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존나 유치하게.”
그게 뭐라고 전용이래 이럴 거면 애초에 만져 주질 말던가. 윤시후가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해연은 더 뜨거워진 얼굴에 손 부채질을 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나저나 고작 머리 한번 쓰다듬은 게 뭐라고 이렇게 반응하지 유영이도 그렇고, 이현도 그렇고. 앞에 있는 윤시후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해연이 창가에 살짝 걸터앉아 물었다.
“머리 만져 주는 게 좋아 다른 사람에게 만져 달라고 하면,”
“누가 감히 내 머리를 만져!”
윤시후가 성질을 버럭 내더니 다시 슬쩍 눈치를 보며 성질을 죽였다. 해연이 피식 웃었다.
“나는 괜찮고”
“누나는, 뭔가 따뜻하기도 하고, 냄새가 씨발, 존나, 끝장나게 좋아…….”
따뜻하다는 말은 유영이도 했다. 하지만 냄새 이야기는 처음이라 해연은 제 손을 코에 가져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 하지만 평범한 로션 냄새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도 냄새 얘기를 했었지. 아, 그만하자. 해연은 대충 윤시후의 말을 흘려 넘겼다. 깊게 생각하기엔 좀 민망한 화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때, 윤시후가 옆구리를 부여잡고 허리를 숙였다.
“아흐……. 이거 왜 이렇게 안 낫는 거야.”
“어디 아파”
“으응. 어떤 새끼가 비겁하게 뒤에서 칼로 쑤셔서.”
“뭐!”
윤시후는 “볼래” 하더니 셔츠를 살짝 들어 올렸다. 얼추 아물긴 했어도 상처의 흔적이 선명했다.
“아파 보이지 응”
“……이렇게 걸어 다녀도 괜찮아”
“이 정도는 괜찮아.”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칼을 맞…… 거기까지 생각하던 해연의 머릿속으로 새파랗게 벼려진 커다란 날붙이가 떠올랐다. 그리고 끔찍하던 고통도. 구역질이 날 정도로 강렬한 피 내음과 악취가 해연을 사로잡았다.
“우욱.”
“뭐, 뭐야”
윤시후가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굶주린 짐승의 거친 숨소리, 습기가 가득 찬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윤시후의 커다란 목소리와 얽혀서 뭐가 현실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 미치겠네. 괜찮아”
“하으…… 흣. 으으으…….”
“해연 님!”
따뜻하게 우린 국화차를 가지고 침실 안으로 들어온 주희의 눈에 몸을 굽힌 채 헐떡이는 해연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윤시후도.
“윤시후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나 아니거든!”
“그럼 멀쩡하던 분이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하아, 하…….”
다기가 든 쟁반을 탁자에 두고 주희가 해연을 부축했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해연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창백했다.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지 눈을 몇 번이고 깜박거리더니 이내 긴 한숨을 내쉬며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해연 님 해연 님”
“괜, 찮아요. 조금만 쉬면…….”
해연은 주희의 부축을 받고 창가 근처에 있는 긴 소파에 몸을 눕혔다. 안정적인 곳에 몸을 눕히니 정신이 빠르게 돌아오고 있었다. 귀를 어지럽히던 이명도 잠잠해졌다. 거칠었던 숨이 안정을 찾아가고 창백하던 피부에 핏기가 돌았다. 눈을 꾹 감고 숨을 가다듬던 해연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창밖에 서 있던 윤시후가 창을 넘어 안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평소였다면 어딜 들어오냐고 당장이라도 내쫓았을 주희는 해연의 안색을 살피느라 윤시후가 안으로 들어온 것도 몰랐다.
“괜찮아 저기…… 내가 그런 거 아니라고 말 좀 해 줄래”
“넌 지금 그게 중요해”
“그럼 어떡해! 하필 내 앞에서 이렇게 된 바람에 덤탱이 쓰게 생겼는데.”
“제발, 조용히 좀…….”
올근볼근하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가늘게 흘러나온 해연의 애원에 바로 잠잠해졌다.
제대로 잡히지 않던 초점은 몇 번 눈을 감았다 뜨자 멀쩡해졌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았다. 귓가를 울리던 이명은 분명 제대로 들었던 것 같은데,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섬뜩했다.
“괜찮으세요”
“이제 괜찮아요. ……저기, 저 애가 그런 것도 아니고요.”
“거봐! 나 아니랬지”
“그래. 아닌 거 알았으니까 이제 여기서 나가 줄래”
고고하던 안주희가 새끼를 끼고도는 어미처럼 해연과 윤시후 사이를 가로막았다. 고운 눈매가 날카롭게 벼려져 매서운 경계를 하고 있었다. 윤시후는 욱해서 한마디를 할까 하다가 지친 기색이 역력한 해연을 보고 한발 물러섰다.
그대로 뒤를 돌아 나가려던 윤시후가 다시 몸을 돌렸다. 그는 아직도 안색이 창백한 해연의 얼굴을 힐끔힐끔 살폈다. 특유의 청량하고 달콤한 냄새가 옅어져 있어 괜히 신경 쓰인 탓이었다. 꼭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냄새가 약했다. 몸이 안 좋아서 그런가
나갈 듯하던 윤시후가 머뭇거리자 안주희가 날카롭게 말했다.
“빨리 안 나갈래 주인님 곧 오실 거야.”
“알았다, 알았어. 간다.”
