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누구지 모르는 이름이었다. 자신이 저장해 놓은 걸 보면 분명 아는 사람일 텐데 이름이 생소했다. 받을까 통화 버튼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려던 찰나였다.
‘받지 마!’
절대, 절대로 받으면 안 돼. 여기서 다시 잡히면 끝이야.
해연은 미친 듯이 종료 버튼을 눌렀다. 발신음이 멈추자 그제야 심장이 안도한 듯 제 속도를 찾았다. 그녀는 아예 핸드폰 전원을 끄고 탁자 서랍 안에 넣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했다.
“하아…….”
이제 된 거겠지 잘한 거겠지 해연은 다시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몸을 둥글게 말았다.
강이현. 강이현. 강이현.
누굴까. 낯선 만큼 익숙한 이름이었다. 소름 끼치도록.
머리가 텅 빈 느낌이었다. 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지 해연은 무릎을 양팔로 감싼 채 끊임없이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어 무언가 닥치는 대로 떠올렸다.
한해연. 부모님은, 없다. 그리고 아, 회사를 다녔어. 하지만 퇴사했고, 그다음엔…….
“아!”
머리가 아파. 해연은 몸을 이리저리 굴렸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매트리스에 머리를 찧었다가 고통 어린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그래도 나아지지 않자 비상약을 넣어 둔 곳을 향해 기어갔다.
다행히 약은 침대 옆 탁자 안에 있었다. 진통제 두 알을 물도 없이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가 와락 구역질을 하며 다시 토해 냈다. 약을 먹으면 안 돼. 그게 어떤 약이든, 먹으면 안 된다.
깨끗한 원목 마루에 위액과 타액이 범벅된 녹색 알약이 뒹굴고 있는 걸 멍하니 보던 해연의 뇌리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필요해지면 꼭 연락해요.’
“안 돼. 안 돼. 그러면, 그러면 안 돼. 제발…….”
‘꼭 기억해요. 몇 시여도 상관없으니까 내가 필요해지면 반드시 연락해요. 분명 그럴 테니까.’
“안 돼. 하지 마. 그러면 안 돼…….”
하지만 너무 아프고 무서워……. 어떻게 해서든 이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어. 해연은 자신을 막는 누군가를 향해 속삭였다. 제발, 제발. 이러다 죽을 거 같아.
해연은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탁자에 넣었던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전화. 하지만 누구에게 해야 해 멍하니 주소록을 살피던 해연의 눈에 강이현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머뭇거리며 통화를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했네요. 꽤 오래 버텨서 놀랐어요. 이제 내가 보고 싶어졌어요
“……네.”
-왜 이렇게 떨어요. 그렇게 무서웠어요
“네, 네. 너무, 너무 무서워서…… 흐으…….”
-울지 말고. 응 이제 거기서 나와요. 당신 발로. 그럼 내가 갈게요.
나오라고 여기서 해연은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집을 둘러봤다. 여기서 나가면 안 되는데…….
해연이 선뜻 대답하지 않자 남자가 혀를 내찼다.
-내가 필요 없다는 말이죠 전화, 끊을까요
“아니요! 아니, 그, 아…….”
필요해. 하지만 무서워. 그를 만나면 지금보다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질 거야. 하지만 그가 있어야 해. 어쩌지
-너무 고민하지 말고 그냥 나와요. 당신은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어요.
혼란스러워하는 자신과 달리 남자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부드러웠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마치 속삭이는 듯해서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두통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나올 거죠
“……네.”
이제 어쩔 수가 없어. 해연은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대답했다. 착해요. 나긋한 대답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그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다시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가자. 그에게 돌아가야 해. 그래야 아프지 않을 거야. 그에게 가야 한다. 빨리.
그녀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얇은 실내 옷에 코트만 걸친 채 집을 나섰다. 사람들은 해연을 이상한 듯이 바라보다 그녀가 가까이 오면 거리를 벌리며 빙 돌아갔다. 추워. 목적지도 모른 채 한참을 걷던 해연은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넓은 파라솔. 겨울임에도 외부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몇 명 보였다.
그에게 가야 하는데 어쩌지 잠시 고민하던 해연은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그냥 그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저곳에 있으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돈을 가져왔던가. 혹시 몰라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다행히도 신용카드가 있었다. 따뜻한 카페라테를 주문해 테라스 끝 쪽에 앉았다. 춥다고 생각했는데, 맨발에 실내용 슬리퍼만 신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꼴로 나왔구나. 평소라면 부끄러웠을 텐데 이상할 정도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테라스에 띄엄띄엄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사람들과 그들이 내는 소음이 되려 안정감을 줬다. 따뜻한 커피가 든 컵을 양손으로 잡고 그가 오길 기다렸다.
온다고 했는데. 그의 말대로 집에서 나왔는데 왜 이렇게 늦는 걸까.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을 때, 어떤 남자가 불쑥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멋대로 해연의 커피를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무례한 행동에 해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꼭 처음 만났던 날 같네요.”
처음 남자는 꼭 예전에도 만났던 사람인 것처럼 말을 했다. 저렇게 잘생긴 남자를 잊을 수 있을까. 하지만 목소리가 낯익었다. 해연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기억 안 나는구나. 이현. 강이현이잖아요. 당신 애인.”
