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이러니까 네가 어리다는 거다.”
“나 어린 거 맞는데? 나 아직 열 살이야.”
성인도 아닌데 멋대로 하면 좀 어때서? 윤시후가 어깨를 으쓱하며 제 나이를 방패로 삼자 무표정하던 윤일우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어린애면 어른의 말을 듣는 게 좋겠지.”
“어른치고 나보다 약하잖아, 형은.”
“주인께서 왜 강한 네가 아니라 내게 이 일을 맡겼을지 생각은 해 봤니?”
“…….”
“분별력도 없는 어린애가 힘 좀 세다고 나대면 일을 그르치는 법이지. 고작 잡종 따위에게 당했던 것처럼.”
윤시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윤시후는 사촌 형인 윤일우가 이래서 불편했다. 아무리 건드려도 그 이상으로 되돌아온다. 어떤 타격도 받지 않았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제 아픈 구석을 사정없이 찌르니 울컥 성질이 나도 여기서 더 말대꾸하면 윤일우의 말을 그대로 증명하는 꼴밖에 되지 않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윤일후가 씩씩거리며 입을 꾹 다물자 윤일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방해는 지금까지 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이제 그만 돌아…….”
수상한 기척이 느껴지자 말을 하던 윤일우도 윤시후도 한곳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기척은 잠시 났다가 바로 사라졌지만, 그들은 조금의 이상도 놓치지 않고 기척이 났던 곳으로 달렸다.
넓게 떨어진 아파트의 건물 사이를 뛰어 도착한 곳에는 인간을 잡아먹는 잡종 특유의 피비린내가 흘렀다.
“역시 기다리니까 오긴 오네.”
“잡담할 시간 없어. 도망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빨리 잡아!”
“헹, 돌아가랄 때는 언제고.”
윤시후는 언제 입을 다물었냐는 듯 다시 의기양양한 얼굴로 대꾸하고는 공기 중에 흐르는 잡종 냄새를 쫓아 달렸다. 윤일우도 뒤를 따랐지만, 윤시후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
* * *
괴물은 전속력으로 뛰었다. 꽤 멀리 떨어져서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필 움직이다 발아래 있던 물건을 치는 바람에 흔적을 들켰다.
순혈은 하나가 아니었다. 둘,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씨발, 일이 좆같아졌다. 괴물은 욕설을 짓이기며 이리저리 동선을 바꿔 쫓아오는 순혈들에게 혼선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에 보답하듯 쫓아오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괴물은 방심하지 않고 다시 동선을 꼬았다. 몇 번을 그러고 나니 겨우 안심이 됐다.
‘순혈도 별거 아니군.’
괴물은 이를 드러내고 낄낄 웃었다. 순혈이랍시고 잘난 척해 봤자 잡종으로 태어난 저를 잡지 못했다. 두 번이나 순혈에게서 벗어났다는 자부심에 간이 팽팽히 부풀었다. 괴물은 곧장 사람들 틈 사이로 뛰어 들어갔다. 사람 사이로 달려가고 있지만, 아무도 괴물을 보지 못했다. 괴물이 달리면서 일으키는 바람에 누군가가 쓰러지고, 혹은 차가 뒤집혀 사고가 나기도 했지만 아무도 원인을 알지 못했다.
괴물은 이진아의 집으로 향하는 내내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세상 모든 것이 제 발아래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순혈을 피해 도망쳤던 수치가 희석되고 있었다. 한껏 고조되어 이진아의 집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누군가가 그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안녕, 이 씨발놈아? 우리 오랜만이지?”
“……!”
건방진 말투만으로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한해연의 집에서 자신이 독 묻은 칼을 찔렀던 놈이었다.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괴물은 주춤 발을 멈췄다가 다시 뒤돌아 뛰었다. 그때는 저 애송이 놈이 방심한 덕에 공격에 성공했다지만, 지금도 이길 수 있다는 장담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와 이 새끼 도망가네? 자존심도 없어? 하긴, 잡종이 자존심이 어딨어? 그치?”
“…….”
애송이 놈이 일부러 자신을 잡지 않고 성질을 긁으며 장난치는 걸 알고 있음에도 흔들리던 괴물은 더 이상 휘둘리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사람이 많은 거리로 달렸다. 인간을 방패 삼으면 살 가능성이 높아진다. 순혈은 인간을 건드리지 않는 걸 알기에 괴물은 순식간에 인간의 틈에 끼었다. 아니, 끼려고 했다.
괴물이 거리로 나가기 바로 직전, 사냥감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몰이하던 윤시후가 그를 순식간에 낚아챘다. 그리고 훌쩍 뛰어 사람의 기척이 없는 산 깊숙한 곳에 괴물을 내팽개쳤다.
“와, 이 새끼 비겁한 것 봐.”
“헉, 허억, 이 좆만 한 새끼가…….”
“이야, 니 좆은 이렇게 커? 대단한데?”
윤시후가 잡종의 바지춤을 힐끔 보며 피식 웃었다. 장난은 이만하면 됐다. 이젠 그때의 복수를 하는 것만 남았다. 가볍게 손을 털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던 윤시후는 잡종의 뒤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 눈이 커졌다.
“아…….”
윤시후는 뒤의 말을 차마 뱉지 못했다. 그가 아는 사람을, 잡종이 보고 안도한 얼굴을 했기 때문에. 절대 접점이 없어야 할 둘이 어째서? 갑자기 나타난 사람은 마치 보호하듯 잡종의 앞에 섰다. 그와 함께 잡종을 잡아도 모자랄 사람이.
