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짧고 다정한 입맞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이 아쉽게 느껴졌다. 멍하니 멀어지는 붉은 입술을 바라보던 해연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제는 끝이겠지, 생각했는데 이현은 아예 몸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으응.”
그의 품에 안긴 채 몇 번이고 입맞춤을 받고 나서야 그가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괜찮겠지만, 그래도 몸이 안 좋아지면 바로 연락해요.”
“그럴게요. 그러니 이제 좀 가면 안 될까요”
걱정이 지나친 것도, 유난하다 싶을 만큼 애절하고 애틋한 이별 장면도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해연은 자신이 했던 행동은 까맣게 지우고 그를 밀어냈다. 이현이 섭섭한 얼굴을 했다. 그조차도 그림처럼 아름다웠지만, 여기서 넘어가면 또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겠지. 해연은 굳은 마음으로 그를 차 밖으로 밀어냈다.
준비를 마친 것은 약속보다 넉넉히 도착하겠다 싶은 정도의 시간이었는데, 결국 늦어 버렸다. 해연은 약속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내려 걸어가려 했지만, 이현의 명령을 우선시하는 운전사는 결국 약속 장소 바로 앞에서 차를 세웠다.
유영은 먼저 도착해 초조한 얼굴로 서성이고 있었다. 웬만한 사람은 엄두도 내지 못할 비싼 외제 차에서 해연이 내릴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유영은 무심결에 시선을 주었다가 깜짝 놀랐다.
“언니”
“유영아. 미안, 늦었지”
“어…… 아니요, 저도 금방 왔는걸요.”
인사를 하면서도 유영의 눈은 해연의 뒤에 있는 검은색의 세단을 힐끔거렸다. 해연은 따로 그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유영의 팔짱을 끼고 옆으로 바짝 붙었다.
“뭐 먹을까 배고프지”
“아, 네. 가요 언니.”
인근에 회사가 많아서 그런지 맛집도 많았다. 해연도 불과 몇 주 전까지 이곳으로 출퇴근했기 때문에 잘 알았다. 뭘 먹고 싶냐고 해도 유영은 수심이 깊은 얼굴로 어물거리기만 해, 해연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주도적으로 끌고 갔다.
두 사람은 칸막이가 길게 쳐져 있는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가격대가 있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라 방해를 받지 않고 대화하기에 걸맞았다. 이전에도 유영과 함께 한 번 온 적이 있어 해연은 알아서 음식을 시키고 종업원에게 메뉴판을 돌려주었다. 그때까지도 유영은 입을 떼지 않았다.
뭔가 불안한지 유영은 냅킨을 손으로 쥐어뜯고 있었다. 깨끗한 테이블 위로 갈기갈기 찢긴 냅킨 조각들이 흩어졌다. 해연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영아, 너 괜찮니”
“……언니. 저 요즘 좀 이상해서.”
“응, 말해.”
“자꾸 누가 쫓아오는 것 같고, 집에서도 누가 지켜보는 것 같아요.”
“뭐!”
“한번은 퇴근하고 오니까 집이 완전 엉망이 돼서…….”
“경찰은 신고했어”
“했는데……. CCTV가 없어서 찾기 힘들다고. 그래서 달아 놨는데 그 뒤로도 뭔가 이상한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집주인도 유난 떤다고 그러고요.”
거기까지 말을 하고 유영은 바싹 마른 목구멍을 축이려 물을 들이켰다. 그러고도 부족한지 다시 물을 따라 마시고 또 마셨다. 연달아 세 잔을 마시고도 초조한 기색은 가라앉지 않았다. 해연은 어제 유영을 만날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이렇게 큰일이 생겼는지 몰랐기에 너무 안일하게 대처한 것 같아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럼 어제는 어디서 잔 거야 설마 집에서 잔 건 아니지”
“……찜질방이요. 한 달 정도는 고시원에 잠깐 있을까 생각 중이에요.”
찜질방에 고시원. 둘 다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었다.
“이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네. ……그래야죠.”
원론적인 말 외에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 답답했다. 서울에서 집을 구하는 건 생각보다 많은 돈이 필요했다. 이런 일이 생긴 만큼 다음 집은 보안이 괜찮은 곳을 구해야 할 텐데 그럼 가격대는 더 높아진다. 유영이 괜찮다고만 한다면 제 수중에 있는 돈을 빌려줄 텐데, 돈 문제에 있어서는 칼 같은 유영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 그렇다고 집이 팔릴 때까지 고시원 같은 곳을 전전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차라리 우리 집에서 지내면 좋을 텐데…….’
해연은 한숨을 깊게 내쉬다 문득 든 생각에 눈을 깜박였다.
“유영아, 너 잠깐 우리 집에 와 있을래”
“네 아, 아니요. 저 누구랑 같이 사는 건 좀 불편해서……. 미안해요, 언니. 신경 써 주신 건데 거절해서.”
말은 자기가 다른 사람과 같이 사는 게 불편하다고는 했지만, 사실은 타인이 자신 때문에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게 싫은 거였다. 또 그걸 계속 눈치 봐야 하는 상황은 더 싫고. 당연히 유영의 마음을 알고 있는 해연이 씩 웃었다.
“내가 남 눈치 보기 싫어하는 네 성격을 몰라 지금 잠깐 집을 비워 놓고 있거든. 네가 와서 있어도 돼.”
“……정말요”
“하느님께 맹세코 진실입니다.”
해연이 믿지도 않는 하느님을 찾아가며 성호를 그렸다. 그러자 유영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정말, 그래도 돼요”
“응. 너만 괜찮으면 상관없어.”
