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의 아내-38화 (38/113)

38화.

“도와주시려고 오셨다고 언니한테 아까 들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덕분에 해연이 제집에서 살기로 했거든요.”

오히려 자기가 더 고맙다는 뻔뻔한 말에 해연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유영의 눈이 의미심장한 빛을 띠었다. 해연은 괜히 헛기침하며 홧홧한 얼굴에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왜 그런 말을 하냐고 이현의 등을 가볍게 치자 그가 낮게 웃었다. 그리고 분위기를 전환하듯 차를 세워 둔 곳으로 손짓했다.

“일단 이동하죠.”

* * *

이현의 차를 타고 이동할 때만 해도 밝은 얼굴로 언제부터 사귄 거냐는 둥 끊이지 않고 수다를 떨던 유영은 점차 집과 가까워질수록 말이 사라졌다. 얼굴빛도 어두워 해연은 유영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긴장을 풀어 주려 노력했다.

아무래도 일부러 밝은 척 노력했던 것 같다. 해연만 있던 게 아니라 계속 낯선 사람들이 자리에 끼어 있어 어두운 얼굴로 있을 수 없었을 테니.

“그래도 너한테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야.”

“……저도 언니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내가 뭘 했다고.”

“많이 해 주셨죠. 집도 빌려주시고 이렇게 시간 내서 만나러 와 주시고. 언니 없었으면 막막했을 거예요.”

유영이 해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앞으로 이런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알았지”

“네.”

조금이나마 마음이 가벼워졌는지 유영이 작게 웃었다. 해연의 시선이 앞 좌석에 앉은 이현에게 닿았다. 그는 백미러로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골목으로 진입한 차가 멈춰 섰다. 좁은 길에 차가 주차되어 있어 더 들어갈 수 없던 탓이었다. 유영이 다른 길을 알려주려고 입을 열려던 찰나, 운전사가 차를 살짝 후진한 후, 오른쪽으로 돌아 다른 길을 찾았다.

“어, 이 길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신기하다는 듯한 유영의 혼잣말에 운전사는 힐끔 이현을 보고는 천천히 입을 뗐다.

“……예전에 이 근처에서 살았었습니다.”

“와, 동네 주민이었네요. 어쩐지. 이 길은 동네 주민만 아는 지름길이라 택시 기사도 헤매거든요.”

한동네에 살았다는 것에 친근감을 느낀 유영이 운전사에게 몇 마디 더 말을 걸었고 운전사는 조심스럽게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사이 차가 유영의 집 앞에 도착했다.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 차를 운전한 건장한 남자가 먼저 집 안을 들어갔다 나왔다. 아무도 없다는 소리를 듣고 유영이 안으로 들어가 빠르게 짐을 정리했다.

짐을 옮기는 일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옷가지와 신발 몇 개만 챙기면 됐다. 나머지는 어차피 해연의 집에 다 갖춰져 있기 때문이었다. 이현은 해연이 혹시라도 짐을 나눠 들까 걱정한 것인지 해연의 손을 꽉 붙잡고 제 곁에서 떨어지지 못하게 했다. 다행히 운전사가 알아서 유영을 도와주어 나설 일이 없었지만, 이현의 과보호는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해연의 집에 도착해 짐을 내려놓으니 더 할 일이 없었다. 적당히 마무리되자 이현이 유영을 바라봤다.

“사람을 시켜서 청소하게 할 테니 집 내놓는 건 따로 걱정할 필요 없어요.”

“초면에 너무 실례한 것 같아서 정말 죄송해요.”

그리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영이 허리를 푹 숙여 정식으로 인사했다. 이현은 별거 아니라고 가볍게 대답하고 해연의 손을 잡았다.

“이제 가죠.”

“이렇게 빨리요 조금만 더…….”

집에 뭐가 어디에 있는지 더 알려줘야 했다. 하지만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현이 단칼에 끊었다.

“당신도 그동안 아파서 일주일간 의식도 잃었다가 이제 막 일어난 상태잖아요. 외출은 이만하면 됐어요.”

해연이 대답할 새가 없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영이 깜짝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언니 아픈데 저 때문에 나오신 거예요 어떡해…….”

“아니, 유영아 그게 아니라.”

“이러지 말고, 빨리 가서 쉬어요!”

그렇게 떠밀리듯 쫓겨났다.

굳이 아팠다는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분명 일부러 그런 거다. 해연이 눈을 가늘게 좁혀 이현을 바라봤다.

“왜 그렇게 봐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됐잖아요.”

“안 그랬으면 해연이 날 두고 다른 사람과 잘 기세인데 어떡해요.”

가끔 드는 생각인데 그는 다른 사람이 듣는다면 오해할 만한 말을 했다.

“……제발. 누가 들으면 바람이라도 피우는 줄 알겠어요.”

“여자든 남자든 다른 사람과 자면 바람이에요.”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여기요. 이제 집으로 가요. 너무 오래 밖에 있었어요.”

그가 뒷좌석 문을 열고 해연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해연이 안으로 들어가자 이현이 그녀의 곁에 앉았다. 그리고 자켓을 벗어 해연의 어깨에 걸쳤다.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혈색이 안 좋아요. 아까부터 창백했던 거 알아요 손도 차가워졌고.”

“아…….”

