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해연은 이현의 가슴에 축 늘어져 긴 숨을 내쉬었다. 이현과의 섹스는 언제나 그렇듯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이현의 손길을 따라 미친 듯이 뛰었던 심장이 조금씩 속도가 느려지더니 정상 수치에 다다랐다. 이번엔 늦지 않게 메일을 보내야 하는데. 지난번처럼 보냈다고 착각하고…….
잊고 있던 일이 떠오르자 해연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뭔데요?”
“테이림에서 메일이 온 날, 저는 바로 답장했었거든요.”
“네.”
“분명히 그랬던 기억이 있는데, 확인해 보니 안 보냈더라고요.”
아니, 정말 보냈던 게 맞긴 한 걸까. 그날은 일이 많았다. 면접을 보고, 이현과 데이트를 하고, 혼자 집에 있다가 싫었던 사람이 사고로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다음엔 이현이 돌아왔다. 많은 일이 있어 착각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메일을 썼던 기억이 너무 선명했다.
“만약 유영이랑 만났을 때, 이진아 피디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업계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을지도 몰라요.”
다행히 직접 만나 변명도 하고 사과도 해서 그나마 넘어갈 수 있었던 거였다.
“왜 그 말은 내게 안 했어요?”
“……부끄러워서요.”
벌써부터 깜박깜박하는 게 좋은 일은 아니니까. 게다가 회사와 관련된 중요한 일을 그렇게 쉽게 잊어버리는 건 더더욱 좋지 않았다.
해연이 한숨을 길게 내쉬자 이현이 그녀의 이마를 손으로 쓸었다. 서늘한 체온이 시원했다. 그 탓일까. 심란했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괜찮아요. 고작 그런 거에 마음 쓰지 말아요. 어차피 들어가지 않을 회사인데. 그렇죠?”
“……네. 맞아요.”
느른한 목소리는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해연은 한결 가벼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들어가지 않을 회사였다. 그렇다면 메일을 꼭 보낼 이유가 없었다.
집에 가면 꼭 메일을 달라던 이진아의 말이 해연의 기억에서 까무룩 사라졌다.
“착해요. 말도 잘 듣고.”
부드러운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몇 번의 짧은 키스 뒤에 물컹한 혀가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키스는 해연이 예상했던 것보다 가벼웠다. 한번 입을 맞추면 집요할 정도로 탐하던 이현이 그녀의 입안을 한번 휘젓고 겹쳤던 입술을 떼어 냈다.
“몸은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은근 튼튼한 것 같아요. 그렇게 괴롭혔는데…….”
“괴롭혔다는 자각은 있어요?”
“으음.”
아주 조금? 이현이 다시 해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겹쳐진 입술 틈으로 이현이 혀를 밀고 들어오려고 하자 해연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뒤로 뺐다. 이러다 또 불붙으면 정말 몸이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기 때문에.
남자는 너무 예쁘게 생겼고, 얼굴만으로도 그녀를 홀렸다. 그것만으로도 버티기 힘든데 나른하게 늘어지는 낮은 목소리는 그녀가 아무 생각도 못하도록 부추겼다. 그는 분명 자신의 무기를 정확히 알고 또 그걸 유용하게 활용했다. 이건 너무 불공평하다.
해연은 너무 가까이에 온 이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입술부터 눈까지 꼼꼼하게 가리자 그나마 숨이 좀 트이는 기분이었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 왜 아직도 적응하기 어려운 걸까.
“무슨……?”
“당분간 얼굴 좀 가리고 있어요.”
“왜요? 내 얼굴 좋아하잖아요.”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부드러운 입술이 움직이며 손바닥의 예민한 살을 간지럽혔다. 해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말 불공평하다. 이 남자는 얼굴을 가리고도 여자를 홀렸다.
“좋아하니까 가리라는 거예요.”
“그건 이상한 논리인데요.”
따박따박 반박을 하면서도 남자는 굳이 그녀의 손을 치우지 않았다. 재밌는 놀이라도 하는 듯 즐거운 목소리였다. 이 상황이 난처한 건 오직 그녀뿐이었다. 젖가슴이 단단해지고 아래가 젖고 있었다. 고작 귀와 손바닥만 자극받고 있을 뿐인데. 그의 얼굴에 대고 있던 손이 저릿한 감각에 슬며시 오그라들었다. 내려간 손가락에 그의 눈이 드러났다.
“아.”
장난스럽던 목소리와 다르게 이현의 눈이 정염을 담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유독 까맣게 느껴졌다. 이현은 힘없이 떨어지려는 그녀의 손 하나를 감싸 쥐고 안쪽 살을 살짝 깨물었다.
“흣!”
“내 얼굴을 더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요. 나에게 무기는 고작 얼굴이 전부라서, 당신이 보기 싫어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가 자유로운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바짝 그에게 안긴 해연은 힘이 풀린 다리 대신 그의 목을 안고 몸을 지탱했다. 단단한 가슴에 부드러운 가슴이 뭉개졌다. 맞닿은 하체로 남자의 성기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하고 또? 해연이 경악하자 이현이 그녀의 볼을 혀로 핥았다.
“이건 어쩔 수 없어요. 나는 당신과 함께 있기만 해도 발정하니까, 그게 싫다면 당신이 거부해야 해요.”
“그건,”
“그래야 해요. 아니면 난 언제 어디서라도 좆을 세울 테니까.”
