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현이 기껏 사냥해 온 토끼는 산 근처의 땅에 묻혔다. 기가 막혔지만, 현은 아이의 행동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풀 따위가 아닌 제대로 먹을 게 생겼으니 반가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이의 반응은 그가 바라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먹이를 구해 오는 걸 포기한 건 아니었다.
새끼는 사냥하지 말라고 했지.
그래서 이번엔 제법 덩치가 큰 짐승을 잡아 왔다. 아이는 며칠을 두고 먹어도 다 먹지 못한 크기의 멧돼지를 보고 한숨을 깊게 쉬었다. 달갑잖은 얼굴이었다.
이것도 아닌가?
현은 이번엔 제법 부유해 보이는 집에 숨어들어 다 익혀진 고기를 훔쳐 와 아이의 앞에 툭 내려놓았다. 이번엔 묻지 말라고 아이를 똑바로 주시했다.
‘현아, 이거 어디서 가져왔어?’
그동안 아이가 신기해할 정도로 말을 알아듣고 맞장구치던 현은 이번엔 멀뚱한 얼굴로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듯 아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짐승처럼 뒷발로 귀를 긁기도 하며 딴청을 부리자 아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 알아들었으면서.’
끼잉.
‘검둥이라고 부른다?’
크르릉.
검둥이라는 말에 현이 털을 세우고 으르렁거리자 아이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저도 모르게 반응한 현은 아이의 다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의 애교에 아이가 약하다는 걸 알고 하는 행동이었다. 털이 풍성한 꼬리를 살랑거리며 아이의 종아리에 감고 흔들자 짐짓 화난 얼굴을 하던 아이는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다음부턴 이러면 안 돼.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기면 다 나를 먼저 의심하거든.’
아이는 침착한 목소리로 자신이 부모를 잡아먹고 태어난 불길한 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은 악신의 가호를 받는 악귀가 되었다고 처음으로 속내를 터놓았다. 현은 귀를 쫑긋 세우고 아이의 목소리를 차곡차곡 담았다.
‘처음 마을에 들어갔을 때가 있었는데 드디어 날 받아 주는 줄 알고 기뻤었어. 사실 하늘에 바치는 제사에 날 제물로 쓰려던 거였는데…….’
‘…….’
‘죽는 줄 알았는데 살았더라고. 신이 내려왔다면서. 그 후론……. 아니, 아니야. 너한테 할 말이 아닌데…….’
중간에 말을 끊은 아이는 제 손에 들린 고깃덩이를 바라봤다. 더 듣고 싶었지만, 아이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아 현은 조용히 있었다.
‘이걸 어쩌지?’
잠시 고기를 두고 고민하던 아이는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먹어 버리자며 돌을 갈아 만든 칼을 가져와 고기를 잘랐다. 현이 한입, 저 한입.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아이가 고기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천막 입구를 초조하게 주시하자 현은 몸을 벌떡 일으켜 입구 앞에 서서 시야를 가렸다. 작은 발로 바닥을 탁탁 치며 등을 크게 부풀렸다. 꼭 제가 지켜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작은 체구의 현이 하는 짓이 귀여워 아이는 불안해하던 것도 잊고 작게 웃었다.
아이의 걱정과는 달리 그날은 아무 일도 없이 무탈하게 지나갔다. 배부르게 먹고 잠든 아이를 두고 현이 몸집을 키워 천막 근처를 돌아다닌 탓이었다. 아이와 함께 있을 때와 달리 웬만한 산짐승을 댈 수도 없이 커진 검은 짐승의 위협적인 모습에 마을 사람들은 근처에도 오지 못했다.
갑작스레 아이의 곁에 나타난 검은 짐승은 마을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악신이 돌아온 거라며 아이의 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모르는 아이는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현이 구해 오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었다. 그러고는 풀 따위를 맛있다고 현에게 준 일에 대해 반성했다.
‘다신 풀 먹으라고 하지 않을게. 역시 고기가 제일 맛있네.’
푸르르. 아이의 멋쩍은 말에 현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현은 조금씩 자랐다. 아이가 의심하지 않도록 몇 개월간 천천히 몸을 키웠다. 아이의 귀여움을 받는 건 좋았지만, 작은 몸은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짐승의 탈을 뒤집어쓴 채 행동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인간인 척하는 것보단 차라리 말 못 하는 들짐승이 그에게 더 편했다. 그는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짐승으로 태어난 듯이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간혹, 참기 어려울 정도로 아이를 먹고 싶은 욕망이 일 때가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잠시 아이와 멀어져 있는 걸 택했다. 그러다 조금 괜찮아지면 다시 돌아와 아이의 곁에 있었다.
아이보다 커다란 덩치가 되었을 때는 아이를 등에 태우고 산을 오가기도 했다. 날이 맑은 밤에는 함께 별을 보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나이 든 아이는 그를 흡사 제가 낳은 새끼처럼 대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피붙이처럼 살뜰하게 보살펴 주었고, 다정했다. 웃음기 하나 없이 고요하던 아이는 소리 내어 웃는 게 당연한 것처럼 변했다.