진짜 이상하네. 활짝 열린 창에서 가볍게 점프해 정원으로 내려간 시후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워낙에 목소리가 큰 탓에 이미 밖으로 나간 시후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주희는 윤시후의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창문을 단단히 잠갔다.
아예 커튼까지 닫아 마무리하던 주희에게 연약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현에게는…….”
“네”
“이현에게는 비밀로 해 주세요.”
“……그건.”
“걱정할 것 같아서요.”
별것도 아니었고. 해연이 짐짓 태연한 척 말을 했지만, 주희가 보기에는 ‘별거’였다. 하지만 파리한 얼굴로 부탁하는 해연의 말을 거절할 수 없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샤워, 하시겠어요”
비밀로 하려면 온몸에 흥건한 식은땀부터 증거 인멸해야 한다. 주희가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작은 소리로 속삭이자 해연이 옅게 웃었다. 하지만 웃음도 잠시뿐이었다. 나아진 척했지만, 여전히 아까의 그 소름 끼치는 감각이 생생했다. 대체 뭐였지
무서워.
그게 뭐였든지 해연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였다. 두려움. 기분이 너무 이상해서 빨리 어디론가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왜 그러세요 혹시 아직도 몸이 안 좋으신 거라면,”
“아니요. 이제 괜찮아요. 그, 씻고 싶어요.”
씻고, 빨리 여기서 벗어나 집에 가야 한다. 그곳이 가장 안전하니까. 아마도.
해연이 욕실로 가려고 하자 주희가 따라왔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혼자 할 수 있어요.”
“안 돼요. 자칫 욕실에서 이런 일이 생기면 정말 큰일 날 수 있어요.”
그때는 이현 님께 비밀로 하고 싶어도 못한다고 주희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거창하게 떨고선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주희의 부축을 받고 욕실에 들어온 해연은 아무 생각 없이 옷을 벗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옅어지긴 했지만, 아직 이현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을 깜박했다. 슬쩍 손으로 몸을 가리며 주희의 눈치를 보는데, 정작 주희는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처럼 평온한 얼굴이었다.
“여기 의자에 앉으세요.”
“고마워요.”
샤워를 도와주는 것도, 이현에게 비밀로 해 준다는 것도, 제 몸에 남은 흔적을 모르는 척해 주는 것까지. 모두 고마웠다. 해연이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자 주희가 곱게 웃었다.
가운만 입은 차림으로 욕실을 나온 해연은 소파에 앉아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현을 보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뒤를 이어 욕실에서 나온 주희 역시 이현을 보고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침에 씻었는데, 또 씻었어요”
그것도 안주희와 함께 이현의 표정이 묘했다. 꼭 바람난 애인을 추궁하는 것처럼 뾰족한 목소리였다.
“조금 전에 식은땀이 심하게 나셔서요.”
“……!”
비밀을 지켜 달라는 부탁을 잊은 듯 주희가 조금 전의 일을 사실대로 말했다. 해연이 깜짝 놀라 주희를 돌아봤지만, 그녀는 커다랗게 떠진 갈색 눈동자를 살짝 피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
“혹시라도 혼자 씻으시면 위험할 것 같아 도와드렸습니다.”
“흐음.”
이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시선이 주희를 떠나 해연에게 닿았다. 양팔을 넓게 벌려 이리로 오라고 말하는 이현에게 해연은 잠시 망설이다 이내 걸음을 뗐다. 손에 닿을 듯 가까이 가자마자 그의 품으로 끌어당겨졌다.
“왜 아픈 걸 비밀로 하려고 했어요”
“걱정할 것, 같아서요.”
“큰일이네요. 거짓말하려던 게 들켜서. 이제 난 해연이 아프지 않다는 말 믿지 못할 것 같은데.”
“지금은 정말 괜찮아요.”
“글쎄요.”
못 믿겠는데요 이현은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날카로운 눈빛에 걸친 걱정스러운 기색에 해연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몸을 돌려 침실을 나가려던 주희를 이현이 잡았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있으면 바로 말해요.”
“이번에는…….”
“내가 어디에 있건, 뭘 하고 있건, 해연이 뭐라고 말을 하건 건강과 위험에 한해서는 반드시.”
“알겠습니다.”
“그 외에는 해연이 하는 말에 따라도 돼요.”
“네, 주인님.”
주희에게 하는 경고였지만, 그 경고를 굳이 해연이 듣는 앞에서 하는 것은 그녀 역시 새겨들으라는 뜻이리라. 주희가 다시 몸을 돌리기 전, 해연은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눈짓을 보냈다. 주희는 차분히 미소를 짓고 공손히 고개를 숙인 뒤 그들과 거리를 넓혀 문 근처에 서서 대기했다.
힘들 텐데. 나가서 쉬는 게 좋지 않을까, 염려 섞인 얼굴로 주희를 따라 고개를 돌리는 해연의 얼굴을 서늘한 손이 제게로 돌렸다.
“증상이 어땠는지 말해 봐요.”
“그냥 식은땀이 조금 나는 정도였어요.”
“식은땀이 조금 났는데, 샤워도 혼자 못 할 정도 일리가 없죠.”
“……정말 별거 아니었어요.”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부모에게 혼나는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해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집요하게 따라오는 시선에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계속 추궁을 받느니 솔직하게 말을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이명 소리가 들리더니 몸이 떨리고 식은땀이 났어요. 잠깐 두통도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고요.”
“……확실히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은 것 같아요.”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당분간은 집에 가지 말고 여기에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