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회사 다니는 동안 친하게 지냈으면서 안부도 몰라?”
“네, 모르는데요?”
유영은 계속되는 사장의 질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마음 같아서는 들어갈 회사가 테이림이니까 연락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쏴 주고 싶었지만,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직 확정된 사항도 아니라 더 그랬다.
사장은 유영을 한동안 말없이 내려다보더니 기분 나쁜 얼굴로 발을 돌렸다. 그런 사장의 뒷모습을 보며 유영은 혀를 삐죽 내밀고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지가 행동만 똑바로 했으면 그 엉덩이 무거운 해연 언니가 여길 나갈 생각이나 했겠냐고. 사람 귀한 줄 모르니 이 꼴이 된 거지. 자업자득, 인과응보였다.
퇴사 날에 사장의 아쉬운 소리까지 듣고 났더니 속이 다 후련했다.
‘그래도 언니한테 조심하라고 연락해야지. 분명 사장이 전화해서 구질구질하게 굴 게 뻔해.’
하지만 그것도 연락이 돼야 할 수 있는 거였다.
“왜 연락이 안 되지…….”
벌써 일주일째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전화를 해 봤지만, 발신음만 들릴 뿐 받을 기미가 없었다. 유영은 핸드폰 끝을 턱에 대고 생각에 잠겼다.
강이현이라는 남자.
대체 어떻게 만난 걸까. 해연을 챙기는 건 잠시 본 저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같은 여자인 제게 해연의 시선이 머물면 그조차도 못 견디는 것처럼 안달하는 모습이 보기 좋은 반면, 과한 집착처럼 느껴져 어딘가 꺼림칙했다. 도움을 받아 놓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좀 그랬지만, 그냥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 남자의 집에 머물 거라던 해연이 일주일이나 연락이 되지 않으니 불길한 감정은 더 심해져 갔다.
해연이 잘해 준다고는 했지만, 남 앞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사람의 속마음은 속이려고만 한다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한번 마음을 주면 웬만해서는 의심을 하지 않게 되니까.
혈육이 없는 제게 친언니 같은 해연이 누군가를 만나는 게 좋았지만, 못된 사람을 만나 고생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도 됐다. 물론 제가 걱정한다고 해도 막상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아, 애인이라는 사람 전화번호라도 받아 놓을걸…….”
하지만 그럴 구실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짐을 다 옮기기가 무섭게 헤어졌으니까. 이렇게 오래 연락이 되지 않을 거라는 것도 몰랐고.
나쁜 사람은 아니겠지. 유영은 이 걱정이 그저 기우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하필 어제 뉴스에서 동거 중인 여자친구를 살해한 남자가 잡혔다는 걸 봐서 그런지 마음이 섬뜩했다.
“아니야, 나쁜 생각 하지 말자. 괜히 부정 타.”
이상한 짓을 하기에는 제게까지 증거를 남겨 놓은 상태였다. 만약 무슨 짓을 벌일 작정이었다면 제게 얼굴을 보이지 않았을 거다.
유영은 끊임없이 좋은 쪽으로 사고를 돌렸다.
“그래, 몸이 안 좋다고 했잖아. 나 때문에 아픈 와중에 나와서 신경 쓰느라 다시 아픈 걸 수도 있어.”
이것도 걱정이 되긴 마찬가지지만, 조금 전까지 생각하던 불길한 상상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럴 거다. 그래야 한다.
그나저나 회사는 어쩌지? 이진아 피디에게 연락해 보겠다고 말했는데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게 아닐까 싶었다.
“아니, 지금 회사가 뭐가 중요해. 언니가 괜찮은 게 우선이지.”
회사는 그냥 회사일 뿐이다. 해연이 테이림에 입사하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다른 회사를 못 갈 사람도 아닌데 연락도 안 되는 상황에 회사 걱정을 하는 건 너무 나간 거였다. 유영은 초조한 얼굴로 거실을 서성이다 손에 쥔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이진아 피디에게 연락을 해 볼까?