혼란스러워하는 윤시후를 향해 잡종을 감싸고 선 안재호가 인자한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 주렴, 시후야.”
“대체 무슨 말을.”
“조용히. 너는 아무것도 못 본 거야.”
“씨발,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거냐고요! 이걸 모두가 알면,”
“네 아버지도 연관된 일이란다. 정말 네가 말할 수 있겠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내가 믿을 것 같아요?”
“믿지 못하겠다면 네 아버지에게 물어보면 되겠구나.”
“……뭐?”
안재호의 말에 윤시후가 허를 찔린 것처럼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안재호의 표정이 너무 태연해서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연관되어 있다고? 저딴 잡종을 보호하는 것에? 그가 아는 아버지는 혈통에 굉장히 집착했다. 그래서 순혈이 아닌 잡종을 경멸했다. 잡종은 발견하는 즉시 사살해야 한다고, 시후에게 세뇌하듯 말하곤 했다.
더군다나 저건 자신을 죽기 직전까지 가게 만든 원인이었다. 그런 놈을 보호한다고? 저를 끔찍이 아끼는 아버지가?
그래서 안재호의 말을 선뜻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또 아니라고 단언하기엔 잠깐의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는 말치고는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자신이 아버지에게 아니라는 답을 받은 뒤 입을 열면 끝인데, 그런 거짓말을 저 늙은 여우가 한다고?
그래서 윤시후는 안재호가 기껏 자신이 잡은 잡종을 가로채 사라지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잡종은?”
뒤늦게 도착한 윤일우는 혼자 멍청히 서 있는 윤시후를 향해 물었다.
“어? 아, 노, 놓쳤어…….”
“뭐?”
“잡종 주제에 쥐새끼처럼 빨라서, 아, 아무튼 이제 돌아가자.”
“…….”
윤일우는 묵직한 시선으로 당황한 티를 여실히 내는 윤시후를 가만히 바라봤다. 윤시후는 제멋대로 굴던 성격답지 않게 그의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아무리 그가 어려도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할 줄 알았다. 아버지가 관련되어 있다면 지금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말 안 할 거면 넌 이제 본가로 돌아가. 도움이 안 되니까.”
윤일우가 늦은 이유는 잡종이 남긴 흔적을 윤시후가 족족 지웠던 탓이 더 컸다. 제 복수에 눈이 멀어 혼자 독차지하려고 한 짓이었다. 그런 주제에 놓쳤다고? 그는 시험하듯 윤시후에게 매번 했던 말을 또 했다. 그런데 이번엔 지금까지와 다른 대답이 나왔다.
“어, 어……. 그래야지.”
“윤시후. 너 대체.”
“아, 난 먼저 간다. 본가로 갈 거니까 찾지 마!”
언제 멍하니 있었냐는 듯 윤시후가 훌쩍 그 자리를 떴다. 윤일우는 순식간에 사라지는 윤시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정말 놓친 거라면 윤시후의 성격상 돌아가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리가 없다. 뭔가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윤시후의 입이 아니라면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입을 다물 거라면 티라도 내지 않아야 의심을 안 하지. 원칙대로라면 이것도 주인에게 보고해야겠지만, 피가 섞인 게 뭐라고 망설여졌다. 게다가 아직 성인도 아닌 어린애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도 철부지 같은 사촌 동생에게 약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덮을 생각은 없었다.
“……아.”
윤시후의 뒤를 바로 쫓아가려던 윤일우의 발이 잠시 주춤했다. 만에 하나라도 정말 놓친 거라면 한해연의 집에 있는 이유영의 신변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방향을 틀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 * *
본가로 돌아온 윤시후는 대번에 아버지가 있는 곳을 찾았다. 서재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아버지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맞았다.
“아버지!”
“그동안 본가엔 얼씬도 안 하더니 무슨 변덕이 불어서…….”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내가 왜 왔는지 몰라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윤시후의 다그침에도 그의 아버지 윤경훈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뭐지? 역시 거짓말이었나?’
윤시후는 아버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안도감이 드는 한편, 그래도 확실하게 확인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늙은 여우가 내 앞에서 날 찔렀던 잡종 새끼를 채 갔는데 여기에 아버지도 연관되어 있다고 말했어요. 거짓말이죠?”
빨리 늙은 여우가 거짓말한 거라고 해요. 윤시후는 초조하게 윤경훈의 대답을 기다렸다. 분명 자신이 바라는 대로 대답해 줄 거라고 믿으며. 하지만 윤경훈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의 기대와 달랐다.
“……시후야, 우선 문을 닫아라.”
“아버지?”
“닫으라고 하지 않았냐!”
“…….”
제 앞에서 거의 큰소리를 내지 않던 아버지의 예민한 목소리에 찔끔한 윤시후는 바로 문을 닫았다. 윤시후는 아버지의 손짓을 따라 소파에 앉았다.
“다시 말해 보렴. 안재호가 뭘 어쨌다고?”
“잡종을, 드디어 잡종이 한해연의 집 근처에 나타났어요. 도망치길래 잡으러 갔는데, 늙은 여우가 나타나서 오늘은 그냥 물러나래요. 그리고 여기에 아버지도 연관되어 있다고 그랬어요. 내가 못 믿으니까 가서 직접 물어보래요. 아니죠……? 늙은 여우가 거짓말한 거죠?”
“…….”
“아니잖아요. 그 새끼는 날 찌른 놈인데 왜 아버지가…….”
“시후야.”
“네?”
“조용히 해라. 소리가 크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