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그래서 아까 아버지한테 물어봤거든? 아버지가 부정은 안 하고 본 걸 잊으라는데, 그걸 어떻게 잊어. 그래서 누나한테 온 건데 혹시 아는 거 있어?”
열을 내며 말하던 윤시후는 어깨를 추욱 늘어뜨린 채 물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주희가 아는 게 있을 턱이 없었다. 잡종을 채 갔다고? 왜? 그런 쓸모없는 짓을 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하지만 두 사람이 뭔가 일을 벌이고 있는 건 맞는 것 같았다.
“일단, 입 다물어. 알겠어?”
“하지만…….”
“고작 잡종 하나로 무슨 일을 꾸밀 수 있겠어?”
“하지만!”
“무슨 일인지 알아낸 다음에 행동해도 늦지 않아. 명심해. 만약 성급하게 입을 열었다간 모두가 큰일 날 수 있다는걸.”
별거 아닐 것이다. 그래야 한다. 하지만 만약 이게 주인을 건드리려는 계획이라면, 일을 벌인 아버지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칫 윤시후와 자신까지 잘못될 수도 있다. 겨우 강해졌는데 제가 벌인 일도 아닌 걸로 화를 당하는 건 사양이었다. 주희의 당부에 윤시후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딸의 방조차도 도청기를 설치해 놓았던 안재호는 혀를 내찼다. 망둥이처럼 날뛰는 윤시후와 달리 제 딸은 그나마 냉정해서 다행이었다.
그 잡종을 이용하려던 게 성급한 판단이었던가.
안재호가 윤시후에게 모습을 드러내면서까지 잡종을 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윤시후에게 당했던 상처를 그가 치료해 주었기에 자칫 주인에게 그 일이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끔찍이도 아끼는 여자의 집을 침입한 잡종을 제가 치료했다는 걸 주인이 알면 무사하기 어려울 거다.
그땐 주인의 여자를 죽이는 데 이용하기 괜찮은 패라고 생각하고 벌인 일인데, 잡종답게 생각이 짧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걸 보면 또 성급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은, 그의 얼굴을 본 자가 윤일우가 아닌, 윤시후라는 것이었다. 제 아버지까지 엮어 놨으니 아무리 천방지축이라 할지라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흐음.”
주인은 별채 밖으로 내보내지도 않을 정도로 인간 여자를 과하게 끼고돌았다. 그 여자가 밖으로 나가야 손을 쓸 기회가 생길 텐데…….
‘어떻게 기회를 만들 수 없을까.’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인간 여자가 나갈 수밖에 없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별채에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주희는 제 말도 듣지 않을 테고, 그런 위험 부담이 큰 일에 사용할 패가 아니니 다른 수를 써야 하는데 도무지 틈이 없다.
인간 여자를 주인과 떨어지게 만들 계기. 아주 잠시뿐이어도 괜찮다. 한 시간 만이라도, 별채에서 벗어나 준다면…….
‘그럼 죽이는 건 쉽지.’
어린아이의 손목을 비트는 것처럼 아주 쉬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안재호는 답지 않게 흐트러진 얼굴로 서재를 서성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주인 눈을 피해 인간 여자에게 접촉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야 한해연이라는 인간 여자를 밖으로 빼돌릴 수 있을까 고민하던 안재호는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거친 발소리에 피식 웃었다. 윤경훈일 것이다. 예상대로 서재 문이 벌컥 열리며 분노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윤경훈이 들이닥쳤다.
“안재호!”
“생각보다 늦었군. 와서 앉게.”
하여튼 제 아들놈하고 똑같이 다혈질에 단순하기 짝이 없다. 이러니 제게 이용이나 당하지. 안재호는 내심 혀를 내차며 제가 앉은 소파 앞자리를 가리켰다.
윤경훈은 과도할 정도로 느긋한 안재호의 표정에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꾹 깨문 채 안재호의 앞에 앉았다. 안재호는 새 잔을 꺼내 차를 따라 윤경훈 앞으로 밀었다.
“진정 좀 하게. 누가 보면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겠어.”
“지금 느긋하게 너랑 이딴 걸 마실 기분인 줄 알아?”
“그럼 그렇게 계속 성질을 내고 있든가.”
안재호는 윤경훈 앞에 밀었던 찻잔을 다시 가져와 제 입가에 댔다. 그때 윤경훈이 손을 휘둘러 찻잔을 던져 버렸다. 뜨거운 찻물을 뒤집어쓴 안재호는 어깨를 들썩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윤경훈이 이렇게 구는 게 한심하다는 듯이. 그의 도발에 윤경훈의 얼굴이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야? 왜 나도 엮여 있다고 거짓말을…….”
“거짓말?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지?”
“시후에게 한 말 말이야! 고작 잡종 따위를!”
“아아. 그런데 그게 왜 거짓말이지? 자네가 나와 손을 잡은 건 사실 아니었던가?”
안재호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찻물로 젖은 머리와 상의를 대충 닦으며 대답했다. 느긋한 얼굴을 했지만, 찻물을 뒤집어쓴 게 내심 불쾌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윤경훈의 속이 그나마 가라앉았다. 윤경훈은 숨을 길게 내쉰 후, 아까보다는 차분해진 어조로 말했다.
“나는 잡종 따위를 이용하겠다고 동의한 적이 없어. 그것도 시후를 상처 입혔던 놈을 구해 줘? 자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닌가?”
“어차피 죽을 놈이야. 적당히 이용하고 죽이면 더 좋은 거지.”
“뭐?”
“칩을 박았거든. 한해연을 먹은 뒤 머리가 터지게끔. 물론 제멋대로 행동하면 바로 죽일 거고.”
안재호가 관자놀이 부근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웃었다. 예상치 못한 말에 윤경훈은 입을 꾹 다물었다.