‘아니야. 이젠 내가 나설 상황은 아니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괜히 혼자 설쳤다가 언니랑 말이 엇갈릴 수도 있으니까…….’
* * *
메일을 주겠다던 날부터 열흘. 한해연에게는 아직도 회신이 없다. 인사팀에서 전화를 해 봤지만, 그도 받지 않는다고 한다.
이진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괴물에게 조금만 있으면 된다고 시간을 끄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괴물이 오래 참아 줄 리가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이곳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한해연과의 끈이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내가 죽…….
‘이유영!’
그래, 이유영이 있다. 한해연과 각별한 사이이자, 곧 이곳에 입사할 사람. 이진아는 서둘러 일정을 확인했다.
내일. 내일이구나, 이유영의 입사가.
이진아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런 제 행동이 끔찍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살고 싶어서 다른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스스로가 괴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사냥하고 잡아먹는 괴물을 보면서 언제 자신도 저 꼴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든다. 괴물이 오지 않으면 안도하고, 또다시 절망하는 하루하루에 진저리가 처진다.
지금껏 살아왔던 삶이 마치 슬로우 비디오처럼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고작 열두 살이었다. 엄마와 아빠, 오빠를 모두 이 괴물에게 잃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살고자 비굴하게 괴물이 시키는 대로 하고 살았다. 괴물이 남긴 시체를 처음 처리했던 것이 열다섯 살. 돌이켜보니 어린 나이였다. 그때부터 시체를 유기했는데 용케 들키지 않았다.
미제 살인 사건이 방영될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것도 어느 순간부터는 무뎌졌다.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괴물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같은 괴물이 되었다. 심지어 이제는 새로운 사냥감을 괴물에게 직접 바치기까지 해야 한다. 그건 마지막까지 인간으로 남고자 했던 이진아, 자신에게 큰 타격을 줬다.
이렇게까지 해 가며 살아남아야겠냐고. 이렇게 비참한 인생을 살아야 할 정도로 가치 있는 삶이냐고 심장이 피를 토하며 절규했다. 그런데도 살고 싶었다. 비굴하게. 비참하게. 살아남았다.
차라리 가족이 모두 죽었을 때 자신도 죽었어야 했다. 그럼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지 않았을 텐데. 한해연도 모자라 이유영까지 끌어들이려는 자신이 끔찍했다.
‘아니야, 나는 피해자야. 어쩔 수 없었어. 내가 살려면, 그러려면 이럴 수밖에 없어. 모두 한해연 때문이잖아. 한해연이 진작 죽었다면 이유영까지 끌어들일 리가 없었으니까. 맞아. 모두, 모두 한해연이 잘못한 거야. 그렇게, 혼자 행복한 얼굴을 하니까……. 그러니까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거야. 나는 아무 잘못 없어.’
그래, 모든 건 한해연이 빨리 죽지 않아서 생긴 일이다. 그러니, 한해연만 죽으면 모든 건 다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거친 숨을 헐떡거리던 이진아는 한결 차분해진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챕터 5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이현이 눈이 마주칠 때마다 몸을 겹쳐 와서 해연은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렸다.
밖에선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약했던 빗줄기는 점차 두꺼워졌고, 세상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거대한 벼락과 귀가 멀 것 같은 천둥이 와르륵 쏟아졌다. 당장이라도 제가 있는 곳까지 치달아 모든 걸 망가트릴 것처럼 가깝고 위협적이었다.
그렇기에 해연은 안전한 남자에게 더 매달렸다. 다른 무엇이 그녀를 위협하고 두렵게 하더라도 이 남자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니까.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빗소리도, 벼락도, 천둥도 모두 들리지 않았다.
‘기억하지 마. 다 잊어버려요. 당신은 나만 생각하면 되니까.’
섹스를 하는 내내 그가 가장 많이 한 말이었다. 끊임없이 그녀의 귀에 속삭이던 남자의 목소리가 귀를 타고 들어와 해연의 머리를 지배했다.
