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의 아내-35화 (35/113)

35화.

“응”

유영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하지만 난 여기서 나갈 수 없는데……. 해연은 슬쩍 이현의 눈치를 살폈다. 가까이에 있어 통화를 모두 들은 이현이 선선히 웃었다.

“괜찮아요. 만나도 돼요. 잠깐이면 아무렇지 않을 테니까.”

이현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해연이 유영에게 대답했다.

“언제 만날까 오늘은 좀 늦었는데, 내일 볼까”

-내일, 이요 아…… 네, 내일 봐요.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 대체 무슨 일일까. 항상 밝고 쾌활하던 그녀가 아니었다. 이현의 가슴에 등을 대고 있던 해연은 상체를 바로 세웠다.

“유영아, 괜찮니 언니 지금 나갈까”

-아니에요! 괘, 괜찮아요. 내일 봐요.

“……응. 몇 시에 볼까”

-저 퇴근하면 일곱 시쯤 될 것 같아요. 그때 봐요.

“어, 알았어. ……유영아, 정말 괜찮겠어”

-네. 괜찮아요, 언니. 내일 일곱 시에 봐요. 그럼 끊을게요.

뚝. 해연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전화가 끊어졌다. 아무래도 심상찮은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뭘까요.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내일 되면 알 수 있겠죠. 그렇게 신경 쓰지 말아요. 당신도 환자면서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예요”

“나는 다,”

“낫지 않았어요.”

“…….”

“자꾸 이러면 내일 나가지 못하게 할 거예요.”

“그…….”

해연은 더 말하지 않고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기껏 풀어 놓은 게 무색하도록 해연이 다시 겁을 먹고 움츠러들자 이현이 혀를 내찼다.

“그만 생각해요. 내일 보기로 했으니 오늘은 당신 몸만 생각해요.”

해연은 그가 이끄는 대로 침대에 얌전히 누웠다. 이현이 착하다며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잠이 많지 않았는데 그가 만질 때마다 신기할 정도로 졸음이 몰려왔다. 해연이 눈을 감고 웅얼거리듯 말했다.

“당신 손길은 신기해요.”

“왜요”

“계속, 잠이 쏟아져서…….”

유영이도 이현도, 윤시후도 자신이 만졌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었다. 이렇게 몸이 풀어지는 것 같은 나른하고 아득한 기분. 그런 거라면 다음부턴 함부로 만지지 말아야지, 하는 경각심이 들 정도도 아무런 생각도 못하게 만드는 손길이었다.

“졸리면 자면 되죠.”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가벼운 말에 해연이 입꼬리를 늘어트리며 웃다가 이내 푹 잠들었다. 깊게 잠든 사람 특유의 일정하고 부드러운 호흡이 조용한 방 안을 떠돌았다.

“이렇게 돼서도 예민한 건 여전하네요.”

짜증 날 정도로. 이현이 고개를 숙여 반듯한 이마에 입술을 묻으며 차게 속삭였다.

* * *

집에 돌아갔다던 한해연이 하루 만에 다시 돌아왔다는 소리를 들은 윤시후는 벌떡 일어섰다가 시무룩한 얼굴로 주저앉았다. 어차피 지금 가 봤자 주인 놈하고 같이 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진짜 나 때문에 아픈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제 상처를 보자마자 하얗게 질린 꼴이 계속 신경 쓰였다. 그래. 신경 쓰였다. 엄청. 무지. 아주 많이! 윤시후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환장하겠네, 정말.”

고작 인간이다. 주인의 놀잇감이긴 해도 그래 봤자 인간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신경 쓰이냐고. 물론 냄새가 존나 좋긴 했다.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을 정도로 끝내줬다. 그런 냄새 때문에 주인 새끼가 품에 끼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존나 약해 빠져서는.”

그나저나 그렇게 하얗게 질려서 벌벌 떨었는데 이제 괜찮으려나. 왜 집에 갔다가 다시 돌아왔지 주인 새끼가 그렇게 좋아

“그 새끼가 어떤 놈인 줄 알고나 있.”

문득 든 생각에 윤시후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모르는 건 아니겠지”

주인 정액 냄새가 몸에 배다 못해 코에 아릴 정도로 해 대면서 아직도 모른다고 진짜 그럼 정말 주인이 한해연을 가지고 노는 건가 그럼 이걸 한해연에게 말해 주면 둘 사이가 끝날 수도 있으려나

“……미친, 씨발. 둘이 끝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왜 이걸 생각하고 있지 윤시후가 버럭 성질을 냈다. 누가 말한 것도 아니고 저 혼자 생각한 거면서 펄펄 날뛰며 짜증 섞인 욕설을 내뱉었다.

“얼굴이 존나 예쁜 것도 아니고 그냥 좀……. 아니 그 정도면 예쁘긴 하지. 아, 뭐래!”

윤시후는 방을 박차고 나갔다.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 그냥 누워 있다 보니 쓸데없는 생각만 하게 되는 것이다. 몸을 좀 움직이고 나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방이나 밖이나 별다를 것은 없었다. 주인이 돌아온 이후 다들 몸을 사리느라 밖이 쥐죽은 듯 조용했던 탓이다. 그게 윤시후를 더 짜증 나게 만들었다. 아주 꼴값을 하네, 정말. 투덜거리며 밖을 어슬렁거리던 윤시후의 눈에 별채에서 나오고 있는 안주희가 꽂혔다. 윤시후가 신나서 안주희를 향해 뛰어갔다.

“누나!”

“……나 바쁘니까 제발 다른 데 가서 놀아.”

