 헐떡이고 있던 괴물과 눈이 마주쳤다. 샛노란 눈이 희번득 빛을 발하며 순식간에 이진아를 거실로 끌고 왔다.
“왜, 왜……!”
“가만히 있어. 죽고 싶지 않으면.”
거친 숨과 함께 내뱉는 말에 이진아는 몸을 움츠렸다. 딱딱하게 굳은 채로 바닥에 일자로 누운 이진아의 목에 괴물이 코를 들이밀었다. 이게 한해연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당장 입안에 집어넣을 텐데.
한해연이라는 인간을 먹겠다고 그동안 참아 왔던 식욕과 살인 욕구가 순혈에게 당했던 굴욕으로 훅 끓어올랐다. 이진아여도 상관없었다.
괴물의 입이 크게 벌어져 날카로운 짐승의 이빨이 연약한 피부에 스쳤다. 고작 닿은 것뿐인데 피부가 벌어져 벌건 피를 흘렸다. 이진아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 * *
안주희는 몸이 주인의 피에 적응하자마자 별채로 왔다. 주인이 찾진 않았지만, 지금 별채에 시중들 이가 아무도 없어 분명 불편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조심스럽게 정원을 가로질러 별채로 향했다.
검은 그림자로 뒤덮인 별채는 여전히 고요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주인도, 한해연도 없는 것만 같았다. 설마 거처를 바꾼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일족의 모든 촉각이 주인의 행방에 예민하게 곤두섰기에 주인이 별채 밖으로 나섰다면 본가가 이토록 조용할 리가 없었다.
약간의 의심과 주인이 있을 거라는 묘한 확신으로 안주희는 조심스럽게 별채의 문을 열었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던 별채의 문이 제겐 아무렇지 않게 스르르 열리자 안주희는 살짝 우월감을 느꼈다. 꼭 일족 중에 주인에게 가장 가까운 이가 자신인 것만 같아서.
‘물론 한해연을 제외하고서겠지만.’
그전까진 아무렇지 않았던 한해연의 존재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한해연만 없다면 주인에게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안주희는 슬그머니 스며드는 욕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주인이 절 살려 둔 이유가 한해연 때문인 건데. 주인에게 받은 피도 자신이 한해연을 보호하고 막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걸 주인에게 들킨다면…….
안주희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럼 자신도 비참한 꼴을 당했던 일족들과 같이 비루한 짐승이 될 터였다. 주인의 자비는 오로지 한해연에게만 닿아 있기에.
‘조심해야 해.’
주인을 자극하지 않도록. 무조건 한해연에게 납작 엎드려야 한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순간 죽음보다 비참한 꼴이 될 것이다. 안주희는 묘하게 요동치는 속을 가다듬고 한동안 관리가 되지 않았던 공간을 조심스럽게 청소했다.
어느덧 주인의 침실에 가까워졌다. 안주희는 방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다른 곳이면 몰라도 침실 안쪽은 더욱 그녀의 손길이 필요할 것이다. 주인의 허락이 없이는 들어가선 안 되는 공간이었다. 문을 두드려 볼까, 고민하는데 안쪽에서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한해연의.
안주희는 저도 모르게 침실 문을 조심히 열고 안을 들여다봤다. 주인은 한해연의 무릎을 베고 아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한해연은 묘한 얼굴로 주인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항상 주인의 품에 안겨 있던 연약하고 나약했던 모습이 아니라, 차분하고 고요한 표정이었다. 나약해 보이는 건 도리어 주인이었다. 주인은 마치 어리광을 부리듯 한해연에게 매달렸다. 그녀의 손길을 받고자 칭얼거리기도 했고, 갸르릉, 애교 섞인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한해연은 곤란하다는 듯이, 혹은 무언갈 포기한 눈으로 옅게 웃었다.
안주희는 절대로 보지 말아야 할 비밀스러운 장면을 본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는데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해연이 그녀를 바라봤다.
순간 심장이 술렁거렸다.
아까는 한해연의 존재가 거슬렸다면, 지금은 저 여자가 갖고 싶어졌다. 소중히 안고 싶었고, 또 엉망으로 망가트리고 싶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저 여자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듯한 감정은 구역질 날 정도로 무겁고 진득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
안주희는 이것이 제가 가진 마음이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건, 이건 한해연을 향한 주인의 마음이었다. 안주희는 주춤 뒷걸음질 쳤다. 이게 바로 주인의 피를 먹은 대가구나. 강해졌다고, 주인과 가까워졌다고 성급히 기뻐했던 것이 바보 같았다. 안주희는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이 감정이 느껴지지 않던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때, 계속 한해연만을 바라보고 있던 주인의 눈이 안주희를 향했다. 마치 제 것을 노리는 적을 보는 것처럼 예민하게 곤두선 살기에 안주희는 다리가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를 구한 것은 한해연의 나지막한 한마디였다.
“현아.”
