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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아내-52화 (52/113)

52화.

“아니요. 당신이 가고 싶으면 난 어디든 좋아요.”

“……가요, 우리. 멀리는 가지 못하지만, 그래도 비슷하게 만들어 줄 수는 있으니까.”

이현은 해연의 어깨에서 얼굴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욕실에서 나와 그의 눈에 가장 예뻐 보이는 옷을 해연에게 입혔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장이라도 어딘가로 떠날 듯이 완벽한 외출복을 갖췄다.

얌전히 그가 하는 대로 따르던 해연이 이현을 향해 물었다.

“지금 가는 거예요?”

“네. 잠깐 눈을 감아 봐요.”

이현의 요구에 해연은 의아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언제 눈 떠도 돼요?”

“조금만요. 조금 뒤에 도착할 테니까 그때까지만 감고 있어요.”

그의 몸에서 검고 검은 안개가 흘러나왔다. 바닥에 먼저 깔린 안개는 벽을 타고 기어올라 그들의 공간을 온통 검게 칠했다.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새까만 공간은 그들조차 삼켜 버렸다.

잠시 후, 허공에 점점이 작은 불빛들이 생겨났다. 불빛들은 해연과 이현의 주변으로 번지듯 퍼져 나갔다. 반딧불 같기도 했고,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 같기도 했다. 어둠이 깊고 깊어서 빛은 더욱 아름다웠다. 마치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이 여자처럼.

“이제 눈 떠도 돼요. 아니, 떠 주세요.”

“아…….”

드디어 눈을 뜬 해연은 시야에 보이는 찬란한 빛에 놀란 얼굴을 했다. 그녀의 고개가 움직이는 빛을 따라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얼굴 가득 고인 순수한 감탄에 이현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요?”

“네, 정말 예뻐요.”

“여행 오길 잘했죠?”

“네.”

방에서 움직이지도 않았음에도 눈앞의 환경이 바뀌었지만, 그녀는 여행이라는 이현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해연은 자신을 향해 내려오는 불빛을 손바닥 위로 받았다. 잠시 손 위에서 통통 튕기며 움직이던 불빛은 다시 허공으로 떠올라 그녀의 주변을 돌았다. 하나였던 불빛이 두세 개로 늘어나더니 점점 부피가 커졌다. 동그랗던 구체가 폭발하듯 번쩍 큰 빛을 내더니 해연의 앞에 긴 장막처럼 펼쳐졌다.

해연은 넋을 놓고 그 장면을 바라보다 이현을 돌아봤다. 감탄과 기쁨이 섞인 찬란한 표정에 이현이 드디어 웃었다. 기뻤다. 여자의 웃음이. 아까처럼 아픈 것도 상관하지 않고 그를 향해 다리를 벌리던 참혹한 모습보다 이 순수한 표정이 좋았다.

빛의 장막은 마치 길을 안내하듯 그들을 감싸고 겹겹이 펼쳐졌다. 이현은 해연과 손을 잡고 그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해연은 정신없이 주변을 돌아봤다. 수많은 색의 빛이 그녀의 하얀 얼굴에 번졌다. 이현은 계속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 어떤 것보다도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빛이었기 때문에.

해연의 시선은 그가 아닌 빛으로 가득한 허공을 향해 있었다. 그걸 만든 게 그였음에도 이현은 그녀가 빛을 탐하는 것 같아 초조해졌다. 그 빛조차도 어둠을 일그러트려 만든,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도.

그는 해연의 눈에 손을 얹어 가리려고 했다가 무의미한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너무 감정적으로 굴고 있었다. 이현은 대신 해연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부드러운 머릿결이 사락사락 움직였다. 이현은 반듯한 이마를 부드럽게 만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당신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 놓을 걸 그랬어요.”

어떻게 살았는지. 좋아하는 게 뭔지. 마음이 너무 조급해서 지금의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시간도 없이 집어삼켰다. 그러다 보니 그가 아는 건 모두 그에 의해 조작된 한해연이었다. 조금 더 천천히 다가갔더라면 좋았을걸. 그랬더라면 이렇게 함께 있어도 혼자 남은 것 같은 기분은 덜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그가 혼자인 것에 익숙해서 견딜 만했다. 최소한 여자는 숨을 쉬고 있고, 피부가 따뜻하고, 그를 향해 말을 할 수 있었기에.

이현의 손길이 간지러웠는지 해연이 살짝 몸을 떨며 웃었다. 이현도 웃었다. 항상 이렇게 웃게 하고 싶었다. 나와 함께 있으면 불행하다는 말을 모르도록. 언제까지고 영원히. 가능한 그 혼자만 불행하고 싶었다. 그게 이 지옥에서 그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이었다.

긴 여행은 무리였다. 아무리 해연의 몸에 그의 살과 피로 만든 다리를 만들었더라도 근본적으로 극과 극의 성향이었기 때문에. 그가 곁에서 보호하고 있었지만, 해연은 독으로 가든 찬 공간에 무방비하게 서 있는 것과 같았다. 해연의 몸에 무리가 없을 정도의 시간만 보낸 뒤 이현은 다시 힘을 풀어 원래의 공간으로 되돌렸다.

정말 여행을 하고 온 것처럼 해연은 피로감이 가득한 얼굴로 잠들었다. 이현은 한참을 바라보고 나서야 그녀가 있는 공간에서 벗어났다.

