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이럴 수가 없는데. 제게 잔인한 말을 하기 전, 그의 이름을 지어 주며 소중한 가족처럼 다독이던 아이가 갑자기 불쑥 튀어나와 그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그를 이끌어 온몸에 묻은 거품을 물로 씻긴 다음 수건을 꺼내 그의 몸을 닦았다. 이현은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여자가 하는 대로 얌전히 몸을 맡겼다. 그리고 욕실에서 나와 침대에 누웠다. 다시 만난 이후 항상 그가 그녀에게 해 주던 거였다.
“피곤했어?”
“…….”
이현은 해연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운 채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이 좋았다. 너무, 너무나도 그리웠던 손길에 팽팽하게 조여졌던 긴장이 느슨히 풀렸다.
그는 해연을 만난 이후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잠을 자는 척했을 뿐이었다. 사실 만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언제 다시 태어날지 모르니 숨을 죽인 상태에서도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웠다.
해연을 만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그는 진심으로 이 여자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해연이 죽지 않도록 한 행위였다고 하더라도, 그녀를 다치게 하는 건 고통스러웠다. 사실은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너무 아파서 차라리 이 세상이 끝나 버렸으면 했다.
그런데 그 고통스러웠던 행위가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걸 견딜 수 있을까.’
당신도, 나도.
이현은 늘 그렇듯, 언제나 그의 눈을 사로잡는 해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차마 손을 댈 수 없었다. 이 여자를 아프게 하는 짓을 더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 어쩌면 나는 이미 지쳤는지 모르겠다. 긴 기다림도, 오기도, 어떻게 발버둥 쳐도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당신 앞에서 모든 게 다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잠시만. 아주 잠시라도 좋으니 조금만 쉬고 싶었다.
지하에 고이 두었던 여자의 예전 몸이 사라진 것도, 갑자기 나아 버린 해연의 몸도 지금 이 순간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그저 이 꿈이 깨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의 생에서 가장 달콤했던 꿈을…….
* * *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그도 알지 못했다. 그저 어느 순간 자각했을 뿐이었다. 세계에 필요한 것 중 남은 것들이 모두 그에게 모였다. 그게 쌓여 가자 그에게도 자아가 생겼고, 형체가 생겼다. 하지만 버려진 쓰레기가 뭉쳐 생겨난 이물질을 세계가 곱게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그가 머무는 곳은 더러워졌다. 오물이 모인 곳의 주변이 더러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조금이라도 한곳에 오래 머물면 이변이 생겼다. 인간도, 식물도, 동물도, 심지어 대지와 대기까지도.
세상은 그런 그를 한곳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세계는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였지만, 그는 그 무자비한 처우를 받아들이는 것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꽤 오랜 시간 떠돌아다녔을 때였다. 세계는 또 변덕스러워졌다.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대지의 위치를 바꾸고 기후를 변화시켰다. 세계의 변덕에는 필요한 힘이 많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공들여 만들었던 생명체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갔다.
혼돈이 멈추고 하늘에 다시 빛이 찾아왔을 때, 세계는 쓰고 남은 힘을 그에게 버렸다.
아파, 아프다. 이번엔 너무 큰 것이 와서 몸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어딘가에 멈춰서 몸을 웅크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고통을 참고 또 참으며 견뎠다.
세계는 한곳에 오래 머무는 그를 다른 곳으로 몰아치려고 했지만, 한계에 달한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 낮과 밤이 몇 번이고 교차하고 계절이 바뀌어도 그는 계속 그 자리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가 한자리에 오래 머물자, 동물은 세계가 의도하고 만들지 않은 이상한 형태로 변했고, 숲은 늪지가 되었다. 인간은 선뜻 들어올 수 없는 음산한 공간이 그의 주변을 감쌌다.
겨우 사물을 인식할 수 있게 됐을 무렵이었다. 가까이에서 큰 울림이 들렸다. 인위적인 소리였다. 인간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인간. 인간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통증으로 일그러진 시야로 주변을 돌아보니 그가 멈춰선 곳 근처에 인가가 있었다.
인간이 왜 여기에?
주변을 돌아보자 그로 인해 변했던 공간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둔탁한 무언가를 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울려 대는 공기가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다른 곳으로 가자. 인간이 없는 곳으로.
그러려고 했다. 인간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보지 않았더라면.
높게 쌓은 단 위에 흰옷을 입은 깡마른 아이가 단정하게 앉아 있었고, 제단을 둘러싸고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은 이들의 춤사위가 이어졌다. 가죽으로 만든 거대한 북이 거친 마찰음과 함께 웅웅-거리며 대기를 울렸다.
웅―
북이 한번 울릴 때마다 하늘의 색이 달라진다. 파랗던 하늘이 점차 황금빛으로 물들다가 이제는 붉은빛이 서서히 퍼져 나갔다. 환하게 비추던 해가 점점 사라지면서 사위가 어두워졌다.
생전 처음 보는 장관이 두려워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의 부모는 소란스럽게 우는 아이 때문에 혹여라도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황급히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저 달과 해가 합쳐지는 자연 현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는 그의 눈에는 무지한 인간들의 짓거리들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그는 단 위에 홀로 있는 아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간간이 봐 왔던 것이라 그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인신 공양.
