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의 아내-37화 (37/113)

37화.

“해연 씨”

핸드폰을 확인하던 해연이 멍하니 있자 이진아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해연은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보냈던 기억이 있든 없든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결론은 보내지 않았다는 거였고, 자신은 굉장히 무례한 짓을 한 것이다.

아니, 그게 아니어도 문제는 또 있었다. 회사에 들어가면 이현과 너무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괜찮을까.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은데…….

‘평소처럼 행동해요.’

평소처럼. 잠시 멈칫한 해연은 이진아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해요. 분명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제가 감기를 심하게 앓아서 착각했던 것 같아요. 괜찮다면, 오늘 집에 가서 바로 회신 드릴게요.”

“집에……, 가서요”

이진아의 표정이 확 굳었다. 이미 늦은 상태에서 더 시간을 끌어서 그런 걸까. 해연이 다시 한번 양해를 구했다.

“안 될까요 혹시 이미 늦은 거라면,”

“아뇨, 미안해요. 제가 잠깐 딴생각을 해서. 집에 가시면, 꼭 보내 주세요. 그런데 이제 몸은 괜찮아요”

“네. 많이 좋아졌어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작 몸이 안 좋아 보이는 것은 앞에 서 있는 이진아였다.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쓰러질 것 같은 창백한 얼굴이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아요.”

“……회사 일이 바빠서 요즘 무리했거든요. 그래도 해연 씨를 보니까 조금 기운이 솟아요.”

정말 진심이라며 이진아가 설핏 웃었다. 해연은 정말 안도한 듯한 이진아의 표정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이라면 다른 곳을 굳이 돌아볼 필요 없이 테이림에 입사해도 될 것 같았다.

‘유영이도 혼자 두기 걱정되고…….’

회사에서라도 매일 보면 그나마 안심이 될 테니까. 게다가 자신을 굉장히 좋게 보고 있는 이진아 피디와 함께라면 회사생활도 괜찮을 것 같았다.

“식사하러 오셨는데 제가 너무 오래 붙잡은 것 같아요. 그럼 다음에, 꼭 봬요. 메일도 보내 주시고요.”

“네, 이번엔 늦지 않게 꼭 보낼게요. 양해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진아가 덧붙인 강조에 해연은 살짝 달아오른 뺨을 매만졌다.

이진아와 헤어지고 서둘러 자리에 돌아오니 이미 음식이 나와 있었다. 유영은 음식에 손도 대지 않은 채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기다리고 있었어 먼저 먹지.”

“같이 먹어야죠. 그리고 음식 나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유영이 베실 웃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기색은 여전해서 안쓰러웠다. 고작 잠시 머물 집을 구했다고 해서 겁먹은 마음이 다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해연은 유영을 위로했다.

“괜찮을 거야. 응 우리 빨리 먹고 나가자.”

“네, 언니.”

애교스럽게 웃는 유영이 대견해 해연은 동그란 머리를 쓱쓱 문질렀다. 유영은 늘 그렇듯 해연의 손길에 한결 편안해진 얼굴을 했다.

“그런데 언니는 집이 아니면 어디에 있는 거예요 혹시 여행 가요”

“아니, 그게 사실은…….”

“뭔데요 무슨 일 있어요”

왠지 모를 민망함에 말을 끌었더니 유영이 대번에 심각한 얼굴을 했다. 해연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심각한 건 아니고. 사실 나 애인이 생겼어. 당분간 지낼 곳도 애인 집이고.”

“정말요!”

“응. 그래서 말인데. 조금 있다가 이현 씨 온다고 하거든. 짐 옮기는 거 도와준다고. 괜찮아”

“뭘 물어요. 당연히 저야 감사하죠. 그나저나 대체 언제 만나서 사귄 거예요”

“그, 나 퇴사하겠다고 말한 날…….”

이게 뭐라고 민망하지 해연은 훅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꾹 눌렀다. 유영이 날짜를 손가락으로 꼽아 세더니 와, 하는 감탄사를 터트렸다.

“진짜 얼마 안 됐네요. 잘생겼어요!”

“……응. 엄청…….”

“우와아.”

잘생긴 남자! 유영이가 신이 난 목소리로 요란을 떨었다.

“그럼 아까 그 차는 언니 애인 차였어요”

“으응.”

“잘생겼는데 부자이기까지 하다니. 성격은요 잘해 줘요”

“응. 정말 잘해 줘. 좋은 사람이야.”

“다행이다. 언니 완전 축하해요.”

“음식 식어. 빨리 먹자.”

“우웅, 네에.”

유영은 식사하는 내내 해연의 애인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었다. 어쩐지 갑자기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요란을 떨기도 해 해연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까처럼 안쓰러운 얼굴을 하느니 짓궂은 말을 해도 차라리 지금이 나았다. 해연은 사뭇 밝아진 유영의 표정에 안도했다.

“어쩐지 잠깐 갔다 온다더니 늦더라. 애인과 통화하느라 길어졌나 봐요.”

“아니, 그건 아닌데……. 이진아 피디를 만났어. 알지 테이림 피디.”