더 시간을 끌면 ……를 보내 주려고 했던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기에.

* * *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안주희는 근래 이상해진 주인과 한해연의 모습에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하던 한해연은 주인이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 웃기만 했고, 주인은 평소 같은 얼굴을 했지만 굉장히 예민해져 있었다. 두 사람 주변을 떠도는 칼날 같은 공기에 안주희를 비롯한 별채에 있는 일족들 모두가 말을 아꼈다.

드문드문 주인의 표정이 이상한 적이 있었긴 해도 한해연에 대해선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주인의 감정은 오히려 지금이 더 선명했다. 소중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한해연의 모든 것을 챙겼다. 하지만 그건 절대 한해연에게 좋은 방향은 아니었다.

물론 그녀는 한해연이 어떻게 되든 별로 상관없었다. 한해연에게 잘하는 이유는 그녀가 주인의 여자이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만약 한해연이 주인의 여자가 아니었더라면 당장 눈앞에서 죽어 간다고 하더라도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주인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가 한해연뿐이었다. 그러니 한해연은 무사해야 했다.

그때 주인이 방에서 나왔다. 항상 함께하던 한해연은 두고 나온 건지 혼자였다. 안주희는 주인에게 가까이 가지 않고 조심스럽게 상황을 살피다 눈을 크게 떴다. 주인의 몸이 중심을 잃고 살짝 휘청였던 탓이다. 뒤에 서 있던 안주희가 황급히 달려가 그의 허리를 잡았다.

“이현 님?!”

“조용히.”

“…….”

주인의 눈이 한번 깜박이더니 언제 휘청였냐는 듯이 중심을 찾았다. 그는 아직 제 허리를 잡고 있는 안주희의 손을 밀어냈다. 주희가 어색한 얼굴로 허공에 뜬 손을 등 뒤로 숨겼다.

“괜찮으신지 해서.”

“쓸데없는 말을 하는군요.”

“죄송합니다…….”

무생물을 보는 듯한 시선은 한해연이 없을 때면 늘 그랬기에 익숙했다. 도리어 한해연과 함께할 때의 주인의 행동과 말투, 목소리, 눈빛이 더 어색했다. 안주희는 등 뒤에 숨긴 손을 가볍게 움직였다. 휘청거리는 주인을 보고 놀라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런 쓸데없는 행동을 하고도 손을 움직일 수 있다니.

하지만.

아주 잠시라고 해도 주인이 몸을 휘청였다. 왜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위협이 될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닌 주인이 왜?

설마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안주희는 점점 멀어지는 주인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 * *

별채의 가장 깊은 곳. 이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드나들 수 없는 지하는 매우 깊었다. 그저 평범한 벽에 불과했던 곳에 그의 손이 닿자 한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이 생겼다. 이현은 아주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해연을 만나기 전까지 죽은 듯이 잠만 잤던 곳이었다. 자신의 힘의 절반을 놓고 왔던 탓에 계단 아랫부분은 검은 연기로 일렁였다. 만약 누군가가 우연의 우연으로 지하를 발견한다 하더라도 들어오는 즉시 검은 연기가 침입자를 통째로 집어삼킬 것이다. 그가 계단을 완전히 내려오자 뱀처럼 스르르 움직이던 검은 연기가 제 주인의 몸에 휘감겼다.

오랜만에 주인의 몸으로 들어온 힘은 불완전해진 육체가 맘에 안 들었는지 이현의 몸을 복구해 나갔다. 엉망이었던 목덜미와 어깨가 금세 속까지 완전히 말끔해졌다. 부족한 피도 채워졌다. 그제야 흐렸던 이현의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검은 연기가 사라지자 문이 생겼다. 이현은 그 문을 열지 않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그녀를 보면 무슨 감정이 들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분명 이제 보내 주자 생각하고 왔는데 고작 문 하나 열지 못하고 주저하는 꼴이라니.

차라리 잊은 채 그대로 둘까. 아무리 새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여자의 몸인데. 제게 남겨진 소중한 것인데 왜 보내야 하지?

여자가 다시 태어날 때까지 품에 꽁꽁 싸매고 누가 훔쳐 갈까, 혹시라도 사라질까 안절부절못하며 지켰던 몸이었다. 고작 시체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여자가 존재했다는 증거였기에.

항상 이랬다. 무엇을 결정하더라도 이 여자와 관련된 일에는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다. 이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천근같이 무거운 손을 들었다. 그러고도 몇 번이나 주저하다 결국 손을 문에 댔다.

넓은 공동 한가운데 놓인 투명한 유리관이 나타났다. 이현은 천천히 걸어가 관 안에 잠든 것처럼 누운 여자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렇게 망설였던 것에 비해 그의 얼굴은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죽어서 내 곁을 떠나겠다더니 시체도 부족해 새로 태어난 영혼마저 제게 잡혔다.

“결국 당신 뜻대로 된 게 하나도 없네요.”

안타깝게도.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현의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그는 시릴 정도로 차가운 유리의 표면을 손으로 쓸며 관 안에 누운 여자의 얼굴을 집요하게 바라봤다. 지금의 한해연과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죽었음에도 그에게 단 한 톨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차디찬 얼굴. 지겹도록 눈에 새긴 얼굴이 이 순간엔 낯설게만 느껴졌다.

보내 줘야 하는 시간이 와서 그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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