“아 왜에에. 다 처자는데 뭐가 바뻐.”

윤시후가 안주희의 치맛자락을 잡고 질질 매달렸다. 안주희는 짜증 난 얼굴을 했지만, 윤시후의 힘이 너무 세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상대의 기분 따윈 안중에도 없는 윤시후가 철없는 얼굴로 웃었다.

“나 궁금한 거 있단 말이야.”

“……뭔데 빨리 말해.”

“한해연, 아니, 해연 누나 말이야. 그, 몸은 좀 괜찮아졌어”

윤시후가 해연을 부르는 호칭에 안주희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녀는 누가 들었을까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너 해연 님을 왜 그렇게 불러 미쳤어”

“해연 누나가 그렇게 부르라고 했거든 해연 누나가 허락한 건데 왜 누나가 뭐라고 해”

그깟 이름 좀 불렀다고 아주 유난을 떤다. 별것도 아닌 걸로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구는 게 짜증 난 윤시후는 일부러 해연의 이름에 누나를 꼬박꼬박 붙이며 안주희의 신경을 건드렸다.

“아무리 해연 님이 허락하셨더라도 안 되는 건 안 돼!”

“싫은데 누나가 뭔데 참견이야 ‘해연 누나’가 허락한 거라니까아”

이게 진짜. 일부러 더 얄밉게 말하는 윤시후의 행동에 안주희는 훅 달아오른 열을 식히려고 노력했다.

“너 해연 님에게서 관심 좀 꺼. 정말 큰일 나려고 이래”

“내가 뭘! 그냥 걱정하는 것도 안 되냐 존나 뭐라고 하네.”

“안 돼. 이현 님 요즘 신경이 아주 예민하셔. 제발 몸 좀 사려.”

“고작 누나라고 좀 불렀다고 몸을 사려야 해 이런 걸로 지랄하면 그게 더 문제 아냐 게다가 나보고 맨날 어린애라며 누나 말대로 아직 철이 존나 안 들어서 그런가 보지. 애한테 왜 이럼”

“이…….”

“아무튼 빨리 해연 누나 괜찮은지나 말하라고. 이게 뭐가 어려운 대답이라고 질질 끄냐”

안 바뻐 그렇게 말하는 윤시후는 도리어 저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안주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참자. 열 살짜리 어린애랑 싸워 봤자 나오는 건 없다. 도리어 저만 화병이 날 터였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괜찮아. 너 가고 나서 바로 괜찮아지셨어. 됐어 그럼 나 간다.”

“잠깐! 하나만 더!”

“또 뭐!”

“한해연, 해연 누나, 우리가 뭔 줄은 알아”

“……!”

더는 못 참고 벌컥 신경질을 내던 안주희의 몸이 움찔 굳었다. 윤시후가 눈을 빛내며 상체를 바짝 내밀었다.

“몰라”

“……너, 함부로 나대지 말고 입 다물고 살아. 알겠어”

이런 식으로 입을 나불거리면 정말 죽을 거 같으니까. 안주희의 목소리는 굉장히 차분했다. 얼음장같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철없이 굴던 윤시후까지 움찔할 정도였다. 윤시후는 슬그머니 안주희의 옷을 놓았다.

“아니, 내가 뭐 어쩐다고 했나. 그냥 궁금해서 물었지. 아무튼 이제 가. 바쁘다며”

“윤시후, 너 내 말 꼭 명심해.”

“알았다니까!”

하여튼 유난은. 윤시후는 안주희가 저를 잡기 전에 훌쩍 뛰어 도망쳤다. 더 있었다간 귀에 인이 박힐 때까지 잔소리할 기세였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반응하는 건 한해연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겠지’

궁금했던 걸 모두 해결한 윤시후가 히죽 웃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졌다.

* * *

약속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해연은 이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차에 타서도 그의 손을 놓지 않아 문을 닫을 수도 없었다. 떨어지면 죽을 것처럼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안쓰러우면서도 마음에 들어 이현이 나른히 웃었다.

“괜찮아요. 곧 다시 만날 거니까. 그러니까 잠깐은 떨어져 있어도 돼요.”

“……하지만.”

“이번엔 내가 허락한 거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그러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평소’처럼 행동해요. 응”

이현이 자꾸 제게 엉겨 붙는 해연을 귀엽다는 듯이 보며 가볍게 입 맞췄다. 방 안에서도, 밖에서도 계속 그렇게 안심을 시켜 주자 해연이 그제야 평소처럼 돌아왔다. 심지어 먼저 떨어지기 싫어한 것도 잊고 왜 자꾸 붙잡냐며 그를 타박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귀여웠다.

이현이 짓궂게 웃자 해연의 얼굴이 훅 붉어졌다.

“……그만 좀 해요.”

“왜 얼굴을 숨겨요”

“당신은 부끄럽다는 감정을 좀 알 필요가 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어서 신경 쓰지 말라니까.”

“신경을 어떻게 안 써요”

“그것도 조만간 익숙해질 거예요.”

해연은 이현의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래로 흘러내려 간 머리카락 사이로 동그란 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서늘한 체온이 홧홧한 귓불에 닿았다. 부드럽게 귓바퀴를 따라 움직이는 손길에 해연은 얼굴을 뒤로 밀어 피했다.

하지만 뒤로 피한 게 무색하도록 이현이 그녀를 따라와 차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긴 속눈썹 아래로 그림자가 짙게 내려앉았다. 눈을 감고 키스를 기다리는 남자의 얼굴에 해연은 홀린 듯 뒤로 밀었던 머리를 그에게 가까이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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