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한 잔 더 줄까요?”
“……네.”
콜록. 해연이 마른기침을 한번 내뱉고 맥없이 대답하자 이현이 안쓰러움과 만족감이 뒤섞인 묘한 얼굴을 했다. 그는 빈 잔에 다시 물을 채운 뒤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이래서 자극하지 말라고 경고한 건데.”
안 그래도 오래 참은 사람을 온몸으로 야하게 보채는데 안 돌고 배기냐고 이현은 양심도 없이 그녀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가슴을 비비고 야한 냄새를 풍겼죠. 응?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거였어요?”
“…….”
“괜찮아요. 나도 계속 참느라 힘들어했거든요. 축축하게 물을 흘리면서 맛있게 빨아 주는 곳에 들어가고 싶다고 계속 좆이 울어 대서.”
그의 말이 점점 수위가 높아지고 있었지만, 해연은 살짝 볼을 붉힐 뿐 그에게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의 말이 꼭 아직도 부족하다는 뜻으로 들려 빈 컵을 옆으로 치우고 다시 침대에 누워 그를 향해 다리를 벌렸다. 긴 시간 혹사당해 뻣뻣하게 굳어 경련하고 있는 다리가 아플 게 분명한데도 해연은 힘든 자세를 유지하며 얌전히 그를 기다렸다.
그 모습에 짓궂게 웃고 있던 이현의 표정이 움찔 굳었다.
“뭐, 하는 거예요?”
“……부족한 거 같아서요.”
“내가 언제 내 좆 사정 생각해 달라고 했어요.”
이현은 굳은 얼굴로 해연의 벌어진 다리를 가지런히 모았다. 해연은 순식간에 싸늘해진 남자의 얼굴이 당혹스러운 듯 그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뭐 잘못했어요?”
순진한 얼굴.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전혀 모른다는 듯이 묻는다. 이현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굳은 얼굴로 눈도 깜박이지 않고 해연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는 한참 뒤에야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아니요. 당신은 하나도 잘못하지 않았어요. 하나도…….”
잘못은 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이현은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쓸었다. 미친 새끼. 지금의 해연을 상대로 말장난을 하려고 하다니. 자신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믿고 순종하도록 만들어 놓고 그걸 잊어버렸다. 멍청하게.
연애 놀음은 이미 끝났다. 그렇게 만든 건 자신이었다. 그러니 얼빠진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제가 넋을 놓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면 이 여자는 제 몸이 어떤지도 상관없이 그가 하자는 대로 행동할 테니까.
정말 안 할 거냐고 묻는 여자에게 농담이었다고,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대답한 뒤 그는 해연의 매끄러운 어깨에 얼굴을 묻어 표정을 숨겼다. 지금 기분으로는 웃는 얼굴은커녕 여자를 겁먹게 할 표정만 보일 것 같아서였다.
이현은 해연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뒤엉킨 속을 차분히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입술을 위로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지금은 어떻게 해도 웃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얼굴을 여자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당장 여자의 몸을 살펴야 한다. 긴 섹스의 후유증이겠지만, 다리가 뻣뻣하게 굳어 경련하던 것이 어딘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국 웃는 얼굴을 만드는 걸 포기하고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해연을 향해 속삭였다.
“잠시만, 눈 감고 있어 줘요.”
“……네.”
우습게도 해연의 순종적인 대답은 그의 기분을 더욱 가라앉혔다. 그럴 자격도 없는 주제에. 달콤한 꿈이 끝나기 무섭게 화염이 들끓고 있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자신이 만든 지옥이어서, 누굴 원망할 자격조차 없다는 게 그를 더 미치게 했다.
해연이 눈을 감고도 한참 뒤에서야 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해연의 다리를 살폈다. 하얗고 유려했던 가는 다리는 그의 손자국과 물고 빨았던 자국이 합쳐져 마치 학대라도 당한 것처럼 얼룩덜룩했다. 원래의 피부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예전이었다면 그는 분명 여자의 몸에 남은 제 흔적을 보고 만족감을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만족감은커녕 쓰디쓴 후회만 남았다. 해연의 몸을 생각하지 않은 채 얼간이처럼 정신을 놓았다는 증거였기에.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현은 핏물이 흘러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어 소리를 삼켰다. 제겐 이런 웃음조차 낼 자격이 없었으므로.
깊게 가라앉은 얼굴로 해연의 다리를 살피던 그의 눈에 허벅지에 생긴 미세한 금이 보였다. 이현은 깊은 탄식을 흘렸다. 새로 만들었던 육체가 벌써 망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징조가 보인 이상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리라.
아닐 거라고, 그저 지나친 섹스의 후유증일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여자의 다리에 새겨진 미세한 선은 부정할 수 없는 증거였다.
‘이렇게 빨리…….’
