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의 아내-55화 (55/113)

55화.

시신이 갑자기 사라짐과 동시에 여자의 다리가 나았다. 이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시신에 청혈의 기운이 남아 있었던 걸까. 그래서 갇혀 있던 몸을 벗어나 새로 태어난 육체로 옮겨 온 것인가…….

‘이게 당신을 가졌다는 오만한 말에 대한 당신의 대답인가.’

그곳에 가는 게 아니었다. 그냥 해연만 바라보며 영원히 묻어 두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이현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사이 빗줄기가 약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꽤 오래 내릴 줄 알았는데 소나기였나 봐요.”

아까는 조금 무서울 정도였는데 이젠 괜찮다며 해연이 빗줄기를 바라보자 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그런데 왜 우산도 안 쓰고 왔어요? 안 추워요? 빨리 씻으러 가요.”

“……네.”

이현은 제 눈가에 흐르는 물기를 조심조심 닦는 해연의 손길을 얌전히 받으며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배는, 고프지 않아요?”

“아니요. 안 고파요. 왜요? 지금 배고파요? 그래도 씻고 먹는 게…….”

“나는 괜찮아요. 당신이 ‘식사’를 했으면 좋겠어요. 아니, ‘식사’를 해야 해요.”

이현은 해연을 덥썩 안아 들고 방으로 향했다. 해연은 그의 어깨에 매달린 채 배가 안 고프다고 주장했지만, 일단 같이 씻자는 이현의 말에 금방 수긍했다.

마른 원목 바닥이 그가 걸을 때마다 투명한 물기를 남겼다가 푸스스 검은 연기가 되어 바닥에 번져 나갔다.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을 지켜보던, 더 정확히는 한해연을 주시하던 사람들은 실내에 뭉근하게 퍼지는 연기에 닿지 않기 위해 황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그건 안주희도 마찬가지였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바닥을 스멀거리던 연기가 수많은 가닥으로 분리돼 그들을 향해 빠른 속도로 뻗어 나왔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눈을 깜박거리기도 모자랄 시간에 별채에 있던 일족이 쓰러졌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던 일족의 몸을 검은 연기가 뱀처럼 똬리를 말고 꽉 조였다. 그리고 입을 쩍 벌리고 머리부터 삼켜 나갔다. 그 속에서 안주희만 홀로 멀쩡히 서 있었다. 그녀는 비명을 내뱉지 않기 위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를 내면 일족을 공격한 연기가 그녀에게도 향할 것 같아서.

양껏 식사를 한 검은 연기가 가닥으로 나뉘었던 몸을 합쳤다. 그리고 스르륵 바닥을 기어가다 안주희의 얼굴을 향해 몸을 일으켰다. 바다의 거친 해일처럼 천장까지 올라온 연기는 안주희를 가만히 바라보며 몸을 움찔움찔 움직였다. 마치 잡아먹을까 말까 고민을 하는 것처럼.

안주희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춤 발을 뒤로 물렸다. 그 모습에 검은 연기의 끝이 그녀를 향해 바짝 다가왔다. 얼굴 바로 앞까지 온 검은 연기 안은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안주희는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고개를 저었다. 제발. 제발.

그때, 그녀를 향해 천천히 입을 벌리던 검은 연기가 움찔 몸을 떨더니 방향을 틀어 주인의 방을 향해 움직였다.

검은 연기가 완전히 걷히자 별채 안에 인간의 몸으로 남은 건 안주희뿐이었다. 안주희는 창백한 얼굴로 바닥을 바라봤다. 연기가 걷힌 넓은 바닥엔 고양이, 개 그리고 새 등의 갖가지 동물들이 멍하니 누워 있다가 안주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후다닥 도망갔다.

새들이 퍼덕이며 날개를 펼쳐 날아가자 바람이 그녀를 향해 몰아쳤다. 치마가 들리고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흩어졌다. 손을 들어 눈을 가리는데 그녀의 발 옆으로 네발짐승들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안주희는 그들을 피해 몸을 휘청이다 구석으로 몸을 옮겼다.

분명 저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본신의 몸으로 변한 일족은 야생동물이 낯선 인간을 만난 것처럼 도망쳤다. 본신이라고? 아니다. 그보다 훨씬 작았다. 그래, 꼭 자연에 있는 동물과 비슷한 크기로 변했다.

안주희의 몸이 벽을 타고 스르르 내려갔다. 다리가 떨려서 서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별채는 원래 조용했다. 크게 소리를 냈다간 주인의 심기를 상하게 할 수 있기에. 하지만 그래도 저들끼리 아주 작은 소리로 대화를 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젠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녀가 내는 숨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서울 정도로 깊은 적막이 그녀를 덮쳤다.

* * *

안주희를 제외한 별채에 존재하는 모든 일족의 힘을 수거한 검은 안개가 순식간에 이현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의 목울대가 마치 무언가를 먹은 것처럼 움직였다.

이현은 제 목을 안고 있는 해연의 등을 손으로 쓸었다. 그리고 등을 쓸어 올리던 손을 서서히 올려 해연의 머리에 지그시 내려놓았다. 그는 이전처럼 해연의 의식을 살필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언가에 막힌 것처럼 그의 힘이 튕겨 나갔다.

이현의 표정이 움찔 굳었다. 믿을 수가 없어 해연을 바라보자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그를 향해 눈을 깜박였다.

제발 아니길. 아니어야 한다. 이현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해연을 향해 물었다.

“정말, 배가 고프지 않아요?”

