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괴물은 이진아가 방에 처박혀 흐느끼는 소리를 안주 삼으며 새로 꺼낸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왜 못 죽였냐고? 그 말을 들은 순간 이진아를 죽일 뻔했다. 꽁지 빠지게 도망치던 좆같은 제 모습이 떠올라서 울컥 열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슬쩍 말을 돌리자마자 다 죽은 얼굴을 하는 이진아 꼴이 우스워서 참을 수 있었다.
이진아만큼 잘 버티는 인간을 찾기는 어렵다. 그 수고를 다시 하느니 살려 두는 게 훨씬 낫다. 게다가 한해연과 끈이 이어져 있기도 하고.
‘한해연.’
괴물은 이진아가 새로 마련한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고작 집에 밴 냄새만으로도 그렇게 황홀한데 살을, 피를 집어삼키면 어떨까?
어떻긴. 죽이겠지.
한해연이라는 인간 여자의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훅하고 퍼지던 달콤한 냄새가 더 기억에 남았다. 다시금 그 강렬했던 냄새가 떠오르자 하체가 두툼하게 발기했다. 달아오른 욕망에 괴물의 시선이 문득 이진아의 방으로 향했다.
섹스는 항상 식욕을 동반하기 때문에 ‘동생’을 강간하면 분명 자신은 식욕을 참지 못할 것이다. 아직 쓸 만한 ‘동생’을 고작 이 욕망으로 소모하기에는 아깝다. 게다가 자신은 여전히 그 한해연이라는 인간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진귀한 성찬을 취하기 전에 잠시 금욕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괴물이 낄낄 웃으며 소파에 몸을 깊게 묻고 제 하체를 손으로 쓸었다.
놈들이 다 먹어 치우기 전에 가로채야 한다. 괴물은 한해연 집에 있던 일족을 떠올렸다. 인간과 피가 섞인 반쪽짜리인 자신과는 달리 완전한 일족. 풍기는 기운부터가 달랐다.
“개가 지키고 있단 말이지.”
그것도 꽤 힘이 있는 개. 괴물은 담배를 길게 빨았다. 자칫 잘못했으면 그대로 당할 뻔했다. 어린놈이 생각보다 강해서 칼로 먼저 배를 쑤시지 않았다면 죽는 건 자신이 되었으리라. 놈이 쓰러지는 것만 보고 도망쳤기에 확인 사살을 하지 못했다.
대체 그 맛있는 냄새가 나는 여자가 뭐길래 순혈이 지키고 있던 걸까. 오기가 생기는 것도 이 이유 때문이었다. 오만한 낯짝들이 일그러지는 꼴을 보고 싶었다. 높으신 분들만 진수성찬을 먹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
같은 괴물 주제에 고고한 척하는 일족이 싫었다. 누군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어?
간신히 눌러 담았던 분이 치솟는다. 괴물의 눈동자가 노란빛을 내며 번들거리자 짐승의 이가 흉측하게 튀어나왔다. 길쭉하고 날카로운 이빨을 타고 더러운 침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 어린 새끼에게 당했던 상처를 회복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그 꼴이 되고서 이진아를 찾아올 수는 없었다. 저를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로 생각하고 있는 이진아가 상처투성이가 된 제 꼴을 보면 가당치도 않은 희망을 가질 게 뻔하기 때문에. 차라리 이진아를 죽이면 죽였지, 고작 인간 따위에게 얕잡아 보일 수는 없었다.
“아주 좆같아.”
일족은 둘째치고 인간의 눈치까지 살피는 꼴이라니. 기가 막히다 못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모두 다 죽여 버릴 테다. 한해연도, 제게 상처를 입힌 어린 새끼도, 이진아까지 전부.
괴물의 고개가 이진아의 방으로 향했다. 괴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이진아의 방문을 한 번 두드렸다.
“진아야, 문 열자. 아니면 또 새로 해야 하잖아.”
“흐, 흑, 으…….”
말을 듣지 않으면 부수고 들어가겠다는 경고에 이진아가 창백하게 질린 꼴로 문을 열었다. 귀엽기도 하지. 아까처럼 건방질 때도 있지만, 이진아가 이렇게 겁먹을 때는 꽤 귀여웠다. 괴물은 피식 웃으며 너무 울어 퉁퉁 부은 이진아의 볼을 쓰다듬었다.
이진아는 제 얼굴을 쓰다듬는 괴물의 손에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색을 보였다간 자신을 죽일 것 같아서. 볼을 쓰다듬던 손이 목으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거대한 괴물의 손은 그녀의 목을 다 감싸 쥐고도 남았다. 살짝 쥐었다가 푸는 행동은 마치 죽일지 말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괴물의 주둥이가 쩍 찢어지더니 섬뜩한 이를 드러냈다. 인간을 잡아먹기 직전에 나타나던 행동에 이진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무 놀라서 끊임없이 흐르던 눈물도 뚝 멈췄다. 설마, 설마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건가? 왜, 왜, 갑자기?
길게 뻗어 나온 손톱이 이진아의 볼을 주욱 그었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새빨간 피가 흘렀지만, 이진아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괴물이 그런 이진아를 보며 그르륵 목을 울리며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살려 줄까?”
“네, 네, 제발, 흐으…….”
“오빠 말 잘 들을 거야?”
“그, 그럴, 그럴게요.”
“정말?”
“네. 네, 야, 약속할…….”
“이번만이다? 다음엔 건방지게 말대꾸하면 큰일 나. 응?”
이진아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이 마음을 바꿀까 봐 겁이 났다. 살고 싶어. 살고 싶다. 죽음의 경계선에 서자마자 삶에 대한 욕구가 이렇게 거대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죽고 싶지 않아…….