“정말요”

유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해연은 음료수 빨대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알고 보니 내가 메일을 회신 안 했더라고. 분명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언니가요 언니가 그럴 리가 없는데.”

유영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함께 일을 해 봤기에 더 그랬다. 해연은 일 처리를 허투루 한 적이 없었다. 일을 뒤로 미루지도 않았다. 그때그때 깔끔하게 끝내서 유영이 항상 부러워하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메일을 보내지 않았다니.

“이진아 피디님은 뭐라고 하셨어요 괜찮대요”

“응. 집에 가서 보내겠다니까 이번엔 잊지 말고 꼭 보내라고 그랬어.”

“그럼 됐죠, 뭐.”

유영이는 별문제 아니라고 가볍게 말했지만, 해연에겐 아니었다. 해연이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 진짜 미쳤나 봐.”

“에이, 뭘 미치기까지 해요. 그냥 한번 깜박한 거죠.”

게다가 첫 연애를 시작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유영이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해연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어휴, 하며 손 부채질을 하자 유영이 더 크게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는데 뜻밖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해연이 사 주겠다고 하는데도 유영이 기어코 자신의 카드를 점원에게 넘긴 것이다.

“내가 사 준다니까.”

“언니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는데 밥까지 얻어먹으면 저 불편해서 못 견뎌요. 아시잖아요, 제 성격. 이번에는 제가 계산하게 해 주세요.”

“참 나, 알았어. 맛있게 잘 먹었어, 유영아.”

계산을 마치고 나오니 거리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가게 입구에 서 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술에 취해 휘청이며 가까이 다가왔다. 해연은 유영의 어깨에 손을 감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만취한 듯 남자는 유영이 원래 서 있던 자리까지 다가오더니 기어코 어깨를 부딪쳤다.

“아!”

“아, 죄송…… 아, 시발. 지금 사람 쳤냐”

처음에는 사과하는가 싶던 남자가 유영과 해연을 슬쩍 보더니 기분 나쁘게 웃으며 시비를 걸었다. 상대가 여자라서 만만하게 보는 것 같았다. 순간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고민하던 해연의 앞을 어떤 남자가 끼어들었다.

“먼저 부딪혀 놓고 사과는 못 할망정 욕설은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아씨. 넌 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취한 남자가 성을 내려다 중간에 끼어든 남자를 올려다보고 꼬리를 내렸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어물쩍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등을 돌려 황급히 도망갔다. 그 모습을 보던 해연과 유영은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도와준 남자는 도망가는 남자가 멀리 떨어질 때까지 지켜보다 등을 돌렸다. 굉장히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남자였다. 남자는 커다란 덩치와는 다르게 순한 얼굴로 해연과 유영을 살폈다.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네,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시고요. 그럼 이만.”

남자는 해연이 무슨 말도 하기 전에 자리를 떴다. 고마워서 사례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던 차였는데 말도 꺼내기도 전에 가 버렸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망연히 남자가 사라졌던 곳을 바라보던 해연은 술 취한 남자에게 부딪혔던 어깨를 손으로 문지르는 유영을 바라봤다.

“유영아 괜찮아”

“으, 좀 아프긴 한데 그래도 일이 커지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유영과 해연이 여자였기에 중간에 도와준 사람이 없었더라면 그 취한 남자는 더 문제를 키웠을 것이다. 당한 봉변이 어처구니없고 짜증 나지만, 이렇게 짧게 끝난 것만으로도 다행이긴 했다.

다행이긴 한데…….

“열 받아.”

“진짜요. 아, 이럴 때는 여자라서 짜증 나요.”

길거리에서 봉변을 당해도 뭐라고 대응하기보단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하게 된다. 특히 어릴 때부터 고아로 살아왔던 두 사람은 그 마음이 특히 더했다. 보호자 없이 여자 혼자 살아온다는 게 여러 가지로 애환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다른 데로 가자.”

“네에.”

유영의 손을 잡고 자리를 옮기는데, 서늘한 손이 해연의 어깨를 감싸 제 곁으로 끌어당겼다.

“어디 가요”

“아!”

이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던 탓에 그가 온다는 것도 깜박했다. 잘못했으면 길이 엇갈릴 뻔했는데 이현은 약속 장소에서 벗어난 번잡한 거리에서 그녀를 한 번에 찾아냈다. 다행히…….

“전화도 안 받고.”

“전화했어요 몰랐어요.”

“가방에 넣고 있으니 모르죠. 다음부터는 이러면 안 돼요.”

그가 말 안 듣는 아이를 꾸짖는 부모처럼 엄한 얼굴로 지적했다. 이현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는데도 해연은 어쩐지 안도감이 들었다. 그가 진심으로 화를 내지 않았기에.

대답이 없는 해연을 향해 그가 다시 한번 다짐을 받아 낸다. 설핏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유영이 해연의 등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언니, 누구예요 애인”

유영이 제 딴에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바로 곁에 있는 이현에게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안녕하세요. 해연 씨 애인 강이현이라고 합니다.”

“와 정말 언니 애인이구나. 저는 이유영이에요.”

유영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완전 잘생겼다고 이현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작 당사자인 이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했지만, 해연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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