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경찰까지 가고 나니 길엔 유영과 낯선 남자만 남았다. 유영은 남자의 얼굴도 못 쳐다보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그만…….”
“아니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이거.”
“네? 아!”
유영은 남자가 건넨 검은색 봉투를 얼른 받았다. 아까 장을 봐 온 건데 왜 이게 이 사람한테 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완전히 새빨개진 얼굴로 아까의 상황을 되짚던 유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넘어지면서 들고 있던 봉투를 내팽개쳤고,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남자가 대신 주워 담던 게 떠올랐던 탓이다.
‘아씨, 미쳤어, 진짜. 아주 가지가지 해라, 정말.’
“놀라셨을 텐데 괜찮으십니까?”
“네? 네! 괜찮아요. 아주 멀쩡해요.”
쪽팔린 것만 빼면.
“다행이군요. 그럼 저는 이만.”
“네! 아, 안녕히 가세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유영이 냉큼 인사하자 남자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등을 돌렸다. 유영도 집을 향해 걸었다.
‘이상하다. 이게 아닌데…….’
왜 계속 같은 곳으로 가는 것 같지? 아닐 거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런 미친 우연이 존재할 리가 없다. 하지만 같은 빌라에 도착해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같은 층에 내린 두 사람은 어색한 얼굴로 서로를 멀뚱히 보고 있었다.
“옆집 분이셨군요.”
“그러게요…….”
누가 꿈이라고 해 줬으면 좋겠다. 유영은 완전히 혼이 나간 얼굴로 삐걱거리며 해연의 집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유영이 들어간 집의 문이 완전히 잠길 때까지 지켜본 후, 조용히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 * *
다음 날 아침, 유영은 현관문에 귀를 기울이고 밖의 기척을 살핀 후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맞은편 집에서 문이 덜컹 열렸다. 유영이 화들짝 놀라 몸을 굳혔다.
망했다. 하필 지금 나올 게 뭐람.
제발 마주치지 말라고 빌고 빌며 나왔는데, 결국 마주치고 말았다. 출근하는 건지 정장을 입은 남자는 유영과 눈이 마주치자 꾸뻑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유영도 어색한 얼굴로 마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다행히 엘리베이터가 와서 어색함이 그나마 줄었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유영은 정면을 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다가 왠지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밝은 데서 보니 남자의 얼굴이 어디서 본 듯했기 때문이었다.
“저기, 혹시 저희 언제 본 적이 있…….”
“네?”
남자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유영은 자신이 착각했다고 황급히 손을 내젓고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왠지 얼굴에 홧홧한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설마 추근대는 거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하지만 정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이상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남자는 성큼 주차된 차로 향했다. 지하철까지 같이 가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유영은 꾸뻑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남자에게 덩달아 고개를 숙인 뒤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내려갔다.
* * *
“흐어엉. 진짜 왜 하필 옆집에 사냐구우.”
회사로 오는 내내 중얼거린 말이었다. 유영은 어깨를 축 내리고 터덜터덜 걸었다. 쪽팔려서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왜 언제 본 적 있냐고 물어봤을까. 그러지 말걸. 아주 쪽팔림의 마침표를 찍으세요, 정말.
유영이 고개를 흔들어 부끄럽다고 생각한 일들을 머리에서 몰아냈다. 오늘이 마지막 출근일이잖아. 드디어 이 엿 같은 회사에서 벗어나는 날인데 좋은 것만 생각하자.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회사는 여전히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유영은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폭이 컸던 걸음도 바로 얌전해졌다. 유영은 사무실을 둘러보며 조용히 제 자리로 갔다.
회사가 왜 이렇게 어수선하지?
해연 언니가 쫓겨나다시피 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팀장이었던 진규호가 사고로 죽은 이후로 회사는 뭔가 붕 뜬 분위기로 흘러가긴 했지만,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유영은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열심히 키보드를 치며 메신저를 하고 있는 옆자리의 사원에게 물었다.
“진우 씨. 회사에 무슨 일 있어요?”
제가 온 줄도 모르고 메신저에 열중하고 있던 사원은 흠칫 놀라더니 주변을 살폈다. 뭐지? 또 뭔가 있는 건가? 사원의 행동에 유영은 덩달아 조심스러워졌다.
“유영 씨, 잠깐 옥상으로 가요.”
“네?”
“빨리요. 여기서 할 말이 아니에요.”
유영은 얼결에 출근하자마자 밖으로 끌려갔다.
“네?! 몰카요?”
“쉬이!”
“세상에 미쳤어…….”
팀장이 지하철에서 몰카를 찍다가 걸려서 난리라고 한다. 그것도 하필이면 검사를 찍다가 현행범으로 걸렸다니. 유영은 너무 기가 막혀 입을 떡 벌렸다.
“팀장, 아니 그 새끼 매일 외제 차 끌고 다니잖아요. 그런데 웬 지하철이에요?”
“그건 나도 모르죠. 근데 핸드폰에 몰카 사진이 장난 아니래요. 그거 때문에 이혼 얘기도 나오고 있나 봐요.”
하필 현행범인 것도 모자라 피해자 중 하나가 검사였다. 일을 수습하기 쉽지 않으리라. 유영은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후, 더러워. 미친 새끼.”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다 왜 이 모양이죠? 하나는 음주운전으로 사고 나고, 하나는 몰카로 현행범 체포되고.”