고작 단 한마디에 주인의 날카로웠던 눈이 단번에 스르르 풀렸다. 주인은 자신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온순해진 얼굴로 한해연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안주희는 기듯이 그 공간을 벗어났다. 그곳에 더 있었다간 주인이 자신을 죽일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챕터 7
별채는 더욱 고요해졌다. 아무도 그들의 공간에 들어오지 못했기에 적막한 침묵만 존재했다. 봄이 다가오고 있는데 공기는 여전히 찼다. 간혹 눈이 내릴 때도 있었다. 해연은 이현과 손을 잡고 눈이 내리는 풍경을 구경했다. 느슨하고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이현은 매번 잠에서 깰 때마다 긴장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겁에 질린 것처럼 경직된 눈동자가 어딘가 가슴이 아려 해연은 손을 뻗어 그의 눈가를 만지거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이현이 안도한 얼굴로 예쁘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마저도 어딘가 초조해 보였다. 마치 궁지에 몰린 것 같은, 막다른 골목에 선 사람처럼 그녀에게 매달렸다.
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해연은 그저 이현을 안은 채 등을 쓰다듬었다. 처음에는 토닥이던 손이 이현의 등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잘게 떨리던 몸이 조금씩 진정하는 게 느껴졌지만, 이번엔 해연이 놀랐다. 매끄러워야 할 피부가 무언가에 난도질 된 것처럼 살이 움푹 파인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등이, 왜 이래요?”
“……뭐가요?”
“다쳤잖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내가 왜 다쳐요.”
이현은 해연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잘못 느낀 걸까. 하지만 손에 닿는 느낌은 여전했다.
“뒤돌아봐요.”
해연은 저를 안은 채 버티는 이현을 뒤로 밀었다. 그리고 그가 입고 있는 셔츠를 들어 올렸다. 등은 그가 말한 대로 매끈했다. 분명히 손에 닿았던 움푹 파인 흔적도 없이. 해연은 멍하니 제 손을 바라봤다. 분명 손으로 만졌을 때는 이렇게 매끈한 살이 아니었는데…….
해연이 머뭇거리다 그의 등을 손으로 매만지자 조각처럼 단단한 근육이 움칫움칫 움직였다. 이현은 조금 곤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서 더 만지면 설 거 같아요.”
“……!”
정욕이 낮게 깔린 목소리에 해연이 흠칫 손을 뗐다. 이번엔 웃음으로 이현의 어깨가 잘게 흔들렸다. 그는 다시 몸을 돌려 해연을 바라봤다.
이현은 살짝 눈을 내리뜨며 해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내가, 아픈 것 같아서 걱정했어요?”
“당연, 하잖아요…….”
“당신이 날 더 걱정해 줬으면 좋겠어요.”
이현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웃었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뺨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수줍은 듯, 그녀의 잔소리가 행복하다는 듯이. 해연은 그런 이현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현이 웃고 있는데 꼭 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인데, 그가 웃을 때마다 심장이 저릿했다.
자신보다 훌쩍 큰 남자였다. 꽤 무게가 나갈 텐데도 단숨에 자신을 들어 올렸다. 추위도 별로 느끼지 않았고, 언제나 강하게 느껴지는 남자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작은 아이처럼 느껴질까.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그가 안타까운 동시에 어딘가 소름 끼치도록 선뜩하다는 것이었다.
해연의 눈에 간혹 이현의 뒤로 이상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물스물 기어 다니는 그림자 같은 것은 항상 이현을 따라다녔다. 그게 보이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었다. 그녀를 향해 다가올 듯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꼭 먹이를 잡아먹기 전에 간을 보는 것처럼.
머리로는 이현의 곁이 가장 안전하다는 걸 알고 있는데, 저게 보일 때는 그와 함께 있는 게 조금씩 불편해졌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 들 때면 마치 깊고 깊은 물에 가라앉아 있다가 수면으로 뜨는 듯한 부유감도 함께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물의 파동에 의해 일그러졌던 시야에 수면 밖의 것이 보이기 직전, 누군가가 그녀의 발목을 잡아 더 깊은 곳으로 끌어당겼다.
해연은 이현의 등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검은 그림자를 바라봤다. 검은 그림자의 형체가 왠지 익숙했다. 언제고 보았던 것 같은 그런 기시감이 든다. 왠지 알면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무서워…….’
도망치고 싶었다. 이곳에서. 이현의 곁에서 멀리, 아주 멀리 가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 울겠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자꾸 울음소리가 들려서. 마치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는 듯이 울어서 속이 울렁거렸다. 차라리 들리지 않았으면 했다. 그럼 아무렇지 않게 여기서 도망쳐 버릴 텐데. 해연은 조용히 숨을 죽였다. 뒤엉킨 속이 차분히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자 머리를 시끄럽게 하던 울음소리가 점차 옅어졌다. 이현에 대한 거부감도 마찬가지였다.
이현이 나붓이 웃었다. 하지만 둥글게 휜 눈매 사이로 검은 눈동자가 해연의 낯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잠시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을 되살렸던 해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주 짧은 꿈만을 그에게 남기고…….
그는 해연이 간혹 자신을 두려운 눈으로 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긋지긋했던 경험대로라면 해연은 곧 그를 혐오하고 한 공간에 있는 것도 끔찍해할 테니까. 하지만 해연은 아직 그의 곁에 있었다.
‘아직은.’
그래서 웃을 수 있었다. 매일 밤 제 몸을 상처 내 해연을 피로 물들인 게 효과를 보이는 것 같아서. 피를 쏟으며 가지 말라고,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지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할 수 있는 게 고작 그것뿐이어서 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