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그건…….”
해연이 주저하다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가야 했다.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집에 가고 싶었다. 아까 그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저 긴장을 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맹목적인 감정이 해연을 사로잡았다.
“꼭 가야겠어요 또 아플지도 모르는데”
이현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그의 말대로 언제 또 아플지 모르는데 혼자 집에 간다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가고 싶었다.
그의 품은 아늑하면서도 어딘가 차가웠다. 해연은 이해하지 못할 양극단의 감정에 몸을 움츠렸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어서 도망쳐야 해.’
문득 든 생각에 해연이 흠칫 놀랐다. 도망치다니 누구에게서
해연이 떨고 있는 걸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 이현은 쓰게 웃었다. 겁이 많은 건지, 아니면 눈치가 빠른 건지. 여자는 늘 그렇듯 쉽게 잡히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계속 그에게서 도망치려고 한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한 공포와 혐오를 드러내며.
‘결국 이럴 거면서 좋아한다는 말은 왜 했어요’
들었다 놨다 아주 제대로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그는 항상 이 작은 여자에게 무력했다. 제 손에 가두고 있는 상황에서조차도.
이현은 해연에게 아주 작은 충격 정도는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한번은 느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혼자서는 못 견딜 거라는 걸.
윤시후가 퍽 신경 써서 보호하긴 했지만, 해연의 집은 많이 망가진 상태였다. 다행히 시기적절하게 해연이 아파 완벽히 복구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확인까지 했으니 해연이 돌아가도 괜찮다.
“가요. 더 보채지 않을게요.”
그의 말에 여자가 안도한 듯 숨을 깊게 내쉬는 것까지, 모두 느낀 채 이현은 더 깊게 웃었다. 어차피 스스로 제게 돌아올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 * *
해연의 집에 도착하자 이현이 그녀를 한번 푹 안았다가 놓아 주었다.
“아프면 바로 전화해야 해요.”
“그럴게요.”
“혼자 있는 게 무서워서 내가 보고 싶어져도 전화해요.”
거듭된 당부에 해연이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도 피식 웃었다. 이현이 해연의 얼굴을 손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웃으니까 조금 낫네요. 꼭 기억해요. 몇 시여도 상관없으니까 내가 필요해지면 반드시 연락해요.”
분명 그럴 테니까. 이현의 말에 해연은 어린애도 아닌데 그럴 리가 있을까 하면서도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이현이 장난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해연은 당분간 그에게 연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의 곁은 아늑했지만, 본능이 그에게서 멀어져야 한다고 일깨우고 있었다. 계속 그의 곁에 있으면 무서운 일이 벌어질 거라고.
왤까. 왜 이 상냥하고 다정한 남자에게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걸까. 그는 좋은 사람인데…….
해연은 아픈 자신을 보살펴 주었던 남자에게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비난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했다.
해연이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린 채 머뭇거리며 알겠다고 대답하자 이현이 묘한 얼굴로 그녀를 보더니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갈게요. 빨리 들어가서 쉬어요.”
좀 더 끈질기게 굴 줄 알았던 이현은 생각보다 쉽게 그녀를 놓아 줬다. 아니, 오히려 그녀를 집 안으로 민 뒤 손수 현관문을 닫아 주었다.
대리석 바닥을 걷는 남자의 발걸음 소리와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닫히는 소리까지 사라지자 해연은 오롯이 혼자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자신이 원해서 돌아왔는데, 집이 더 이상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해연은 자신의 집을 천천히 둘러봤다. 똑같은 가구와 똑같은 인테리어. 자신이 직접 꾸민 집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마치, 자신의 집과 똑같이 꾸민 다른 장소에 온 것 마냥.
“그럴 리가 없잖아. 정신 차려, 한해연.”
해연은 일부러 소리 내어 말했다. 그래야 이 이상한 기분에서 벗어날 것 같아서. 아무도 없는 집에 자신의 목소리가 허망하게 울리다 사라졌다.
오래 비워 놔서 그런지 집이 서늘했다. 그래, 추워서 그런 걸 거야. 해연은 바로 방으로 들어가 보일러를 켰다. 온도를 높이니 잠시 후 방이 따뜻해졌다.
겉옷을 벗고 침대 안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렸다. 자고 일어나면 이 이상한 기분이 사라질 것이다. 분명히. 분명히 그럴 거다. 해연은 이불을 꽉 끌어당겨 몸에 감싼 뒤 눈을 꾹 감았다.
* * *
여기가 어디지
해연은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방을 돌아봤다. 어둡고 축축한 방. 기분 나쁜 비린내가 풍기는 좁은 공간은 섬뜩하고 무서웠다.
음산한 공기가 차고 시려서 소름이 돋은 팔을 손으로 문질렀다. 여기는 대체 어디일까. 벽의 대부분은 검붉은 색의 액체가 튀어 생긴 흔적으로 지저분했다. 해연은 본능적으로 저것이 피의 흔적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익숙하지 스릴러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장소인데도 마치 이곳에 온 적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일어났어’
낮고 쿱쿱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해연은 몸을 휙 돌려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 듣는 생소한 목소리임에도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해연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뭐지. 이게 뭐야.