다음엔 피디까지 문제를 일으키는 거 아니냐고 김진우가 질색했다. 끼리끼리. 초록은 동색이라고, 회사를 옮길 때마다 함께하는 사이라면 피디도 멀쩡하진 않을 거라는 추측은 그럴싸했다.
“유영 씨는 좋겠다. 오늘이 마지막 출근이잖아요. 나도 이직할 회사를 찾아야 하나……. 회사에 무슨 마가 낀 것 같아요.”
“에휴. 진짜 뭐라 할 말이 없네요.”
진짜 마가 낀 것 같다는 말이 딱이었다. 이상한 사람이 들어오더니 회사 분위기가 엉망이 됐다. 물론 그전에도 멀쩡했다고는 볼 수 없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사장이었다. 사람 보는 눈도 없고, 사람 아까운 줄도 모르고 회사의 가장 큰 주축이었던 해연 언니를 한 번 잡지도 않고 보냈다.
심지어 배신자 취급했지.
유영은 해연이 쫓겨나듯 나간 뒤 사원들이 듣는 앞에서 공공연히 해연을 욕하던 사장을 떠올리고 자업자득이라고 혀를 찼다. 이직할 준비를 하길 잘했지. 이건 하늘이 도운 수준이었다.
“진우 씨도 이직하는 게 어때요?”
“그러게요. 이 기회에 준비 좀 해야겠어요.”
“네. 야근 너무 많이 하지 말고요. 적당히 빠져나가서 이직 준비나 해요.”
“그래야죠. 저 담배 한 대만 피고 내려갈게요. 먼저 가요.”
유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다. 낮은 층수라 출근 시간대의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보다 계단을 이용하는 게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한 층계를 내려가던 유영은 뒷주머니에 넣었던 핸드폰을 꺼냈다. 해연에게 이 충격적인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또 안 받네.”
어제 너무 쪽팔려서 해연 언니와 통화해 속이라도 풀고 싶었는데, 자는 건지 받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안 받고. 유영은 입술을 삐죽였다.
하긴 성격을 생각하면 이런 뒷담화성 이야기를 들어도 별로 내키지 않아 할 것이다. 유영은 아직 통화 연결음이 나고 있는 핸드폰을 껐다. 하필 마지막 날인데 이런 일이 벌어질 건 뭐람.
하여튼 인간들 생긴 대로 논다. 회사에 들어오자마자 내부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더니 줄줄이 사고를 치고 있었다. 오늘이 지나면 여기와 영영 얽힐 일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요즘 일이 좀 많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던 유영은 문득 든 생각에 멈칫했다. 자취하던 원룸에 누가 침입하지 않나, 공식 진상인 진규호 부팀장은 음주운전으로 죽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팀장은 몰카 현행범으로 잡혔다. 게다가 해연 언니네로 가다가 엄한 사람을 두고 살려 달라고 소리 지르고 경찰차까지 오게 했지……. 물론 마지막은 제가 오해한 일이었지만, 다른 누구라도 그 상황이었다면 겁먹었을 거다.
이 모든 일이 고작 한 달도 되지 않아 벌어졌다. 물론 우연의 연속이겠지만, 안 좋은 일이 짧은 시간 동안 연달아 몰려오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당분간 몸조심 좀 해야겠다.”
“뭘 조심해요?”
“아씨, 깜짝이야!”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놀라요?”
담배 한 대 피고 내려온다던 김진우가 바로 뒤에 와 있었다. 유영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인기척 좀 내라고 통박을 줬다.
“인기척은 충분히 냈는데…….”
“더 내라구요. 어휴, 진짜 놀랐네.”
“이건 제가 억울한 일이라고요.”
“흥.”
“그런데 아까 무슨 말이었어요? 조심히 산다는 거.”
“요즘 뭔가 일이 많아서요. 괜히 신경 쓰이기도 하구.”
“에이, 별일이 있겠어요?”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잘못해서 문제가 터진 것뿐이라고, 김진우가 웃으며 일축했다. 남자들은 참 좋겠다. 저렇게 속 편하게 살아도 돼서. 유영은 더 말하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 * *
조용히. 아주 조용히 있다가 조용히 퇴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얼굴에 짜증을 잔뜩 묻힌 채 찾아온 사장으로 인해 유영의 계획은 산산조각 났다.
“크흠. 요즘 한해연이 뭐 하고 있어?”
“……네?”
“한해연이 뭐 하냐고.”
아호, 말버릇 진짜. 사장은 모든 직원에게 말을 놓았다. 모두 제 아래로 보고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부품으로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하기엔 사장의 지위가 장애물이었다.
이제 와 해연의 안부를 묻는 이유는 뻔했다. 새로 들인 사람들이 사고를 치고 있으니 내쫓다시피 한 해연이 아쉬워졌으리라. 아주 개새끼였다. 아니지. 개가 무슨 잘못이람. 저 새끼는 그냥 쓰레기야. 사람 아쉬운 줄 모르는 쓰레기.
‘니가 해연 언니를 왜 아쉬워하니? 언니는 다른 곳에서 훨씬 나은 조건으로 제발 와 주십사 모셔 가려고 안달인데. 그러게 진작 잘했어야지. 어딜 언감생심 이제 와서 지랄이야. 지랄은.’
유영은 속으로 이를 벅벅 갈았지만, 겉으론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글쎄요. 저는 모르겠는데요. 왜 그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