마침내 머릿속에 남자의 말 외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유영이도, 회사도, 모두 잊혀졌다.
해연이 자신만 생각하라는 그의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현이 그녀의 어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좋아요. 이제 내가 나쁜 짓을 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나쁜 짓? 그가 언제 나쁜 짓을 했지? 그는 항상 자신을 가장 먼저 생각해 줬다. 언제나 상냥했고, 또 다정했다. 그의 곁에 있지 않으면 힘들어질 정도로.
해연은 남자에게서 잠깐 벗어났을 때를 생각하며 몸을 떨었다. 무서웠다. 왜 무서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서웠다. 제멋대로 그의 품을 벗어난 대가처럼. 누군가가 자신을 해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이현의 품에 안기자 사라졌다. 그래, 그러니까 자신은 그의 곁에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모든 것이 완벽해지니까. 안전하니까…….
행복했다. 그의 품 안에 있는 게. 그와 함께 하는 쾌감도 좋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물이 흘렀다. 아마도, 너무 행복해서 나는 눈물이리라.
해연이 웃는 얼굴로 조용히 눈물을 흘리자 남자는 깊어진 눈으로 그녀를 한동안 바라봤다.
“왜 그래요?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아니요. 그냥, 행복해서요.”
이 순간이 너무 벅차서. 그래서 그래요. 해연의 조근조근한 목소리에 남자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물을 혀로 핥았다.
그와 함께 잠시 멈췄던 허리를 퍽, 추켜올렸다.
“아아!”
마치 휴식은 이제 끝이라는 듯 남자가 다시 격렬히 움직이자 그의 얼굴을 만지고 있던 해연의 손이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손톱 끝이 살갗을 파고들어 붉은 자국을 만들고 있었지만, 남자는 그 통증조차 자극이 되는 것처럼 더 거칠어지기만 했다.
* * *
해연은 제 등을 덮은 남자가 허리만 살짝 움직여 결합한 성기를 빼내자 한숨을 쉬었다. 성기가 빠져나간 지금도 아래가 다물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여전히 그가 안에 있는 것만 같아 해연은 무의식중에 배에 힘을 줬다. 그러자 그녀의 몸을 덮고 있던 남자가 혀를 내찼다.
“자꾸 그렇게 엉덩이를 흔드니까 아직 부족한 것 같잖아요.”
더 할까요? 남자는 살짝 부풀어 오른 성기를 그녀의 질 입구에 문질렀다. 해연은 흠칫 몸을 떨며 신음했다.
“아, 흐읏…….”
목소리가 끔찍하게 들릴 정도로 갈라져 나왔다. 고작 몇 마디 했다고 목이 따끔거려 해연은 연신 기침을 내뱉었다. 이번엔 그녀의 상태가 정말 안 좋아 보였는지 남자는 바로 그녀의 위에서 내려왔다.
“괜찮아요?”
“……네.”
괜찮다는 대답과 달리 해연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갈라진 목뿐만 아니라 온몸이 저렸다. 계속 그를 받아들였던 하체는 뒤틀린 것처럼 뻐근했고, 그가 끈질기게 만지고 빨았던 가슴은 살갗이 까진 것처럼 아팠다. 그의 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열기가 가라앉기 무섭게 자신이 얼마나 그에게 휘둘렸는지 알게 됐다.
하지만 그를 원망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의 열기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해연은 이제 그가 하는 모든 것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게 됐다. 그녀의 의지가 이현에 의해 강제로 억눌린 상태였기 때문에.
해연의 몸이 푹 늘어지자 이현은 침대 옆에 놓인 주전자를 들어 컵에 물을 따랐다. 그리고 해연의 목을 받쳐 물을 먹였다. 해연은 긴 한숨을 내쉬며 그가 주는 물을 받아먹었다. 메말랐던 목에 수분이 들어가자 찢어질 것 같던 통증이 조금은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