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먹고 싶다. 먹고 싶었다. 딱 한입만 먹을 수 있다면…….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한해연을 잡아먹는 상상만 했을 뿐인데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안주희는 공연히 제 목을 손으로 더듬었다. 저 야들야들한 피부에 입이라도 대는 순간 맛을 보기도 전에 주인에 의해 목이 날아갈 것이다. 식욕은 공포감 아래 물에 씻기듯 사라졌다. 아무리 한해연이 먹고 싶더라도 식욕 한 번에 정신을 놓기에는 자신의 생명이 훨씬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주인의 여자라 하더라도 인간 옆에서 시중을 들며 달라붙는 이유도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하는 몸부림이 아니던가.
주희는 숨을 참고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저에게도 이렇게 맡아질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였다. 그녀의 불안대로 별채에 있던 일족들의 시선이 한해연에게 향해 있었다. 하지만 자신처럼 강하게 느껴지지는 않는지 코를 킁킁거리며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대체 이 냄새가 뭘까? 갑자기 왜 이 여자에게서 이런 냄새가 나는 거지? 그때 그녀의 뇌리에 윤시후가 했던 말이 스쳤다.
‘근데 저 여자 냄새가 정말 좋지 않아?’
‘……뭐?’
‘어떻게 먹지 않고 살려 둘 수가 있지?’
영문을 알 수 없던, 뜬금없던 시후의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시후는 처음부터 한해연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던 거였다. 그래서 유별나도록 한해연에게 관심을 가지던 거였다.
‘이것도 힘의 차이인가…….’
그녀는 불쑥 튀어나온 시기와 질투를 꾹 내리눌렀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한해연을 보호할 수 있도록 슬며시 위치를 바꿨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한해연에게서 나는 냄새가 너무도 강렬해서 주인이 오기 전까지 이성이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해연은 계속되는 주희의 이상한 행동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앞을 막고 있던 사람이 사라졌으니 이제 움직여도 되리라.
이현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항상 내 곁에 있어 준다더니. 두렵지 않게 해 준다더니.
해연은 앞으로 향하던 발을 우뚝 멈췄다. 이현이 없다.
‘그래, 그가 없다. 이현이.’
……저를 잡아 놓은 괴물이.
‘그가 없으니 여기서 나가도 되지 않을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갑작스레 찾아온 강렬한 충동에 머리끝이 쭈뼛 섰다. 가야 한다. 지금. 지금이었다.
해연이 뛰었다. 차가운 기온에 얼어붙어 있는 잔디가 발을 상처 입혀도 뛰었다.
“안 돼!”
안주희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지만, 해연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가야 해.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괴물에게서. 자신을 죽일 괴물에게서 도망쳐야 한다. 부지불식간 튀어나온 다급한 비명만이 그녀의 머리를 지배했다.
해연이 뛰는 순간, 그녀의 몸에서 달콤한 냄새가 확, 하고 퍼졌다. 이게 무슨 냄새인가 의아해하던 일족들의 눈마저 뒤집혔다. 그들은 안주희의 몸을 밀치고 해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안주희는 그들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한해연에게서 나는 냄새에 자신을 통제하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해연이 아무리 빠르게 뛴다 한들, 신체 능력부터 다른 일족의 속도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이 해연의 몸을 잡기 직전, 이번엔 벼락이 내리꽂는 것처럼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 맑았던 하늘이 짙은 회색빛 구름으로 가득 찼다. 우르릉. 구름이 움직이며 내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쉽게 그칠 비가 아니었다.
해연에게 달려들었던 일족들이 비명을 지르며 비를 비해 별채로 도망쳤다. 끝내 식욕을 이기지 못해 해연에 몸에 달라붙어 있던 한 명은 비에 몸이 녹아내렸다. 그 난장판 속에 멀쩡한 사람은 해연뿐이었다. 그녀는 폭우처럼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젖지 않았다.
비.
저를 잡으려고 달려들던 일족들도 인지하지 못했던 해연은 비가 내리는 순간 우뚝 발을 멈췄다. 갑작스러운 오한에 해연이 몸을 흠칫 떨었다. 왜 이렇게 춥지? 그녀는 양팔로 상체를 감쌌다. 머리끝이 쭈뼛 서는 느낌은 추위라기보단 공포에 가까웠다. 누군가 쫓고 있는 듯한 위기감이 난데없이 들었다.
비가 와서 그렇다. 무섭고 두려운 비가 와서.
해연은 장벽처럼 세차게 내리는 비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 길을 헤치고 누군가가 오고 있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불안과 안도가 엉망으로 뒤섞인 알 수 없는 감정에 해연은 숨을 헐떡였다.
먼 곳에서 보였던 인영이 점점 선명해졌다. 이현이었다.