강이현. 내 애인. 남자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삐걱대던 기억이 자연스럽게 맞춰졌다.
그다. 드디어 그가 왔다. 이제 안전하다.
잠시 멈칫했던 해연은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현은 해연의 동그란 이마에 살짝 내려온 잔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렸다. 그러면서 균열이 생긴 기억을 다시 꿰맞춰 갔다. 충격이 가지 않도록 아주 세밀하게, 조심스러운 작업이었다. 그는 아무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그들을 중심으로 투명한 벽을 세우며 해연에게 말을 걸었다.
“어땠어요”
“뭐, 가요”
“혼자 있는 거요.”
“……무서워서…….”
해연이 몸을 흠칫 떨며 대답하자 이현이 나긋이 웃었다.
“내가 그랬잖아요. 당신은 나 없으면 살 수 없다고. 다음에도 또 고집부릴 거예요”
“아뇨. 아, 안, 그럴 거예요.”
겁에 질린 대답. 원하는 답을 받았는데 기쁘지 않다. 하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어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이현이 쓰게 웃었다.
“다음엔 그러면 안 돼요.”
“네…….”
“말도 잘 듣고 착하네요.”
예뻐요. 이현이 해연의 이마에 입술을 비볐다. 그리고 나직이 속삭였다.
“이제 돌아가요. 우리 집으로.”
해연이 몽롱하게 흐려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이현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의 곁에 있어야 해. 이현의 곁에 있어야 ‘안전’하니까…….
이현이 그녀의 이마에서 천천히 입술을 뗐다. 아, 무력한 신음과 함께 해연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왜 이렇게 예쁘게 울어요. 더 울리고 싶게.”
이현은 해연의 눈에서 떨어진 물기를 손가락으로 훑어 닦아 냈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슬리퍼만 신은 맨발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신발은 제대로 신고 나왔어야죠.”
“아…….”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요”
“네.”
“기분 좋네요.”
이현은 해연을 가뿐히 안아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도망치듯 나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 * *
별채로 돌아오자마자 이현은 해연을 안고 욕실로 향했다. 욕조에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뜨거운 물이 채워져 있었다. 이현은 해연의 허술한 옷을 모두 벗기고 욕조 안에 함께 들어갔다. 차가운 바람에 딱딱하게 곱은 발가락을 수없이 만져 풀어 준 뒤 그녀의 몸을 품에 안았다.
“이제 평소처럼 말해도 돼요.”
“…….”
“당신은 집에 돌아갔던 적이 없고, 계속 아파서 내가 보살폈던 거예요.”
그러니 다시 날 좋아하는 듯이 대해요. 이현이 해연의 귀에 입술을 대고 조곤조곤 속삭였다. 그의 손이 해연의 유두를 아플 정도로 세게 쥐었다. 그러자 축 늘어져 있던 해연의 몸이 꿈에서 깨어나듯 흠칫 튀어 올랐다.
“흣, 아, 아파요!”
“이렇게 만져 주면 좋아하면서.”
“내가 언제요”
“정말 안 그랬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 응”
그의 짓궂은 말에 해연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이현은 그런 해연의 귀를 혀로 핥고 또 이로 깨물었다. 돌아왔다. 내 여자가.
괜찮다고, 이제 아프지 않다고 수없이 말을 해 봐도 이현은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환자를 대하듯 수발을 들어주는데 답답하기도 하고, 기분이 좋기도 한 게 미묘했다. 아무리 봐도 그는 간병인 역할에 심취한 것처럼 보였다.
가습기에서 나오는 연기가 물기를 품고 있었다. 약간 축축하고 서늘한 공기 아래로 침대가 따뜻했다. 이미 시간도 늦은 저녁이 되었고, 해연은 겸사겸사 그의 간병인 놀이에 동참했다.
그가 손수 먹여 주는 부드러운 죽을 모두 먹고 쉬고 있는데 방 어디선가 익숙한 벨 소리가 들렸다.
“제 핸드폰인 것 같아요.”
“……꺼 놓을 걸 그랬어요.”
“저런 안타깝네요. 이미 전화 오는 소리 들었으니 빨리 줘요.”
그가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벽에 걸어 둔 자신의 외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해연의 손 위에 올려 주었다.
해연은 여전히 벨소리가 울리고 있는 제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유영. 반가운 이름이 핸드폰 화면에 적혀 있었지만, 해연은 문득 든 의문에 선뜻 통화를 누르지 못했다.
이걸 왜 이현이 가지고 있는 거지 분명 집에 놓고 왔었던 것 같은데……. 뭘까, 이 기시감은. 고개를 들어 이현을 보자 그는 태연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 순간 이상했던 기시감이 홀연히 사라졌다. 그래, 이게 뭐가 이상하다고.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그가 내게 안 좋은 행동을 할 리가 없잖아.
“왜 그래요 전화 안 받아요”
“아니요, 받을 거예요.”
그가 냉큼 뺏어가려고 하자 해연이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유영아.”
-언니 통화 가능하세요
“응 응, 가능해. 무슨 일 있어”
-상담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언니 괜찮으시면 만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