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아니요. 그대로 두세요. 괜히 건드리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될 테니까.”
이유영은 한해연과 가장 가까운 인간이었다. 섣불리 건드렸다가 쓸데없는 부스럼을 만들 수 있다. 하물며 이유영이 아무리 거슬리는 짓을 한다고 한들, 그에게 닿지는 못한다.
이현이 그저 지켜만 보라고 말하자 남자는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가 묻어 나오는 소리에 이현은 픽 웃었다. 감시 겸 경호를 하라고 뒀더니 쓸데없는 감정이 생긴 모양이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감정이 섞이면 이유영의 경호에 더 신경을 쓸 테니까.
-……이유영의 집은 말씀하신 대로 이쪽에서 잡아 놨습니다. 건물 주인과는 아직 나가지 않는 것으로 말을 맞춰 놓은 상태입니다.
“잡종은?”
-……한해연 님의 집을 침입했던 잡종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윤시후가 그저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테니 아마도 잡종 역시 꽤 크게 당했을 겁니다. 지금은 몸을 추스르는 시간이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계속 지켜보세요. 분명 다시 나타날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이현은 통화가 끊긴 전화를 탁자에 내려놨다.
잡종은 윤시후를 향해 한해연의 이름을 제대로 불렀다고 했다. 그저 우연이 아닌, 한해연을 목표로 한 침입이었다. 잡종 따위가 한해연의 냄새를 맡는다라. 상처가 나서 피 냄새가 번졌다면 이해를 한다지만, 그가 붙어 있는 동안 그런 일은 없었다.
윤시후가 한해연의 냄새를 맡은 건 이해할 수 있다. 성인이 되지 못한 새끼는 예민한 법이니까. 본능적으로 청혈의 냄새를 맡고 호감을 사려고 노력하는 것도 모두 납득할 수 있지만, 잡종이 한해연의 냄새를 맡은 건 이현으로서도 의아한 부분이었다.
‘어쩌면.’
힘이 제어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청혈을 먹지 않고 버티고 있으니 이제 고장 날 때가 됐을 테니까. 그는 고개를 돌려 침대에 바른 자세로 누워 있는 해연을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에게 먹히기 위해 태어난 존재. 그게 청혈로 태어난 여자의 운명이었다.
처음 보자마자 알았다. 여자를 먹어야 한다는 걸. 그래야 제게 쌓인 독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세상에 오롯이 혼자여야 하는 제게 나타난 오직 단 하나뿐인 제 것이어서.
어떻게 먹을 수가 있겠어. 먹어 버리면 다시 태어나기는커녕 존재 자체가 소멸해 버릴 텐데. 그럼 자신은 영원히 혼자가 될 텐데…….
이현의 입술이 둥글게 휘었다. 뭐든 상관없었다. 이 여자만 제 품에 있으면 다른 어떤 것은 어떻게 되든 괜찮았다. 해소되지 못한 독이 쌓여 온몸이 녹아내린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어려운 건 오로지 여자를 소유할 수 있는 방법뿐이었다. 그가 무슨 행동을 하든 상관없이 피식자인 청혈은 포식자인 그를 증오하고 두려워하기만 했다.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그렇게 각인된 것처럼. 그가 먹지 않고 어떻게든 붙잡아 사랑을 갈구하면 그걸 끔찍해하며 홀로 죽어 갔다. 그걸, 수십 번 반복하고 난 뒤에야 알게 됐다. 우리는 결코 이어질 수 없다는 걸. 세상에서 가장 정결하게 태어난 여자는 온갖 더러운 게 뭉쳐진 그를 혐오할 수밖에 없다는 걸.
차라리 조금만 덜 사랑스러웠다면, 조금만 덜 애틋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이렇게 그 오랜 시간을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당신도. 나도…….
남자의 손이 여자의 부드러운 젖가슴을 강하게 쥐었다. 제 손안에서 제멋대로 뭉개지는 살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온 붉은 유두가 유혹적이었다. 가만히 내려다보던 이현은 이내 손을 떼어 냈다.
여자를 기다리는 동안 깨어 있는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더 많았던 이현은 해연이 잠든 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까지도 깨어 있었다. 간혹 해연이 눈을 떠 그를 찾을 때마다 괜찮다고 속삭이며 손을 잡아 주었다. 누군가를 안심시켜 준 적도, 자신보다 타인을 우선시해 본 것도 이 여자뿐이었다.
이현은 자신의 손을 생명줄처럼 잡은 작은 손을 가만히 바라봤다. 여자의 가는 손가락은 매끄럽고 마디마디의 굴곡조차 사랑스러웠다. 부드러운 안쪽 살은 아주 작은 수많은 주름이 간지러워 몇 번을 반복해 만지고 또 만졌다.
곧고 가지런한 손가락 중에 끝이 살짝 구부러진 새끼손가락은 여자의 연약함 속에 숨어 있는 고집스러움을 연상시켰다. 툭 튀어나온 뼈마디를 계속 쓰다듬으니 해연이 불편하다는 듯 옅은 신음을 흘렸다.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는 뜻이리라.
“으응…….”
작게 오물거리는 입술이 그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이현은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고 누웠다. 해연은 그제야 안도했다는 듯 가는 한숨을 쉬며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부드러운 살결. 조금이라도 세게 쥐면 부스러질 것 같은 얇은 뼈대. 그의 품에 완전히 들어오는 작은 몸을 끌어안고 있으니 심장이 바짝 조여졌다.
이현은 해연의 냄새가 가득 밴 그의 공간에서 나른한 숨을 뱉어 냈다.
계속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제 품에서만 살게 할까. 이제 한 번만 더 손을 쓰면 한해연은 완벽한 백치가 되어 제가 무슨 짓을 해도 예쁘게 웃기만 할 것이다. 하지만…….