여기에 들어가고 싶어서.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이 내려가 해연의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긴 손가락이 그녀의 음부를 훑었다. 해연은 진저리를 치며 등을 휘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젖으면 안 돼요.”
“아, 아흣, 잠, 또? 아, 아응!”
맨몸에 붙은 남자의 몸은 자신과 너무 달랐다. 피부가 부드럽고 매끈했지만, 저와 다르게 모든 곳이 단단했다. 그녀의 손이 이현의 허리에 감겼다. 수줍으면서도 적극적인 해연의 반응에 이현의 눈동자가 욕망으로 짙어졌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의 얼굴에 해연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며 아래로 내려앉았다.
그에게 끌어안긴 채 몸이 돌아갔다. 해연은 침대에 누워 이현의 키스를 받았다. 입술이 닿았다.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미끄러운 무언가가 파고들어 왔다. 서늘하기도 하고, 뜨겁기도 한 알 수 없는 느낌에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허리에 감았던 손에 힘이 빠져 침대로 툭 떨어졌다. 이현이 천천히 입술을 떼자 해연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머리가, 어지러워요.”
“곧 좋아질 거예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해연의 다리가 벌어졌다.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가 축축하게 젖은 습지로 파고들었다.
안이 꽉 채워지자 힘없이 축 늘어졌던 해연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몸을 시트에 비비자 부드러운 젖가슴이 출렁거렸다. 그 위에 바짝 선 붉은 유두가 남자의 손에 잡혀 비틀렸다.
“으응!”
성기를 꽉 조이는 내벽에 이현의 눈이 나른하게 풀렸다. 안으로 더 깊숙이 밀어 넣는 남자의 욕망은 망설임이 없었다.
안이 빠르게 젖었다. 살과 살 사이에 흐르는 미끈한 액체가 음탕한 소리를 냈다. 좁고 아늑한 침실 안에는 삐걱거리는 침대 스프링의 비명과 음란한 쾌락이 함께 번져 흘렀다.
감았던 눈을 뜨면 제 위를 점령한 남자가 물에 번져 보였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어서 더 흐릿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지금은 너무 어지러웠다.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속까지 울렁거렸다.
분명 침대에 누워 있는데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 해연은 간신히 팔을 들어 올려 남자의 팔을 잡았다. 남자의 팔은 단단해서 그에게 매달려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아 한 행동인데, 이상하게 진정이 되지 않는다. 그때 남자의 성기가 여자의 안을 깊숙이 찔렀다. 해연의 몸이 파득 뛰었다.
“집중, 해야죠.”
“아……!”
“더 매달려요. 그럼 괜찮아질 거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그가 속삭였다. 이상하게 그 소리를 들으니 정말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해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입술을 벌려 웃었다. 붉은 입술 사이로 새하얀 이가 살짝 드러났다. 언젠가 봤었던 것 같은 표정. 어디서 봤더라…….
“또 그러네. 집중하라니까요.”
남자는 작게 타박하며 해연의 가슴살을 약하게 깨물었다.
“아읏!”
“기억하지 마요. 다 잊어버려.”
모두 잊고 나만 생각해. 남자는 끊임없이 해연의 귀에 세뇌하듯 쏟아부었다. 해연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하면 모든 게 안전해진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챕터 4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집까지 괜찮겠습니까?”
강기욱이 비틀거리는 이진아의 팔을 잡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요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여 회사와 떨어진 식당에서 가볍게 식사하며 속을 물을 생각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과음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맥주 한두 잔 정도만 가볍게 마시며 분위기만 맞추던 이진아의 뜻밖의 행동에 놀랐지만 그래서 더욱 말릴 수가 없었다. 그저 무슨 일이 있긴 하구나. 하는 생각에 같이 장단을 맞추며 술을 마셨다. 그게 강기욱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진아는 다리에 힘을 주고 강기욱의 팔을 밀어냈다.
“……괜찮아요. 택시 타고 가면 되니까. 기욱 님도 들어가세요.”
“택시 타시는 것만 보고 가겠습니다.”
“그럼 내가 빨리 가야겠네요.”
“……혹시 무슨 일 있습니까?”
콜택시를 부르려던 강기욱은 씁쓸한 표정을 한 이진아를 보고 멈칫했다.
“아니요. 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 취하니까 기분 좋아서요.”
아무리 봐도 기분 좋아 보이지 않는데. 강기욱은 이진아를 방치했다간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 같아 재빨리 콜택시를 불렀다.
“아무리 기분 좋으셔도 집에 가서 쉬시는 게 좋습니다.”
위험하니까요. 강기욱의 말에 이진아가 피식 웃었다. 이런 거리가 위험해 봤자 제집을 들락거리는 괴물보다는 덜 위험할 것이다.
원래는 이렇게 술을 마실 생각이 아니었다. 이진아는 평소 밖에선 술을 자제했다. 취하기라도 하면 제 입에서 괴물이라든가 살인, 식육, 혹은 시체 처리 같은 헛소리를 할지 모르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한해연을 만나서 고삐가 풀려 버렸다.
한해연이 살아 있는 모습을 봤을 때의 그 충격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그건 안도감 같은 인간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모습을 본 것 같은 당혹감에 가까웠다. 표정 관리를 잘했던가? 말실수는 하지 않았나? 평범했던 한해연의 표정을 보면 큰 실수는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래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