어차피 자신은 이현의 집에 ‘계속’ 있을 거니까. 해연은 문제가 해결됐다는 듯 후련한 얼굴로 웃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
“우리 집 자체는 괜찮은데, 골목이 좀 그래. 일이 늦게 끝날 것 같으면 무조건 택시를 타.”
“네, 네!”
“오늘 밥 먹고 짐 싸서 이동하자. 나도 같이 갈게. 괜찮지”
“언니이……. 정말 고마워요.”
염치없는데 거절을 못 하겠다며 유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마음이 짠했다.
“되도록 빨리 보안 좋은 곳에 집을 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도 그거 때문에 이사 생각하는 중이거든.”
“네. 네, 집 먼저 비워 놓고 사람 구해질 때까지만 신세 질게요.”
“아니야. 어차피 나도 지금 다른 곳에 있어야 해서 비워 놓은 집인걸.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너 괜찮을 대로 써.”
이제야 마음이 편해졌는지 유영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그게 보기 좋아 해연은 미소를 짓다 멈칫했다. 자기 마음대로 일을 치긴 했는데, 이현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았던 탓이다. 유영에게 집을 빌려주면 그 기간만큼 자신은 이현의 집에서 지내야 한다. 당연히 그가 거절할 리가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양해를 구하는 것이 맞다. 해연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몸을 일으켰다.
“유영아, 나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네, 언니.”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기다리겠다는 유영은 평소와 같아 해연이 그녀의 머리를 쓱쓱 문질렀다.
화장실 옆에는 화장을 고칠 수 있는 파우더룸이 있었다. 그곳에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아 이현의 번호를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울리자마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일찍 전화했네요 혹시 벌써 몸 안 좋아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했어요.”
-말해요. 뭐든.
“아는 동생 집에 누가 들어온 흔적이 있나 봐요. 좀 위험한 것 같아서 집을 잠깐 빌려주기로 했는데, 그동안 저는 이현의 집에 계속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괜찮을까. 항상 같이 살고 싶다고 말하던 이현이라면 바로 긍정하리라 생각은 들지만, 상의도 없이 제 마음대로 결정하고 통보하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약간은 불안한 마음으로 물었는데,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잘됐네요.
“네”
-그럼 해연은 항상 내 집에 있다는 소리잖아요. 저는 좋아요.
“잠깐만이에요. 동생이 집을 알아볼 때까지만요.”
-뭐든 상관없어요. 당신이 돌아갈 곳이 없어진다는 뜻이니까. 나에겐 기분 좋은 소식이네요.
“……네, 맞아요.”
이현의 말에 맞장구치는 해연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해연은 왼쪽 가슴을 손으로 꾹 눌렀다. 그렇지 않으면 숨이 흐트러질 것 같아서. 왜지 이현과 함께 있는 게 무엇보다 행복한데 왜 불안한 걸까……. 해연은 심장 위에 대고 있던 손을 내리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럼 식사만 하고 돌아오겠네요.
“네 아니요. 동생 짐 챙겨서 옮기는 것까지 도와주고 갈 거예요.”
-……그 몸으로 짐을 옮긴다고요
그의 허락을 구해야 하는 구간이 여기였구나. 순식간에 온도가 내려간 그의 목소리에 해연은 죄지은 사람처럼 웅얼거렸다.
“그냥 옷가지만 좀 챙기고 택시를 타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식사 끝나는 시간에 맞춰 바로 갈 테니 기다려요.
“괜찮아요”
그가 온다는 말에 해연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이현이 웃었다.
-내가 가는 게 그렇게 좋아요 목소리가 밝아졌어요.
“네.”
해연의 목소리가 살짝 수줍은 듯 다시 작아졌다. 당연했다. 그가 온다는데 어떻게 싫을 수가 있을까. 너무, 너무 좋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해연의 입술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목소리만 듣고 있는 이현도 눈치챈 것을, 해연 본인만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일찍 내보냈나 봐요. 상태가 별로네. 그래도 아직은 괜찮죠
“……네. 아직, 괜찮아요.”
-그래요. 그럼 기다려요. 곧 갈 테니까.
뚝.
이현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아쉬움과 안도,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이 천천히 가라앉고, 다시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표정이 되었다. 해연은 깊게 숨을 들이켜고 파우더룸을 나왔다.
통화가 생각보다 길어져서 유영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다. 서둘러 테이블로 돌아가려는데 누군가가 그녀를 잡았다.
* * *
“해연 씨 해연 씨…… 맞죠”
“누구…… 아, 이진아 피디님”
해연을 잡은 사람은 지난번 면접 때 봤던 이진아 피디였다. 해연은 이진아가 잡은 팔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이진아의 손힘이 너무 세서 통증이 왔기 때문이었다.
“팔을 놔 주시겠어요 아파서…….”
“미, 미안해요. 놀라서 나도 모르게…….”
이진아는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팔에서 손을 뗐다.
이진아가 잡았던 부위에 발갛게 손자국이 남았다. 해연은 살짝 얼얼한 팔을 흔들며 인사했다.
“오랜만에 봬요. 여기서 마주칠 줄 몰랐어요.”
“아직 살, 아니, ……아, 메일 회신이 없어서 걱정했어요.”
“메일이요”
“2차 면접 건으로 인사팀에서 메일이 갔을 거예요. 그런데 아직 회신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네 저는 그날 보냈어요.”
해연은 핸드폰 메일 어플을 열어 자신이 발송했던 메일을 확인했다. 분명 서류까지 첨부해 보냈던 기억이 확실한데, 보낸 메일함에는 그런 흔적이 없었다.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