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진작 이럴 걸 그랬어요. 그럼 그 오랜 시간을 괴로워하지 않았을 텐데.”
당신도 나도. 그 오랜 시간동안 수도 없이 증오를 반복하고 질질 끌지 않았을 거다.
이현의 귓가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갑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죽음을 앞두고도 여자는 그를 향해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관에 누워 있는 여자의 얼굴처럼.
‘내가 죽으면, 우리 다신 만나지 말아요.’
아픈 말을 들었음에도, 그는 이런 와중에도 여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에 식욕을 느끼는 자신을 경멸했다. 그래서 숨을 막고 입을 다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상태로 귀를 세우고 여자의 마지막일 게 분명한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여자의 목소리는 점점 가늘어졌다.
‘당신이 너무 싫어. 너무 끔찍해서……이제 그만하고 싶어.’
‘…….’
차마 그러겠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절대로 그럴 수가 없으니까. 만나지 말자니.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녀가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그는 계속 사랑할 테니까. 아무리 자신을 증오하더라도 이 마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녀의 증오도 그가 감내해야 했다.
고작 두 번의 말을 끝으로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차가운 목소리마저 그에게 주지 않겠다는 듯이. 힘겹게 고개를 돌린 채 얼굴도 보여 주지 않으면서.
그는 뒷모습일지언정 여자를 끊임없이 바라봤다.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여자의 살아 있는 모습을 눈에 담고 또 담았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겪는 일임에도 이 순간은 언제나 간절하고, 간절했다.
그날 밤 여자의 숨이 멎었다. 그가 열 번째 겪는 여자의 죽음이었다. 안 그래도 끝에 와 있었는데, 그와 한 공간에 있었던 탓에 죽음은 더욱 이르게 찾아왔다. 그는 깊게 굴을 파 여자와 함께 안에 들어갔다. 다신 만나지 말자던 여자의 말과 다르게 그는 그녀와 오래오래 함께 있고 싶었다, 비록 제게 남은 게 여자의 시신뿐이라도. 여자가 다시 태어날 때까지 혼자 기다리는 건 너무 외롭고 추웠기에.
당신이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무슨 수를 써서든 여자가 죽지 않게 하겠다고, 오래오래 살아 있는 모습으로 함께할 거라고 다짐했다. 설령, 당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이현은 그때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를 향해 속삭였다.
“알아요? 당신이 내게 좋아한다는 말을 했다는 걸요.”
그렇게 혐오하더니 결국 그런 말을 했다. 해연의 고백은 그의 심장을 할퀴는 흉측한 상처와 함께 여자에게 복수했다는 저열한 희열도 남겼다. 하지만 이현은 제가 뱉은 말에 도리어 비참한 얼굴을 했다. 전혀 즐겁지도, 기쁘지도 않았기에. 그래도. 그럼에도.
“당신은 이제 내 것이 됐어요.”
비록 진심을 가진 것이 아니더라도. 이전처럼 차디찬 시신이 아닌, 살아 있는 모습으로 그에게 귀속되었다. 그의 말이 여자의 시신 위로 떨어졌을 때였다. 이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마치 그의 말을 반박이라도 하듯 여자의 시신이 녹아내렸다. 아직 그가 보내겠다고 하지 않았음에도 시간의 흐름이 여자를 관통했다.
여자의 육체가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가 어쩔 시간도 없이 가루조차 남지 않고 텅 빈 유리관만 남았다.
“…….”
굳은 얼굴로 관을 보던 이현이 휙 고개를 들었다.
해연.
이현은 이곳에 들어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다급한 얼굴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 * *
닫힌 창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투명한 무언가가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곧장 해연에게 향했다. 청량한 기운이 녹듯이 그녀에게로 파고들자 곧은 자세로 누워 있던 해연의 몸이 꿈틀거렸다.
마치 원래 있어야 할 곳에 돌아온 것처럼 전신에 스며든 청량한 기운을 따라 해연의 안을 채우고 있던 검은 안개가 조금 밀려났다가 해연의 심장에 똬리를 틀었다. 새로 들어온 것은 차마 심장을 칭칭 감은 검은 안개를 건드리지 못하고 주변을 빙빙 돌았다.
가장 중요한 거점을 선점한 검은 안개는 해연의 생명을 인질로 잡은 채 침입자를 압박했다. 처음엔 팽팽하게 맞서다 해연이 괴로운 듯 숨을 헐떡이자 둘은 각자의 위치에 자리 잡은 채 숨을 죽였다. 둘 다 몸의 주인이 다치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들썩이던 육체가 잠잠히 가라앉은 뒤, 해연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해연은 누운 채로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잠을 오래 잔 기분이었다. 아니, 이 순간마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이상해.
이상하게 느낄 만한 부분이 하나도 없음에도 모든 것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 모두가 거짓인 것처럼.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 이게 꿈이라면, 좋은 꿈일까 아니면 나쁜 꿈일까.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저 이현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해연은 그를 찾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하지만 그가 보이지 않았다. 이 넓은 방 안에 그녀 혼자였다.
안 되는데. 그가 없으면…….