땅을 강하게 두드리는 비로 인해 뿌연 물안개가 피어났다. 이현이 그 사이를 헤치고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우산도 쓰지 않고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이현은 먼 곳에서도 해연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차갑게 굳은 눈동자에 잡히자 비가 올 때 느꼈던 것보다 더 강한 압박이 전해졌다. 해연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그가 한 걸음 다가오면 해연도 한 걸음 뒤로 갔다. 그러다 별채 툇마루의 턱에 다리가 닿아 더 이상 뒤로 갈 수가 없었다.
해연은 그 자리에서 굳어 제게 다가오는 이현을 바라봤다. 고개도, 눈동자도 그에게 고정돼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마치 거미줄에 매달린 나비처럼 제게 다가오는 포식자를 멍하니 쳐다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가 그녀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비에 젖은 남자의 머리카락은 너무 짙어져 검은 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길게 뻗은 속눈썹에 맺힌 작은 물방울마저 그를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평소보다도 더 창백한 피부는 어딘가 섬뜩했다. 그는 해연을 똑바로 보며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어디로, 가려고 했어요?”
“…….”
“왜 대답을 못 해요? 응? 어디로 가려고 했는데? 도망, 치려던 거였어요?”
항상 나른한 웃음을 짓던 남자였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해연에게만은 항상 웃었다. 그런데 그런 남자가 웃음기가 완전히 걷힌 얼굴로 차갑게 물었다. 해연은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자신이 정말 도망치려고 했다는 것도 까맣게 지운 채 이현이 자신을 오해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저……. 그래. 그에게 가려고 했었다. 제 옆에 이현이 있어야 하니까. 그런데 숨이 턱 막혀 입술을 뗄 수가 없었다.
해연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이현의 표정은 더욱 차가워졌다. 그는 시선을 내려 해연의 다리를 바라봤다. 유려한 입술이 삐뚜름히 휘었다.
“잘 걷네요. 신기할 정도로.”
아직 걷지 못하는 게 정상인데. 이현이 다소 신경질적으로 시야를 가린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머리카락이 걷히자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이 환하게 드러났다. 해연은 넋을 놓고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느꼈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걷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지금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이현, 당신은요. 꼭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무슨, 뜻이에요?”
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아까처럼 이상한 압박감은 사라진 채였다.
“너무 예뻐서요. 잘생겼어요.”
뜬금없는 찬사에 그가 탐색하는 눈으로 해연을 주시했다. 해연이 왜 그러냐며 순진하게 묻자 이현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디 가려고 했는지는 말해 주지 않을 거예요?”
그의 목소리에서도 날카로운 가시가 빠졌다. 느리게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물음에 세차게 뛰던 심장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해연은 더욱 편하게 말했다.
“당신에게 가려고 했어요.”
“……정말?”
“정말. 그런데 주희 씨가 나가지 못하게 했어요. 당신이 나가지 말라고 했다던데 맞아요?”
해연의 고자질에 이현의 시선이 뒤에 서 있는 안주희에게 잠시 닿았다가 그 주변을 돌아봤다. 침착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는 안주희를 제외하고는 모두 해연을 탐욕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잡아먹고 싶은데 차마 그에게 덤빌 수 없어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지금 해연의 몸에서 나는 단내 때문에.
주제도 모르고 감히 누굴.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훑던 이현은 다시 해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가 그랬어요. 아직 당신은 걸으면 안 되니까.”
“왜 걸으면 안 돼요?”
멀쩡한데. 해연이 그에게 다리를 움직여 보였다. 한 발 한 발 사뿐히 움직이는 하얀 다리를 이현은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해연을 들어 훌쩍 툇마루 위로 올렸다. 툇마루 위에 올라서 있는 해연은 그보다 시야가 높았다. 그 덕에 고개를 많이 내리지 않아도 해연의 다리를 살피기 충분했다. 그럼에도 그는 물이 고인 바닥에 무릎을 댔다.
“바닥이!”
“쉬이. 괜찮으니까 잠시 그대로 있어요.”
이현은 무릎까지 내려온 해연의 원피스 자락을 위로 밀어 올렸다. 밖에서 치마를 들어 올리는 이현의 행동에 해연이 잠시 당황했다가 허벅지 중간에서 행동이 멈추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해연의 허벅지를 살피는 이현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갓 붙여 선명했던 붉은 선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리고 여자의 전신에 퍼트렸던 그의 기운이 심장 주변으로 몰려 있었다. 살짝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어딘가 막힌 것처럼 옴짝달싹하지 않는다.
그는 해연의 다리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자신의 피와 살로 공들여 만든 다리는 그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완전히 잠재워 두었던 청혈의 냄새가 짙게 흐르고 있었다. 해연을 만난 중 가장 짙은 냄새였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그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제 다리를 살피는 게 이상해 보였는지 해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현은 해연의 치마를 다시 내려 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무것도.”
방을 나오기 전에 그는 해연의 의식을 잠재웠다.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아니, 그가 깨우기 전까지 의식을 차리면 안 됐다. 그런데 눈을 뜬 것도 모자라 걷기까지 했다. 다리가 모두 나은 채. 그의 살과 피를 마음껏 먹었다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현의 입술은 평상시처럼 웃고 있지만, 눈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