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윤시후의 입을 막은 윤경훈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세게 문질렀다. 그도 안재호가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제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일을 꾸미는 게 있는 거 같은데, 하필 잡종을 보호했다? 게다가 그걸 시후에게 보인 걸로도 모자라 저까지 연관되어 있다고 말을 했다고?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하필 그때 안재호의 꼬드김에 넘어가는 게 아니었다. 윤경훈은 그다음 날 안재호에게 그날의 대화가 찍힌 영상을 받았다. 누가 봐도 둘이서 주인을 없애려고 작당 모의하는 대화였다. 당했다고 후회해 봤자 증거가 남은 뒤였다.
‘그 후로 잠잠하길래 아직 일을 꾸미지 않은 줄 알았는데…….’
그는 시선을 들어 아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잠시만 입을 다물고 있어라. 나도 정확히 무슨 일인지 확인해야 하니까.”
“아버지는 연관돼 있지 않은 거죠?!”
“…….”
“아버지?”
윤시후의 거듭된 물음에도 윤경훈은 묵묵부답이었다. 아니라고 확답을 하지 않는 걸로도 모자라 살짝 시선을 피하기까지 했다.
“아니,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이번 일은 잊어라. 넌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
“아비를 위해서 그래다오.”
“…….”
“잊을 수 있지?”
“……네.”
항상 강해 보이던 아버지였다. 그런데 오늘 이상할 정도로 약해 보였다. 심지어 애원하는 것처럼 들리기까지 하는 아버지의 말을 차마 거부할 수가 없어 윤시후는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맙다.”
윤경훈은 그제야 옅은 웃음을 보이며 그의 자랑인 아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하지만 윤시후의 얼굴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 * *
겨우 인간의 형체로 돌아온 안주희는 자신의 방에서 조용히 지냈다. 아직 주인의 피를 완전히 녹여 내지 못한 탓인지, 한해연의 냄새가 생각날 때마다 불쑥불쑥 식욕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욕심내지 말자. 이미 한해연 덕분에 고귀한 주인의 피도 얻었다. 식욕에 정신을 놓는 것보다 한해연의 옆에서 간간이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 먹는 편이 더 이득이었다.
이성을 되찾고 나니 불현듯 한해연이 안쓰러워졌다. 그녀는 알고 있을까. 자신이 편하게 지내고 있는 이곳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 자신의 연인이 사람이 아니란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한해연의 냄새가 퍼지기라도 하면 이곳은 완전한 무법 지대가 될 것이다.
그녀가 봤던 주인의 힘이라면 그마저도 통제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 인간 하나 때문에 온 종족을 적대시하는 일이 되어 버린다. 주인이 인간이 되어 나타난 그날 이미 한번 피의 숙청이 이루어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열 정리에 불과했다. 강자가 약자를 다스리는 종족의 규칙과 부합되는 일이었기에 살아남은 종족은 그걸 온전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고작 인간 하나를 지키고자 일족을 적대시한다면 그건 이전과 다른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다 하더라도 안주희는 어떻게든 주인 곁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작 피 한 방울이었다. 그녀가 주인에게 받은 것은.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그토록 원하고 원했던 걸 가졌다.
혈관을 내달리는 피에서도 요동치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강해졌다. 일족의 누구보다 더.
그 피를 한 방울이라도 더 받을 수 있다면, 바닥을 기며 한해연의 발가락도 핥을 수 있었다. 안주희는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한해연은 살아야 한다. 어떤 상처도 입지 않고, 주인의 흥미를 계속 끌어야 했다. 그래야 이 쾌감을 더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얼마나 살아야 그 정도의 힘을 얻을 수 있을까. 고작 피 한 방울에 새로 태어난 것 같은 힘을 얻었는데 주인은 대체 그 안에 얼마만큼의 힘을 감추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별채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사라졌는데 본가가 너무 조용했다. 누구 하나 이 사태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조용했다. 마치 찔리는 게 있는 것처럼.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주희야, 나다. 문 좀 열어 보렴.”
날아오를 듯이 좋았던 기분은 아버지, 안재호의 목소리로 인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안주희는 문을 열어 아버지를 안으로 들였다.
“무슨 일이세요?”
“주희야, 요즘은 왜 별채에 가지 않니?”
“……주인님이 부르지 않으셔서요.”
“흠. 별채가 그렇게 넓은데 관리할 새로운 일족을 뽑아야 하지 않고?”
아아. 안주희는 그제야 본가가 조용한 이유를 깨달았다. 모두 자리가 비게 된 별채에서 일하는 걸 핑계 삼아 주인의 정보를 빼내려고 하려던 거였다.
“그건 제가 알 수 없죠. 왜요? 주인님의 뒤를 캐지 못해서 아쉬워지셨어요?”
안주희의 날카로운 말에 그녀의 아버지, 안재호가 인자한 얼굴로 웃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나는 그냥 네가 잘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와 본 건데 말이야.”
개소리였다. 안주희는 차게 웃었다.
“뭘 잘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거죠?”
“이현 님 눈에 들어야지, 아가. 네가 이현 님 씨를 받아야 이 애비가 안심할 거 아니니.”