해연은 그에게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아니, 몸 전체에 힘이 없었다. 전신이 나른하고 머리는 몽롱했다. 해연은 고개를 돌려 제 다리를 바라봤다. 허벅지에 선명한 붉은 금이 그어져 있긴 해도 다리는 멀쩡히 달려 있었다. 그런데 왜 일어설 수가 없지?
해연은 허벅지에 그어진 붉은 금을 손으로 만졌다. 그런데 이게 뭘까. 왜 이런 게 제 몸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붉은색.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기엔 섬뜩한 낙서였다. 손을 문질러 선을 지우려고 했지만, 유성펜으로 그은 건지 선은 지워지기는커녕 번지지도 않았다.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분명 이현은 아닐 거다. 이런 장난을 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해연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살짝 휘청이긴 했지만, 이번엔 설 수 있었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뗄 때마다 걸음이 익숙해졌다. 그녀의 허벅지에 있던 붉은 선이 점차 흐려졌다. 마침내 흔들리지 않고 걸을 수 있을 때쯤엔 붉은 선이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는 듯 완전히 사라졌다.
단단한 문은 손이 닿자 스르륵 밀렸다. 원래 이랬던가? 해연이 완전히 밖으로 나오자 문은 다시 닫혔다. 뭔가 이상해서 다시 문을 열려고 해 봤지만, 문은 마치 잠긴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한 번 더 밀어 봤지만, 문이 아니라 해연의 몸이 흔들렸다. 간신히 걸음에 익숙해졌던 다리가 힘이 풀려 무너지려고 할 때, 마침 그 길을 지나고 있던 주희가 성큼 다가와 해연을 부축했다.
“언제 일어나셨어요? 부르시지 그러셨어요.”
해연은 제게 말을 거는 주희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주변을 돌아봤다. 별채에 묘하게 사람이 늘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는 드문드문 지나다니는 사람이 보였다면, 지금은 어딜 봐도 사람이 보였다. 해연이 주변을 둘러보자 주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아니요. 오늘 사람이 많은 것 같아서요. 무슨 일이 있나요?”
“어머, 평소와 똑같은걸요.”
“원래 이렇게 사람이 많았어요?”
“별채가 워낙 넓어서 관리하는데 인력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그렇게 말을 한 주희가 작게 웃었다.
“아마 항상 이현 님 때문에 정신이 없으셔서 모르셨을 거예요.”
해연의 얼굴이 붉어지자 주희의 웃음은 조금 더 짙어졌다.
“이현은…….”
그 사람은 어디 있어요? 해연이 제 허리를 잡은 주희의 손길을 떼어 내고 물었다. 꽤 강하게 잡았는데도 쉽게 뿌리쳐진 손에 주희는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근처에 계세요. 조금 뒤에 곧 돌아오실 테니 다시…… 해연 님?”
“갈래요. 그 사람이 있는 곳에.”
“하지만 해연 님은 여기서 나가시면 안 되는걸요.”
“……네?”
“이현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셔서요.”
어쩔 수 없다며 주희가 양해를 구했다. 말과 표정은 상냥했지만, 해연의 앞을 막고 비키지 않았다.
이현이 나가지 말라고 했다고? 해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말 들은 적 없어요.”
해연의 말에 주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해연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딛자 주희는 그런 해연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팔을 양옆으로 넓게 벌려 해연이 그녀를 지나칠 수 없게 했다.
“정말 나가시면 안 돼요. 이현 님은 곧 돌아오실 테니 제발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주희의 목소리가 간절했다. 해연은 주희의 머리를 빤히 바라보다 시선을 내렸다. 머리에는 뾰족한 동물의 귀가 보이고 풍성한 치마 뒤로는 치마보다 더 풍성한 꼬리가 위로 바짝 서 있었다. 저게 왜 안주희의 뒤에 있는 거지? 해연은 손을 뻗어 꼬리를 손으로 잡았다. 풍성한 털이 손을 감싸자 기분이 묘했다. 꼭, 진짜 털처럼…….
그때 주희의 몸이 바짝 튀었다.
“흣!”
“…….”
곱고 단정하던 주희의 얼굴이 주둥이가 긴 여우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쪽빛의 고운 한복을 입은 가냘픈 여자 몸 위에 커다란 여우의 얼굴이 달린 기괴한 모습에 놀라 해연은 저도 모르게 꼬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러자 다시 주희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주희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여우가…….”
“무슨, 말씀이신지.”
주희는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얼굴 가득 번진 경계심에 해연은 의아했지만, 그냥 사과했다. 이런 걸로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그녀에겐 이현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은 ‘사소한’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제가 잘못 봤나 봐요. 죄송해요.”
“……역시 안으로 들어가시는 게 좋겠어요.”
몸이 안 좋아서 헛것을 본 것 같다며 주희가 해연의 팔을 잡았을 때였다. 주희가 짧은 비명과 함께 해연에게서 팔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해연에게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게 무슨 냄새지? 주희는 손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순간 이를 드러낼 뻔했다. 한해연의 몸에서 냄새가 났다. 달콤하고 맛있는 냄새가. 어떻게 지금까지 맡지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로 강렬한 냄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