끼이익.
녹슨 철문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던 폐쇄된 공간이었는데 갑자기 눈앞에 문이 생겼다. 해연은 도망갈 생각도 못 하고 경계를 하며 문을 바라봤다.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도무지 사람으로는 볼 수 없는 괴물이었다. 이 미터가 훌쩍 넘을 것 같은 거대한 체격을 지닌 괴물은 온몸에 털이 수북했다. 벌어진 입에 짐승 같은 날카로운 이빨이 뾰족하게 돋아 있었고, 양손에는 새파랗게 날이 벼려진 칼을 든 채 그녀를 허기진 눈으로 보고 있었다.
크게 벌어진 입가에 침을 뚝뚝 흘리며 다가오는 괴물을 피해 주춤 뒤로 물러섰지만, 곧 등이 벽에 닿아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그런 해연을 보며 괴물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죽는다.
저 괴물은 날 죽인다. 갈기갈기 찢겨 잡아먹힐 것이다. 심장이 발작하는 것처럼 뛰었다.
‘도망쳐!’
해연의 머리에서 경고음이 미친 듯이 울렸다. 도망치라고 어디로 사방이 막힌 벽에서 출구는 오로지 괴물이 서 있는 문뿐이었다. 해연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도망쳐야 해. 저 괴물에게서. 저건 분명히 나를……!
그때 괴물의 목이 뚝 꺾였다. 잘린 머리가 바닥에 뚝 떨어지자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며 거대한 몸도 바닥에 쓰러졌다. 쿵. 단단한 콘크리트뿐인 좁은 공간에 소름 끼치는 소리가 웅웅 울렸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해연이 몸을 움츠렸다. 괴물의 시체에선 여전히 피가 픽픽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더듬거리며 시선을 옮기자 엉망으로 뭉개진 괴물의 얼굴과 마주쳤다. 징그럽고 무서운 장면이었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해연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눈도 코도 막고 이 끔찍한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도망치기 위해선 눈을 뜨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단 하나의 출구를 막고 있던 괴물이 죽었다. 왜 갑자기 목이 잘려 죽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을 죽일 것 같던 괴물이 죽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해연은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주춤 괴물의 시체를 피해 걸음을 옮겼다.
저 문으로 나가야 해. 출구는 오로지 저 문 하나뿐이니까. 그래야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 장애물 같던 괴물의 시체를 지나자 해연은 더 빨리 걸음을 부추겼다.
빨리. 빨리.
‘그게 나타나기 전에 어서!’
문에 다다랐을 때였다. 검은색의 산채만 한 짐승이 문밖에서 그녀를 맞이했다. 마치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 짐승의 입이 해연을 향해 쩌억 벌어졌다.
* * *
“……!”
그 순간 해연의 눈이 번쩍 뜨였다. 크게 뜨인 눈 안으로 빛이 쏟아져 내렸다. 아침. 톤이 낮은 푸른 린넨 커튼, 그 사이로 들어오는 하얀 빛. 해연의 눈이 직선으로 이어진 빛을 따라 이동했다. 따뜻하고 포근한 이불, 침대 아래 놓인 러그, 침대 옆에 있는 화장대와 붙박이장마저 익숙한 것이어서 그제야 자신이 끔찍한 꿈을 꾸고 일어났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꿈이라고 그게
해연은 멍하니 제 두 손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불을 걷어 다리를 움직였다. 멀쩡히 붙어 있는 사지가 이상했다. 분명, 그 검은색 짐승에게 잡아먹혔다. 상체와 머리만 남은 채 짐승이 제 몸을 먹는 걸 봤는데. 끔찍하도록 아팠던 고통이 너무나도 생생했는데.
“그게 꿈이라고……”
어떻게 그런 끔찍한 꿈을 꿀 수가 있지 꿈이, 악몽이 너무 강렬해서일까. 공포와 통증이 전신을 내달리고 있었다. 해연은 덜덜 떨고 있는 손으로 제 양팔을 감쌌다가 제 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참을 침대에 웅크려 있다가 조금이나마 진정이 되었을 쯤, 해연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어 그 아래 섰다.
“하아.”
해연은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물을 맞으며 여전히 떨리는 몸을 녹였다. 얼굴로 흘러내리는 젖은 머리카락과 물을 쓸어 내 가려진 시야를 다시 찾았다.
무심결에 향한 거울에 창백하게 질린 여자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
고개를 돌리니 하얀 타일이 붙은 벽뿐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 외에는.
더는 욕실에 있을 수 없어 해연은 아주 빠르게 몸을 씻고 밖으로 나왔다. 조금이라도 어두운 것이 싫어 커튼을 모두 쳐내고 빛이 들어오는 소파에 무릎을 모아 앉았다. 제대로 말리지 않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그대로 방치한 채로.
한참을 그러고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음악 소리가 울렸다. 전화. 핸드폰이 어디에 있더라. 해연은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길게 이어졌던 벨 소리는 잠깐 끊어졌다 다시 울렸다. 그녀가 받을 때까지 계속 이어질 것 같았다. 해연은 몸을 일으켜 벨 소리가 흐르고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기가 축축했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모두 말라 있었다.
발신인은 강이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