그의 목소리는 매우 낮고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멀쩡한 척하고 있지만, 속은 화염에 휩쓸린 숲처럼 검은 재만 휘날리고 있었다. 내장이 온통 뒤틀린 느낌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극단적으로 움직이는 감정이 그를 한계에 달하게 했다. 이현은 어떻게든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거칠게 휘몰아치고 있는 속을 꾹 내리눌렀다. 그의 품에는 소중한 여자가 있었다. 고작 감정에 치우쳐 제멋대로 행동하면 다치는 것은 이 여자일 터였다. 비록 이미 수도 없이 그에 의해 다치고 다친 뒤였지만, 사실 그도 힘들었다. 해연을 다치게 하는 것이. 소중하고 소중한 여자를, 그의 손으로 아프게 만드는 일이.

“왜 자꾸 물어요. 배고파요?”

“…….”

해연이 살짝 상체를 뒤로 밀고 이현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봤다. 이현의 입술이 살짝 뒤틀렸다. 그가 배고프냐고 물으면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해야 했다.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데 여자는 마치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간 듯이 스스로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렇게 피를 먹이고, 제게 종속되도록 세뇌를 했음에도. 이현은 제게서 상체를 뗀 해연을 다시 강하게 끌어안았다.

혹시라도 아직 괜찮을지 모른다고 가졌던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졌다. 청혈이, 빌어먹을 운명이 다시 해연의 몸을 차지했다. 그가 그렇게 험한 짓을 해 가면서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청혈은 이제 해연을 죽음으로 몰아갈 것이다. 지금껏 그랬듯이.

그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두려워서.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던 여자가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아서. 절박한 두려움이 해연의 온기를 느끼고 싶어서 안달했다. 그래야 이 여자가 아직 제 품에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오로지 나를 위해 태어난 사람인데 결코 원하는 대로 가질 수가 없다. 무슨 짓을 해도 자꾸만 손으로 잡을 수 없는 허상처럼 허망하게 사라졌다. 아무리 움켜쥐어도 손에 남은 것이 없었다. 이렇게 제 품에 있는데도.

그는 해연을 갖고 싶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이 여자가 더 이상 죽지 않기를 바랐다. 그의 눈앞에서 비참하게 죽는 여자의 모습은 너무도 끔찍해서, 마지막엔 항상 그를 증오하며 죽는 여자를 더 볼 자신이 없었다.

청혈이 잔혹한 수레바퀴를 움직이기 전에 손을 써야 하는데 선뜻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한발을 움직이면 정해진 운명은 그를 비웃듯 모든 것을 되돌렸기에. 또 그가 손을 쓰면 다음엔 어떻게 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떨어요? 혹시 추워서 그래요? 그러게 왜 비를 그렇게 맞고 와요.”

해연은 저를 끌어안은 이현의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빨리 욕실로 가자고 종용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면 나아질 거라는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에 이현은 저도 모르게 해연을 안은 채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럴 때가 아닌데. 무슨 수를 써서든 이 여자를 다시 제게 종속시켜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여자의 말에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저를 걱정해 주는 말이 달아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똑. 똑똑.

욕실에 가득 찬 습기가 물방울이 되어 떨어지는 소리가 단조롭게 울렸다. 따뜻한 물이 찬 욕조에 그와 함께 들어온 해연은 얌전히 제 손길을 받고 있는 이현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의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까부터 그랬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거센 비를 그대로 맞으며 왔을까. 우리는 계속 괜찮았는데…….

정말 괜찮았나? 해연은 가만히 생각했다. 괜찮았던 것 같기도 했지만, 또 이게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상해.’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지만, 이상했다. 모든 것이 이질적이었다. 해연의 정신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해연의 다리에 머물렀던 기운이 조금씩 위로 올라오고 있던 탓이었다. 하지만 이현을 자극하지 않도록 숨을 죽였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반짝 빛이 나던 의식이 다시 가라앉자 그녀의 모든 감정은 다시 이현을 향했다. 어두운 표정을 한 그가 신경 쓰였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손, 계속 움직여 줘요.”

이현이 움직임을 멈춘 해연의 손길을 재촉했다. 해연은 다시 그의 머리를 문질렀다. 검은 머리카락이 하얀 거품으로 뒤덮여 그녀가 만지는 대로 이리저리 형태가 변했다. 해연은 이현의 머리카락을 전부 뒤로 넘긴 뒤 그의 콧잔등에 거품 한 덩이를 툭 올렸다. 이현이 뭐냐고 한쪽 눈썹을 위로 들썩였다.

그 모습에 해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현이 왜 심통이 났을까.”

“……!”

“얼마나 예쁜 얼굴인데 아깝게…….”

해연의 입에서 절대 나오지 말아야 할 말이, 그의 기억 아주 깊숙한 곳에 소중하게 품었던 다정한 말이 흘러나오자 이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제 얼굴을 쓰다듬는 여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왜, 당신이…….

“착한 우리 현이.”

해연이 완전히 굳어 버린 이현의 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이현의 얼굴이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으로 변했다.

동그랗게 뜨인 검은 눈동자에 눅눅한 습기가 맺혔다. 이현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것처럼 계속 해연의 얼굴을 넋 놓고 바라봤다. 꿈을 꾸는 것 같아서 아주 작은 소리도 내지 못했다. 소리뿐 아니라, 눈이라도 한번 깜박하는 순간 이 꿈이 아주 얇은 유리처럼 깨어질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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