산에서 장난을 치다 그의 몸에 흙이 잔뜩 묻으면 아이는 계곡으로 가 목욕을 시켜 주었다. 그는 장난치듯 푸르르 털에 묻은 물을 털어 아이의 몸까지 훌쩍 적셨다. 아이는 기가 막힌 얼굴을 했지만, 그래도 웃었다. 아이의 얼굴에 주름이 더 선명해졌지만, 그의 눈에는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에겐 일상처럼 평범한 나날들이 현에겐 무엇보다 특별했다. 그에게는 평생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던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좋은 날도 있었다. 처음엔, 그랬다. 자신으로 인해 아이가 웃어서, 계속 그럴 줄 알았다. 제 본질을 잊은 채.
아이의 ‘아이’로 안주하며 살았다.
* * *
밤새 적막한 별채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안주희는 제 앞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흠칫 놀라 고개를 번뜩 들었다. 어느새 방에서 나온 주인이 무감정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주희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일족이 모두 한낱 짐승으로 변했다. 혹시라도 저도 그렇게 될까 두려웠다. 그런 금수가 되느니 차라리 깨끗하게 죽는 게 나았다.
“주, 주인님, 저, 저는…….”
“해연의 냄새.”
“……!”
“역시 맡았군요.”
“저, 저는, 절대로, 차, 참았…….”
“알아요. 그래서 살려 둔 거니까.”
주인의 말에 주희는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가라앉자 간이 순식간에 방만해졌다. 한해연의 냄새는 너무 강렬했다. 주인은 그들을 홀리는 냄새와 완벽한 지배로 공포심을 자극했다면, 한해연은 완전히 아래가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달콤한 냄새만 흘러나왔다. 막혔던 댐이 완전히 열린 것처럼 모든 욕망을 자극하는 냄새였다. 주인이 바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한해연을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잡아먹었을지도 모른다.
주인의 시선 아래에서 몸을 떨면서도 그녀의 신경은 방에 있을 인간 여자에게로 향했다. 그렇게 잘 참아 내고도 그 냄새가 떠오르자 어찌할 수 없는 욕망으로 인해 아래가 축축하게 젖었다. 혀를 빼내어 달콤한 인간의 피부를 빨고 싶다. 바짝 마른 입술을 저도 모르게 혀로 핥았다. 주인이 보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이현이 몸을 낮춰 주희의 턱을 들어 올렸다.
“탐이 나는 마음은 이해가 가는데, 그래도 참는 게 좋아요.”
비참하게 죽고 싶지 않으면. 잔혹한 비소가 아름다운 입술 끝에 걸렸다. 온몸이 타들어 갈 것 같게끔 만들던 욕망이 순식간에 찬물을 부은 것처럼 식어 내렸다.
“벌을 주고 싶지만, 해연을 위해서 참을게요.”
“……가, 감사합니다.”
항상 곁에 있던 사람이 자리를 비우면 궁금증이 생기기 마련이다. 해연을 돌보는 이를 바꾼다 한들 이런 일이 또 생기지 않을 리가 없으니 차라리 이런 경험을 해 본 안주희가 계속 맡는 게 낫다. 그 냄새를 맡고도 참으려고 노력했던 것이 가상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현은 손가락 하나를 주희의 입안에 집어넣었다.
“물어요.”
영락없이 물어뜯겨 죽을 줄 알았는데, 살려 준 것도 모자라 귀한 것까지 나눠 주겠다고 한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이빨에 힘을 줘 주인의 손가락 끝을 깨물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단단한 피부를 뚫고 핏물을 빨아들였다. 자신에게 허용된 것은 딱 한 방울뿐이었다. 상처 났던 피부가 핏물을 조금 흘려내기 무섭게 빠른 속도로 아물었다. 이현은 동공이 풀려 흐물거리는 주희의 입에서 손을 떼어 낸 뒤 무심히 몸을 돌렸다.
복도에 혼자 남은 주희는 끓어오르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짐승의 형태로 돌아갔다. 주인의 응축된 힘을 아주 조금 받아먹었을 뿐인데 중형급의 체구가 점점 더 부피를 키웠다. 몸이 커지는 과정은 고통스러웠으나 견딜 수 있었다. 이 고통이 지나면 지금까지보다 훨씬 강해진다는 걸 알고 있기에. 이걸 바라고 그동안 그렇게 숨죽이고 인간 여자의 시중을 들었으니까.
챕터 6
높은 지대의 아파트 옥상에서 한해연의 집을 내려다보고 있던 윤시후는 쓰고 있던 모자를 슬쩍 아래로 내렸다. 아버지가 가만히 있으라고는 했지만, 그의 성격상 고작 잡종 따위에게 당했던 걸 그대로 묻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이상으로 되돌려 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삼 개월. 그동안 윤시후는 끊임없이 한해연의 빌라 주변을 돌았다. 분명히 다시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기다리는 것 외엔 그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했잖아.”
윤시후의 사촌이자, 이현의 명령으로 한해연의 집과 이유영을 감시 겸 보호하고 있던 윤일우가 그의 뒤에서 한숨처럼 말했다. 어차피 말해 봐야 듣지 않을 걸 알면서도 자꾸 얼쩡거리는 게 방해돼서 어쩔 수가 없었다.
심지어 이젠 이유영과 친분까지 쌓고 있으니 더 거슬렸다. 계속 이러면 만에 하나 이유영을 처리해야 할 때 감정이 섞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인은 이유영을 그대로 두라고 했지만, 상황은 언제 어느 때에 바뀔지 모른다. 그때를 대비하자면 이유영과 절대 친분을 쌓아선 안 된다. 그런데 윤시후가 자꾸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일을 그르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