‘좋아해요.’
이현은 눈을 감았다 천천히 떴다. 여자의 수줍은 고백이, 어리석은 충동이 계속 그를 들쑤셨다. 너무나도 바라고 또 바라온 말이어서.
이렇게 만들어진 말이 아닌, 진심을 가지는 건 불가능한 일인데. 아는데……. 그래서 잊기로 했음에도 이미 화상처럼 남은 목소리가 계속 그를 향해 속삭였다.
“내가 정말 미쳐 가고 있나 봐요.”
계속 병신 같은 생각을 하는 걸 보면.
‘아쉽다. 당신하고 같이 비 구경하는 거 좋았는데.’
‘이제 나랑 봐요.’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계속.’
그가 내린 비를 함께 보며 여자가 했던 말. 제가 무슨 짓을 당한 줄도 모르고 그를 안쓰럽게 보며 말했다.
“거짓말쟁이.”
내 곁에 있으면 모두 불행해진다는 말, 그거 당신이 한 말인데. 하지만 그래도 기뻤어. 정신 나간 것처럼 웃을 수밖에 없었어. 그 순간만큼은 행복, 했으니까.
“당신이 정말 날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요. 사랑, 같은 거. 응?”
이현이 해연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속삭였다. 메마른 겨울바람처럼 헛헛한 소망이었다. 말해 봤자 제 속만 할퀴고 상처를 입히는 바람. 다시는 좋아한다는 말을 못 하도록 막아 놓고서도 또 듣고 싶었다. 믿지도 못할 그 말을.
‘좋아해요.’
다시금 제 귀에 속살거리는 목소리에 이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환청이다. 단 한 번 들은, 각인처럼 새겨진 음성. 지금만이라도, 자신 역시 그렇다고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입술을 간신히 열어 내뱉은 말은 ‘그럴 리가 없어요.’라는 부정이었다.
나는 오물 덩어리니까. 세상이 토해 낸 쓸모없는 것들이 뭉쳐 생긴, 겉보기만 그럴싸한 쓰레기더미니까.
당신도 혐오했었던, 그런 더러운 거니까…….
그러니 거짓일지라도 당신의 말에 차마 긍정할 수가 없다.
이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씁쓸한 웃음과 함께 천천히 떴다.
그렇게 많이 겪어 놓고 또 미련한 생각을 하다니. 여자는 너무도 가냘프고, 약해서 그를 끊임없이 나약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현은 알고 있었다. 매번 멍청했다고, 얄팍한 희망 따위 품지 말라고 세뇌해도 계속 똑같은 짓을 반복하리란 것을.
그의 손이 부드러운 여자의 가슴을 지나쳐 허리를 쓸었다. 살아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따뜻한 살. 피가 흐르며 요동치는 심장. 지금까지 그가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차디찬 그녀의 시신뿐이었다. 여자는 심장이 멎어 딱딱하게 굳은 몸만을 그에게 주었다.
‘시체.’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이현은 여자의 목덜미를 잘근 깨물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애지중지해 놓고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니. 그래, 그것도 이제는 처리해야지. 여자는 다시 태어나 제게 왔으니 이전의 몸은 이제 시간의 흐름에 흘려보내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전에 마무리할 것이 있다. 이현은 평온한 숨을 내쉬고 있는 여자를 깨웠다. 이제 ‘식사’를 할 시간이었다. 배가 차야 새로 만든 육체가 단단하게 여물 테니까.
품에 안고 있던 여자의 숨이 불규칙해지자 이현이 그녀의 허리를 안고 몸을 돌려 제 몸 위에 올렸다. 평온하게 잠겨 있던 여자의 눈이 천천히 열렸다. 흐릿한 갈색 동공이 점점 선명해졌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요?”
“……이현.”
“그리고?”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사람.”
“맞아요. 잘 기억하고 있네요.”
해연은 어지럽다는 듯 눈을 살짝 찌푸렸다. 고작 몇 마디 했을 뿐인데 벌써 기력이 다한 모양이었다. 헌 육체를 잘라 내고 새로 만들었으니 그럴 수밖에.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배는 안 고파요?”
“……고파요.”
마침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해연이 살짝 얼굴을 붉히자 이현은 그럴 줄 알았다며 자신의 손가락을 이로 깨물었다. 크게 벌어진 살점 사이로 검붉은 피가 뭉글거리며 흘러나왔다. 그는 제 손가락을 해연의 입술 사이로 집어넣었다.
“빨아요.”
배가 고프면 식사를 해야 하는데 피를 빨라니. 이러지 말라고 그의 손을 밀어내려던 찰나, 입에 밀어 넣은 손가락에서 뚝 떨어진 피가 타액과 섞여 목구멍 안으로 넘어갔다. 해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달아.
너무, 달았다. 사람의 피가.
해연은 넋을 놓고 이현의 손가락을 빨았다. 그가 손을 치우지 못하도록 양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은 채 피가 나오는 상처에 혀를 문질렀다. 상처가 벌어져야 더 많은 피가 나올 테니까.
이러면 안 되는데, 그의 피가 너무 달아서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맛있어요?”
이현의 물음에 해연은 그의 손가락을 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의 무엇을 준다 해도 이것만큼 맛있는 게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손가락은 금방 피가 멎었다. 해연이 그의 손가락을 입에서 빼고 혀로 길게 핥으며 안달하자, 이현은 입 안쪽 내피를 깨물어 상처를 낸 뒤 해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여자의 달콤한 입속을 파고든 혀를 통해 피가 흘러 들어갔다. 여자는 자신이 삼키고 있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가 주는 것을 달게 받아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