인간들은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고 저지르곤 했다. 신에게 어린아이의 생생한 피와 육체를 바쳐 자신들을 더욱 보살펴 주길 바랐다. 그런다고 신이 인간의 사정을 봐줄 리가 없는데. 오히려 무고한 피를 볼수록 신은 더욱 냉담해질 뿐이었다.
인신 공양의 제물로 추정되는 아이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깊게 침잠한 눈으로 고요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래의 시끄러운 제의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하지만 침착해 보이는 아이의 눈동자에 옅은 습기가 맺혀 있는 게 보였다.
그래서였다. 이 우스꽝스러운 인간들의 행위를 그저 스쳐 지나가지 못한 이유가.
잠시 후, 해가 완전히 달에 가려졌다. 검은 하늘에 고리가 생기자 제단 아래에 있던 인간이 횃불을 들고 단 위로 올라갔다. 아이는 저를 죽이기 위해 다가오는 인간마저 보지 않았다. 그저 먼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 앞에 그가 있다는 걸 모른 채. 그는 하염없이 아이의 눈을 바라봤다.
처음이었다.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진 것은.
하지만 느긋하게 지켜볼 시간이 없었다. 높게 든 날카로운 칼이 아이의 살에 파고드는 순간, 아이의 입술에 흐릿한 웃음이 맺혔다. 어린아이가 보일 웃음이 아니었다. 처량하고 슬픈, 모든 걸 포기한 아릿한 웃음에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직였다. 인간의 참담한 순간을 본 게 이번만은 아니었다. 인신 공양도 마찬가지였다. 수없이 많이 본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 아이에게만은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가 움직이자 거대한 굉음과 함께 검었던 세상이 온통 백색으로 변했다. 거대한 굉음 뒤로 끔찍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간들이 정성껏 쌓아 올린 제단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제단이 움푹 패여 있었고, 그 주변에서 춤을 추던 인간들은 붉은 고깃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널려 있었다.
아아아아악!
섬뜩한 비명 소리와 함께 아이의 몸에 칼을 박았던 인간의 목이 잘린 채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런데도 인간은 살아 있었고, 끔찍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목이 움직일 때마다 비명 소리도 더 처참해졌다. 살려 달라고, 구해 달라고 비는 끔찍한 소리는 머리의 움직임이 멈춰지자 끝이 났다. 죽은 것이다.
기괴한 장면에 도망치고 있던 인간들도 그 자리에서 멈춘 채 아무런 말도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소름 끼쳤던 비명 소리마저 그치니 사방은 무거운 침묵만 감돌았다.
그는 그가 선사한 충격을 가장 가까이에서 받아 의식을 잃은 아이를 품에 안고 높은 곳에서 인간들을 내려 봤다. 그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인간들은 허공에 홀로 떠 있는 아이를 보고 신이 내려왔다고 외쳤다. 그는 제단 주변에서 무릎을 꿇고 바닥에 완전히 엎드려 기도하는 인간들을 마저 죽일까 하다 아이의 몸에서 나는 피 냄새에 숨을 훅 들이켰다.
숨이라고?
그는 그제야 자신에게 형체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인간과 살이 닿은 것도 처음이었다. 따뜻하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상쾌한 바람이 그를 향해 부는 것 같았다. 아이가 닿은 팔과 가슴의 통증이 사라지고 있었다.
‘……하.’
아이의 피 냄새를 맡는 순간, 본능적으로 알았다. 왜 이 아이만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는지도. 이 아이는 자신의 것이었다. 오직 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 그에게 내려 준 ‘약’이었다.
제 품에 안긴 아이는 온몸이 전체적으로 얇았다. 살점이라고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영양 상태가 형편없었다.
짧게 쓰고 버릴 거니까 최소한으로만 살려 둔 건가.
그는 자신이 부신 제단을 바라봤다. 쓸데없는 짓이라 여긴 인신 공양은 그를 깨우기 위해 세상이 벌인 짓이리라. 세상은 자신이 만든 것을 대체로 자애롭게 어루만졌지만, 목적을 위해서라면 더없이 잔인해졌다. 인간의 잔인한 성정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의 쓰임처럼, 이 아이의 쓰임도 그 잔인함이 낳은 배설물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이 희열로 변했다. 이 아이도 저와 같아서. 쓰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 외엔 결코 다른 용도가 없는 자신과. 어찌할 수 없는 소유욕이 그를 사로잡았다. 육신은 빨리 이것을 먹어 독을 정화시키라고 재촉했지만, 어떻게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아이를 먹으면 처음 가진 ‘내 것’이 사라지는데…….
아이를 향한 강렬한 소유욕은 그를 이렇게 만든 존재에 대한 반발심과 섞였다.
그는 아이의 몸에 생긴 상처를 살폈다. 칼이 들어가는 순간 구해 냈던 탓에 다행히 상처는 깊지 않았다. 그는 아이를 천천히 바닥으로 내렸다. 허공을 타고 천천히 내려오는 아이를 인간들은 차마 가까이 가지 못했다.
경고의 의미로 바닥에 누운 아이의 주변으로 벼락을 쳤다. 하늘이 움직이고 땅이 깊게 파였지만, 아이만 멀쩡했다. 인간들은 아이를 향해 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