“씨요.”
픽, 웃음이 나왔다. 주인은 제가 한해연에게 잘하는 것조차 경계하는 남자였다. 눈에 들 리도 없고, 주인의 씨를 받을 일도 없다. 아버지가 저를 딸이 아니라, 주인의 씨를 받을 씨받이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말하다니. 새삼 실망하는 자신이 우습다.
“이제 꿈 깨시라니까요. 이현 님은 저 보지도 않으세요.”
“그야 네가 노력을 안 하니까 그렇지.”
몸도 그렇고 얼굴도 그깟 인간보다 못한 게 뭐냐며 안재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책했다. 안주희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내쉬었다. 그래야 진정이 될 것 같아서였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정말 친부가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제 태를 집착하는 걸 보면 피가 이어지긴 한 것 같지만, 그래서 더 혐오스러웠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제 꿈에서 깨어나세요.”
“너야말로 해 보지도 않고 왜 섣불리 단언하는 거냐. 나 혼자 좋자고 이러는 것도 아니지 않니? 너만 잘하면 네가 모든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거야.”
“아버지가 가질 권력이겠죠.”
“……주희야.”
안재호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사람도 아버지라고. 안주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버지, 제가 왜 혼자 살아 있는지 아세요?”
“무슨.”
“제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살아 있는 거라고요.”
안주희는 제가 주인의 힘을 받았다는 걸 숨겼다. 아직은, 아직은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안재호는 제 딸을 모호한 눈으로 내려다보다 픽 웃었다.
“그럼 널 키운 보람이 없지 않니. 네 어미가 슬퍼하겠구나.”
“……가세요.”
“그래, 그럼 마저 쉬려무나. 내 말 명심하고.”
안재호가 돌아간 뒤, 머리에 차오른 열을 식히고 있던 안주희는 창문이 미친 듯이 흔들리는 걸 보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경우 없는 짓을 하는 인간은 윤시후 하나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예상은 벗어나지 않았다.
“누나, 누나, 누나, 잠깐 문 좀 열어 봐!”
“좀 가!”
“아, 잠깐만! 잠깐이면 된다니까?”
“지금 너랑 말할 기분 아니야.”
“뭐래. 잘 말하고 있네.”
아. 안주희는 눈을 손으로 가린 채 천천히 숫자를 셌다. 그리고 윤시후가 매달려 있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동안 본가엔 얼씬도 안 하고 밖으로 나돌아 다니더니 왜 돌아왔어?”
“그거 때문에 누나한테 온 거거든?”
“……뭐?”
윤시후는 창문 안쪽으로 훌쩍 뛰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방문을 제멋대로 열고 밖을 휘휘 살핀 뒤 다시 문을 닫았다. 안주희는 흙이 잔뜩 묻은 발자국을 내려다보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윤시후의 이상한 행동이 뭔가 석연치 않아 말을 아꼈다.
“누나, 내가 아까 좀 이상한 걸 봤는데……. 아, 이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뭔데?”
“그게, 아, 진짜!”
윤시후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채 손으로 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도 부족한지 주먹으로 제 가슴을 퍽퍽 쳤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러지? 솔직히 별거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안주희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누나 내가, 진짜 이상한 걸 봤어.”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누나 아버지하고 내 아버지가……, 아니, 내가 예전에 부상 크게 당해서 왔던 거 알아?”
“알아.”
“아니 그걸 누나가 어떻게 알아? 아버지가 말했어?!”
“그게 중요해?”
“중요하지!”
또 말이 다른 곳으로 샜다. 안주희는 인내심을 발휘해 윤시후의 궁금증을 풀어 줬다. 안 그러면 하란 말은 안 하고 계속 쓸데없는 말만 반복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아……. 네 아버지가 주인님께 널 살려 달라고 왔을 때 나도 거기 있었어. 됐어? 설마 이거 물어보려고 온 거니?”
“아씨 아버지는 왜…….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게 내가 해연 누나네 지키고 있을 때 잡종이 침입해서 방심한 찰나, 아, 진짜 방심한 거야. 아무튼 방심해서 당한 거였거든?”
“그래서?”
가지가지 했네. 그렇게 나대더니 잡종도 못 이기고. 안주희의 시선이 차갑게 식자 윤시후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진짜 방심한 거라고!” 하며 변명했다. 안주희는 대충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말을 채근했다. 사설이 너무 길었다.
“그동안 그 새끼를 잡으려고 해연 누나네 근처에서 있었단 말이야. 아, 일우 형하고. 일우 형은 주인이 시켜서 지금 거기 있어. 아무튼 그러다 어제 꼬리를 잡았는데…….”
“잡았는데? 뭔데 계속 말을 질질 끌어.”
윤시후의 횡설수설을 익숙하게 해석하며 듣고 있던 안주희는 또 말을 멈춘 윤시후에게 결국 짜증 냈다.
“말을 할 거면 확실하게 하고 아니면 아니지, 대체 결론이 뭐길래…….”
“늙은 여, 아니, 누나 아버지가 나타나서 잡종을 채 갔어. 근데 우리 아버지도 연관되어 있대.”
“……!”
이건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주희는 피가 식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