일 년은 족히 버티리라 생각했다. 이현은 얼마 전 해연의 심장이 한 번 멈췄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것도 예상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마치 그가 원하는 대로 이 여자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상황은 자꾸 그가 만든 것과는 반대로 흘러갔다.
‘누구 마음대로?’
어떻게 가진 건데.
이현은 고개를 들어 그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고 있는 해연의 얼굴을 바라봤다. 정말, 진심으로 해연을 다시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다리를 새것으로 교체하려면 아프게 해야만 했다. 이것보다 더 튼튼히 만들려면 아마도 이번엔 더 아프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여기서 망설이면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게 분명했기에.
‘당신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어.’
부지불식간 짓쳐들어온 여자의 목소리에 이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 내리는 기분이었다. 여자가 뱉었던 불행이라는 단어는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그의 심장을 찢고 그 안에 차곡히 쌓였다. 여자가 다시 태어나길 기다리는 시간 동안 너덜너덜해진 심장은 얼기설기 기워졌지만, 안에 박힌 날카로운 가시도 여전히 함께였다. 멀쩡한 척해 보려 해도 이미 한 몸이 되어 버린 가시는 끊임없이 그를 찔렀다.
망각이라는 은총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본디 그런 존재였기에. 그저 끊임없이 상처를 되새기고 되새기다 결국 미쳐버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 그랬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번엔 반드시 이 여자를 손에 넣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흔들리던 이현의 눈동자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저를 증오하던 여자의 목소리가 이번에는 미몽을 끊어 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잠깐 꿈을 꾸는 거예요. 많이 아프겠지만, 악몽은 금방 깨니까. 거기서 날 기다려 줘요.”
내가 곧 갈게요. 이현이 해연의 감은 눈 위로 손바닥을 대고 속삭였다. 해연은 아무것도 모른 채 옅은 미소를 지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현이 이를 드러내며 차게 웃었다.
‘나와 함께 있어서 불행하다면, 그게 끔찍하게 싫다면, 불행하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게 해 줄게요. 지금처럼.’
이현의 전신에서 검은 안개가 흘러나왔다. 안개는 바닥부터 차오르더니 금세 방 전체를 메웠다. 그리고 이내 해연의 의식 깊숙이 숨어 있는,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장소로 변했다.
* * *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와 함께 아늑한 공간에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인데, 눈을 뜨기 무섭게 상황이 급변했다.
‘잠깐 꿈을 꾸는 거예요. 많이 아프겠지만, 악몽은 금방 깨니까. 거기서 날 기다려 줘요.’
악몽. 그는 분명 이 모든 상황이 악몽이라고 했다. 해연은 그 말 하나를 믿고 그가 저를 구하러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래야 했으니까. 그가 한 말이니 자신은 믿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 악몽이 몇 번이고 반복되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그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해연은 진작 정신을 놓았을 것이다. 그만큼 악몽은 생생했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해연은 피비린내가 잔뜩 밴 좁은 방에서 홀로 몸을 떨었다. 검고 검은 방은 축축한 습기를 머금고 있어 섬뜩함을 더했다. 그녀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등을 벽에 기댄 채 숨을 삼켰다.
같은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고 나니 이제 비가 오면 다음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있었다.
얼어붙은 시선이 맞은편에 있는 철문에 닿았다. 창문조차 없는 방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저 문뿐이었지만, 그녀는 저 문밖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었다.
저 문이 열리면, 그게 나타나겠지. 검은 짐승. 제 몸을 갈가리 뜯어 먹을 짐승이 있을 것이다.
수없이 반복된 상황이 그녀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똑같은 고통을 느끼고 똑같이 죽은 뒤 또 같은 곳에서 눈을 뜰 것이다. 꿈이니까. 그의 말대로 악몽이기 때문에 해연의 의지로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공포를 동반한 무력감만이 해연을 짓눌렀다.
끼이익―
부식된 철이 마찰하며 내는 소리가 소름 끼친다. 해연은 숨도 못 쉬고 천천히 열리는 문을 바라봤다. 차라리 멎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제발, 제발. 이번엔 아니길. 괴물이 들어오기 전에, 자신을 잡아먹기 전에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다. 이게 ‘악몽’이란 걸 알면서도.
해연은 황급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문에 서 있는 짐승을 보고 싶지 않았다. 무서워. 그녀는 몸을 웅크린 채로 덜덜 떨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짐승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긴 침묵 뒤에야 해연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인 것은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거대한 짐승이 아니었다. 자신을 해치던 짐승이 아니라, ‘그’가 서 있었다. 해연의 눈이 커졌다. 그다, 그가 왔다. 이제 안전하다. 아무것도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눈이 마주치자 다정하게 웃는 그를 향해 기어갔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서, 몸에 힘이 없어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가 와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문가에 선 채로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연은 절반도 가지 못한 채로 바닥에 쓰러져 그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안 돼. 못 가. 제발, 당신이 와서 날 구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