그가 구체적인 증상을 지적한 순간, 해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현은 해연의 굳은 손을 부드럽게 마사지하며 열을 올렸다.

“이것 봐요. 내가 안 챙기면 쓰러질 때까지 몰랐을 거야.”

해연은 얌전히 그의 타박을 들었다. 아무래도 유영의 일도 그렇고, 마지막에 술 취한 남자의 시비로 인해 몸이 긴장한 상태였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 그 일은 말하지 않았다. 순간 말을 할까 말까 고민을 하다 안 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것까지 말하면 이현의 과보호는 더 심각한 수준이 될 것 같기 때문이었다.

이현의 체온은 조금 낮은 편이라 체온을 올려 주지는 못했지만, 긴장감을 풀어 주기에는 더없이 좋은 상대였다. 해연은 한숨을 쉬며 몸에 힘을 풀고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해야 할 일인 것 같은데요.”

덕분에 계속 같이 있을 수 있게 되었다는 뻔뻔한 그의 말이 또 고마웠다.

차 안은 히터가 세게 틀어져 있어 따뜻했다. 저도 모르게 하품을 길게 내쉬었는데 그가 낮은 목소리로 한숨 자라고 속삭였다. 달콤한 목소리. 그의 곁에선 신기할 정도로 빠르게 눈이 감겼다.

곧은 손가락이 무릎에 놓인 해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 다정한 손길과는 다르게 검은 눈동자는 살얼음이 낀 것처럼 서늘했다.

“아까 그놈은”

“적당히 손을 봤습니다.”

“잘했어요.”

운전사가 백미러로 이현과 눈을 마주치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아까 취객에게 봉변을 당할 뻔한 해연을 도운 남자가 그였다. 해연은 모르겠지만, 그녀의 곁에는 몇 명의 경호원이 붙은 상태였다. 해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이현에게 보고가 들어갔다. 감시와 보호의 경계 어딘가의 상황이었지만, 그는 이것이 당연하다 여겼다. 손 놓고 있다가 아까처럼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 대처를 못하게 되면 더 귀찮은 일이 생길 테니까.

운전사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이유영의 집에 갔을 때의 일이 걸렸던 탓이었다.

“이현 님, 아까는.”

“조용히.”

“……네.”

운전사는 백미러로 이현을 힐끔 바라봤다. 다행히 주인은 제 실수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칸막이를 올려 뒷좌석과의 공간을 차단했다.

이현은 자신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잠든 해연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었다.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여자다. 한해연은.

그럼에도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한 여자.

‘좋아해요.’

화상처럼 깊게 패인 여자의 수줍은 목소리가 떠오르자, 부드럽게 맺혔던 웃음은 천천히 식어갔다. 처음으로 후회가 들었다. 이 여자를 그냥 한해연으로 살게 하고 싶어졌다. 억지로 만들어 낸 감정이 아닌, 진심이 듣고 싶어서.

하지만 너무 늦었다. 다시 되돌리려 해도 할 수 없다. 시간을 돌리는 건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에. 이현은 긴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현아.’

다정한 목소리 뒤에는 끔찍한 증오가 뒤따랐다.

‘제발 내 인생에서 사라져 줘. 제발…….’

끔찍하고 소중한 기억. 죽어 가는 순간조차도 여자는 자신을 증오하고 배척했다. 단 한 번만.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결코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겠다던 악에 받쳤던 다짐이 왜 이리 무의미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안개처럼 흐렸던 기억에 한해연의 얼굴이 덧대어졌다. 한해연은 그에게 좋아한다고 속삭였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 하지만 이런 식으론 결코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다. 심장이 저릿하게 아팠다. 이현은 감았던 눈을 떴다. 한해연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그의 무릎을 베고 안온히 자고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난 이제 더 버틸 자신이 없거든요.”

당신이 날 떠나는걸.

다정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잔잔하고 허망했다.

* * *

“으응…….”

“깼어요”

눈을 뜨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현의 얼굴이 크게 보였다. 차에서 깜박 잠든 건 생각나는데 벌써 도착한 모양이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처음 우리 만났던 날이 생각나네요. 그때 좋았는데. 당신도 그랬죠”

해연을 안고 정원을 가로질러 걷던 이현의 시선이 정자로 향했다. 이현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해연은 아, 하는 신음과 함께 얼굴을 붉혔다. 첫 관계를 확 트인 정자에서 했다던 이현의 말이 떠오른 탓이다. 그리고 그날의 끔찍하리만큼 강렬했던 쾌감도.

그 순간 그의 말이 도화선이라도 된 듯이 몸이 훅 달아올랐다. 그에게 안겨 있느라 바짝 모아진 허벅지 가장 깊숙한 곳이 움찔거리며 애액을 뿜어냈다. 단숨에 튀어 오른 성욕으로 인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고작 이현의 말 한마디에 몸이 달았다. 해연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와 섹스를 안 한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자신이 아픈 이후 이현은 굉장히 자제했다. 아니,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가 너무 태연해서 도리어 애가 타는 건 자신이었다.

지금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유영의 일로 살짝 안 좋아졌던 몸은 잠깐 잤다고 한결 가벼워진 상태였다. 지금 상태라면 섹스를 한다고 어떻게 될 것 같지 않았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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