“시후가 놈을 죽이려고만 했다면 나도 딱히 나서지 않았을 테지만, 주인 앞에 가져다 놓으면 말이 달라져. 알잖나. 주인이 얼마나 쉽게 머리를 헤집어 놓는지.”
어쩔 수 없었어. 안재호가 어깨를 들썩 올렸다 내렸다.
“……왜 그렇게 성급하게 행동했지? 주인이 놈을 찾고 있다는 건 자네도 알고 있었잖아.”
그러게 내가 왜 성급한 행동을 했을까. 안재호는 이번 일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그는 주인의 여자인 한해연의 집에 카메라와 도청기를 설치하기 위해 들렀다가 윤시후와 싸우고 도망치는 잡종을 발견했다. 그 순간 저걸 이용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손을 대지 않고도 한해연을 죽일 수 있고, 실패한다 해도 제게 별다른 손해가 없을 거라고.
확실히 짧은 생각이었다. 뭐가 급하다고 잡종 따위를 이용할 생각을 했던 건지. 하지만 본능이 계속 그를 닦달했다. 한시라도 빨리 한해연을 없애야 한다고. 오래 살려 두면 분명 그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가 되리라고.
좀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고작 육감 따위에 흔들려서 일을 그르칠 뻔했다. 그는 순순히 제 실수를 인정했다.
“적당히 쓰고 버리려던 패였는데, 순혈이 그 주위를 지키고 있는 곳을 찾아간 건 예상에 없던 일이었어. 잡종의 머리가 모자란 걸 생각하지 못한 건 내 실수가 맞아. 그건 사과하지. 늦었지만 손을 썼으니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야. 그러니 이번만은 자네가 한발 물러나 주게.”
“이게 사과로 퉁 칠 일이야?”
윤경훈의 목소리는 여전히 퉁명스러웠지만, 자존심 강한 안재호가 처음으로 먼저 사과했다는 것에 놀라 성질이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그 모습을 안재호가 속으로 비웃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하여튼 단순하기는.
“앞으로는 자네와 꼭 상의한 뒤에 행동할 테니 화 좀 풀어.”
“크흠. 이번만이야. 다음에도 이러면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조심하게.”
“당연하지. 맹세하겠네.”
“……차 말고 술이나 내와 봐.”
슬쩍슬쩍 입술을 꿈틀거리는 모습이 완전히 화가 풀어졌다는 증거였다. 안재호는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장식장에 있는 술을 가지러 가다 아, 하고 감탄사를 터트렸다.
“윤일우의 입은 막았겠지?”
“…….”
윤경훈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은 오히려 긍정의 뜻이었다.
* * *
괴물은 이진아의 집 안으로 숨었다. 원래는 자신 혼자만 지내는 은신처로 가려고 했지만, 그곳은 마지막 보루였기에 들켜도 상관없는 이진아의 집을 선택한 것이었다.
괴물에게 이진아의 가치는 딱 그 정도였다. 쓸모 있지만, 죽어도 상관없는 존재. 한해연이라는 먹잇감만 먹고 난다면, 어차피 치워 버리려고 했기에 잠시 몸을 숨기는 장소로 이진아의 집이 적당했다.
괴물은 이진아의 집에 오자마자 본래의 형태로 돌아갔다. 백팔십의 키가 천장에 닿을 듯 높아졌다. 매끈했던 피부에 짐승의 털이 촘촘히 돋아났다. 인간의 행세를 하느라 입고 있던 옷은 갈기갈기 찢어진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괴물은 깊게 찢어진 입을 벌리고 숨을 헐떡거렸다.
이진아의 집은 늘 그렇듯 지나칠 정도로 깔끔했다. 그게 오늘따라 꼴 보기 싫었다. 평소에는 죽어라고 그의 흔적을 지우려 애쓰는 이진아의 행동이 같잖고 우스웠다면, 이번에는 고작 인간 따위가 저를 부정하는 것 같아 속이 뒤집혔다. 그게 꼭 순혈들이 저를 가지고 놀던 것처럼 느껴졌다. 괴물은 분풀이하듯 온 집을 뒤집어엎었다.
‘그 늙은이도 순혈이었어.’
당연히 그와 같은 잡종일 줄 알았다. 순혈이 잡종인 그를 죽이기는커녕 부상을 치료해 줄 이유가 없으니까. 순혈에게 잡히는 즉시 죽는다. 고작 잡종이라는 이유로.
잡종이라도 인간으로 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온전한 짐승 형체로 변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들은 잡종이라고 분류됐고, 처리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인간을 식량으로 먹는다는 건 핑곗거리에 불과했다. 순혈 역시 인간을 먹었던 과거에도 그들은 잡종을 사냥했었기 때문에.
늙은이가 나타나 윤시후라는 애송이에게서 벗어나게 된 후, 따끔한 통증과 함께 의식을 잃었다. 늙은이의 짓이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귀 가까이에서 이물감이 들었다. 관자놀이 부근을 손으로 더듬고 있는 자신을 향해 늙은이가 개소리를 지껄였다.
‘또 제멋대로 행동하면 머리가 터질 테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씨발, 씨발, 씨발!”
괴물이 커다란 티브이를 발로 걷어찼다. 유리가 깨지면서 거실이 온통 난장판으로 변했다. 괴물은 그걸로도 부족해 장식장이고 뭐고 손에 잡히는 건 다 부쉈다.
괴물은 샛노란 눈을 빛내며 혀를 길게 뺐다. 검붉은 살덩어리를 타고 침이 뚝뚝 떨어졌다. 흥분으로 높아진 심박수가 숨을 거칠게 만들었다. 갯과 짐승처럼 숨을 헐떡헐떡 몰아쉬는 모습이 괴물을 더 괴이하게 보이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