비굴하게 빌면서도 그게 비굴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살아남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 꼴이 만족스러웠는지 괴물이 그녀의 볼을 손톱으로 툭툭 치고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더 정확하게는 이진아의 오빠 얼굴로.
“오빠가 지금 골치 아픈 게 있는데, 네가 좀 도와줘야겠어.”
“뭘…….”
“한해연 말이야. 네가 유인해 와라.”
“……!”
“할 거지?”
오빠가 이렇게 부탁하는데 네가 거절할 리가 없지. 괴물의 말에 이진아가 처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유영은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해연에게 연락하기로 했지만, 지금은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게다가 헤어질 때 창백하게 질려서 갔으니 일 때문에 전화를 하긴 좀 그랬다.
‘아무리 급하다고는 해도 그쪽에서 해연 언니를 놓칠 리도 없고.’
그나저나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화가 와서 놀라서 받았는데 생각보다 별 내용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되게 세심한 사람이었네.”
유영은 면접 때 봤던 이진아 피디를 떠올렸다. 자신만만하고 유쾌한 성격이라 생각했던 사람이었는데 뜻밖에 섬세한 면이 있었다. 혹시나 다른 회사에 갈까 봐 확인 전화를 했다니.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기분이 들뜨기도 했다.
괜히 놓치기 아쉬운 인재가 된 것 같았다. 아직 입사하지도 않았는데 회사에 대한 애정이 솟아났다. 매일 야근하고 새벽에 퇴근해도 사람 아쉬운 줄 모르는 지금 회사보다는 훨씬 나았다. 지금도 퇴사 일정까지 잡아 놓은 회사가 급하다고 일을 몰아주는 것만 봐도 그렇다.
예상치 못한 통화에 기분이 좋아졌던 것도 잠시뿐이었다. 유영은 조금 가파르다 느낄 정도로 높은 골목을 오르며 해연이 왜 이사를 생각하고 있었는지 이해했다.
골목이 굉장히 위험했다. 어둡고 좁았고, 지나다니는 사람이 너무 없었다.
급하게 짐을 챙겼더니 놓고 온 게 많았다. 어두워진 걸 알면서도 마트에 다녀온 게 후회됐다. 유영은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채 골목을 올랐다.
가뜩이나 높은 언덕을 빠른 걸음으로 걷다 보니 숨이 점점 가빠왔다. 양손에 짐까지 들고 있어서 더 힘들었다. 그래도 빌라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 마음을 놓았던 찰나, 맞은편에서 성인 남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내려오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도 어두운색이어서 그런지 남자는 흡사 검은 그림자처럼 보였다. 실루엣만으로도 남자는 키도 크고 덩치도 꽤 컸다. 만약 저 남자가 나쁜 의도를 생각하고 있다면 유영으로선 반항도 못 할 정도로.
마주 보며 걷고 있어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유영은 몸을 바짝 굳히며 어깨에 걸친 가방끈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 * *
“아이고, 아가씨 비명 완전 사이렌이야 사이렌. 귀 찢어지는 줄 알았어.”
“죄송합니다…….”
“잘 자고 있었는데 아주 홀딱 깼네.”
유영은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의 비명으로 동네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앞에서 투덜거리고 있는 아주머니는 무슨 일이 벌어진 줄 알고 놀라서 경찰에 신고까지 했단다.
“그래도 별일 아니라니까 다행이네. 아가씨도 밤길 위험하니까 너무 늦게 다니고 그러지 마.”
“네에…….”
“그런데 처음 보는 얼굴이네. 저기 훤칠한 총각도 그렇고. 하기야 요즘 새로 짓고 있는 빌라들이 많으니 뭐. 아무튼 난 이제 들어가요.”
“네, 들어가세요. 그, 죄송하고, 감사해요. 신고해 주셔서…….”
“아유 별것도 아닌데, 됐어. 아무 일도 아닌 게 낫지 뭐.”
아주머니는 연신 하품을 하더니 유영이 비명을 지른 곳, 바로 앞집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유영은 자신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경찰과 이야기하고 있는 남자를 힐끔 바라봤다.
엄청 큰 체격에 어두운 옷을 입고 후드까지 쓴 탓에 맞은편에서 내려오고 있는 남자를 보고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살던 집에 수상한 침입 흔적이 있었기 때문에 더 무서웠다.
거리가 완전히 가까워졌을 때, 아무렇지 않게 옆을 스쳐 가던 남자와 유영의 어깨가 살짝 스쳤다. 골목이 좁은 탓에 일어난 일이었다. 문제는 유영이 기겁을 하며 바닥에 넘어졌다는 거였다. 조용한 골목길에 커다란 비명이 거하게 울려 퍼졌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살려 달라느니 별의별 말을 다 한 것 같았다.
제 비명에 집 안에 있던 동네 주민들까지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고, 심지어 경찰까지 출동했다. 난데없이 봉변당한 남자는 혼비백산한 유영 대신 경찰에게 상황 설명을 해 주고 주민들에게 대신 사과까지 해 주었다.
‘쪽팔려…….’
하지만 언제까지 멀뚱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유영은 머뭇거리며 경찰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마침 조사가 끝나 대화가 마무리된 참이어서 경찰은 면구한 얼굴을 한 유영을 돌아봤다. 경찰은 미세한 짜증과 귀찮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기는 이분께 모두 들었습니다. 여기서 마무리할 테니 귀가하시면 됩니다.”
“……죄송합니다.”
“하여튼 여자들 요란은.”
경찰이 차에 오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가까이 있는 유영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누군 그러고 싶어서 그랬어? 순간 울컥했지만, 여기서 더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아 꾹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