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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아내-31화 (31/113)

31화.

“내가 이런 꼴을 당하면서까지 지 집을 지켜 줬는데 어떻게 한번을 안 들여다봐”

아무리 뻔뻔한 인간이라도 고마운 줄은 알아야 할 거 아냐. 윤시후는 괜히 툴툴거리며 옷장을 열었다. 가장 깔끔하고 무난한 옷을 골라 입은 뒤 거울을 보며 제 모습이 괜찮은지 살폈다.

살짝 뻗은 뒷머리를 손으로 쓱쓱 눌러 가라앉힌 뒤 만족한 웃음을 흘리다 다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씨발, 뭐래”

뭐 한다고 고작 인간 암컷 따위한테 잘 보이려고 해 제멋대로 머리를 헝클어트리던 윤시후는 힐끔 거울을 보고는 헛기침했다.

“아팠다니까 문병 한번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아버지도 잘 보이라고 했으니까.”

주인이 인간 암컷에게 꼬리를 흔들고 있으니 암컷에게 잘 보이면 주인에게 잘 보이는 거나 마찬가지겠지. 재빨리 합리화를 마친 윤시후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다시 머리를 만졌다.

* * *

“집에 간다고요”

“가야죠. 다 나았는데.”

이현의 만류에도 해연은 옷장을 열어 제 옷을 꺼내 입었다. 너무 오래 있었다. 하루만 자고 가려고 했는데 열흘이나 아팠던 탓에 꼼짝도 못 하고 여기에 있게 되었다. 삼 일 전에도 가려고 시도했었지만, 그땐 몸이 갓 나았을 때라 그런지 영 맥을 못 췄다. 그래서 집에 가겠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언제 아팠냐는 듯 몸이 말끔했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기도 했고, 솔직한 말로 집에 가서 편하게 쉬고 싶었다.

여기서도 계속 누워 있었지만, 자신의 침대가 가장 편했다. 이현과 만난 이후로 혼자 있었던 적이 없었다. 면접을 본 날 아주 잠깐 떨어져 있었지만, 곧 이현이 다시 돌아왔으니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이현과 같이 있었던 거였다. 밤이든 낮이든 전부. 이현은 좋았지만, 그는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타인이었다.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어서 매 순간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고, 당연히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아플 때조차 신경 쓰였으니까…….’

이현은 무척 잘생겼다. 잠을 자고 갓 일어났을 때조차 잘생겼다. 적당히 틈이 있으면 이렇게까지 신경 쓰이지 않을 텐데 쓸데없이 잘생겨서 자꾸 제 모습을 검열하게 된다.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간병해 준 이현에게 정말 미안한 일이었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피로였다.

게다가 이현의 집은 본가와 떨어진 독채였지만, 언제 어느 때에 이현의 가족과 마주칠지 몰랐다. 수많은 고용인과 그와 가까운 친척이라고 예상되는 사람들도 사는 곳이다.

해연은 한번 마음을 주면 쉽게 정을 떼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 말을 반대로 말하자면 마음을 주는 데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는 뜻이었다. 이현은 그런 제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빠졌지만, 그의 집까진 아니었다. 솔직히 불편했다.

이현과 떨어져야 한다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깨닫지 못한 채 해연은 열심히 다른 핑계를 만들어 냈다. 그만큼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리에 가득했다.

“그럼 나도 갈래요.”

“그럼 집에 가는 의미가 없잖아요. 아……!”

실수. 해연은 눈을 가늘게 뜨는 이현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적당히 돌려 말해 떼어 놓고 가려고 했는데 따라온다는 이현의 말에 저도 모르게 본심을 말해 버렸다. 시선을 우물우물 아래로 내린 해연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우리 너무 오래 붙어 있었잖아요.”

“나랑 있는 게 싫어서 가는 거였어요”

“아니요. 당연히 좋아요. 하지만 그래도 개인 시간은 필요해요.”

“흐응.”

“정말 싫은 게 아니라니까요.”

“그래요. 나는 해연이 너무 좋아서 계속 함께 있고 싶은데 당신은 그게 아니라는 거죠.”

해연은 더욱 다정해진 이현의 목소리에 입술을 깨물었다. 목소리만 다정했지 내용은 아주 가시가 삐죽 돋아 있었다. 기분이 상한 게 분명했다. 오늘도 집에 못 가겠네. 이대로 집에 갔다간 더 큰 후한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해연이 어깨를 추욱 내려트리고 외투를 벗으려고 할 참이었다. 이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번뜩 고개를 들어 올리니 이현이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농담이에요. 가도 되니까 옷 벗지 말아요.”

“……이건 진짜 그냥 성향 차이예요.”

“응. 알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열심히 변명하지 않아도 돼요.”

이대로 넘어가도 되는 걸까. 자신의 말을 오해한 것이 분명한데 이현이 이렇게 나오니 더 변명하기도 애매했다.

“집까지 바래다줄게요. 그 정도는 괜찮죠”

“당연, 하죠.”

“그럼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요.”

잡을 틈도 없이 이현이 방을 나갔다. 해연은 망연히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다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감정 상한 게 맞는 것 같은데, 웃는 걸 보면 또 그냥 장난친 것 같기도 해서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머리가 복잡했다. 연애를 처음 해서 그런 걸까. 애인을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하는지 기준이 모호했다. 회사 동료와 일반적인 친구 관계와는 너무 달랐다. 어쩌면 자신이 너무 요령이 부족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조심해서 말할 걸 그랬다. 그럼 이렇게 심란하지도, 그가 지금 어떤 기분일까 걱정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해연은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고적한 정원을 보면 조금 나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안녕”

“…….”

창문을 열기 무섭게 넉넉한 품의 흰색 셔츠와 남색의 슬랙스를 걸친 윤시후가 해연의 앞에 나타났다. 그래, 여기에는 이 애가 있었지.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아 잊고 있었던 버릇없던 소년의 등장에 해연이 낯을 찌푸렸다.

다시 창문을 닫을까 안 그래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데 이 버릇없는 애와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다. 머뭇거리며 창문에 손을 올리던 해연은 한숨을 삼키며 손을 다시 내렸다. 이것 봐. 이래서 여기에 오래 있는 게 불편했던 거였다. 이현과 가까울 것이 분명한 사람이 이렇게 툭 튀어나올 테니까. 어떻게 이현이 없을 때만 잘 골라서 나타나는 걸까.

해연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 팔짱을 끼고 소년을 바라봤다. 이 아이는 너무 버릇이 없었다.

“존대, 해 줬으면 하는데.”

“엑 그냥 말 놓으면 안 돼 너도 존대하지 마. 예쁘니까 특별히 허락해 줄게. 아, 내 이름 알아 난 윤시후.”

“…….”

더 들을 것도 없었다. 해연이 단호하게 창을 닫자 윤시후가 간단히 다시 열었다. 해연이 아무리 힘주어 밀어도 윤시후의 힘을 당할 수 없었다.

“아, 왜에. 나랑 좀만 더 얘기하면 안 돼”

“난 예의 없는 사람과 대화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내가 예의 없어…… 요”

윤시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러면서 슬쩍 뒤에 존대를 붙인다.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제 눈치를 보는 모습이 나름대로 순진해 보여 해연은 어린애를 상대로 너무 날을 세웠다고 반성했다.

처음 봤을 때는 진심으로 사과를 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자신과 별로 상관없는 애니까. 이현과 오래 만날 것 같지도 않았고, 그런 상대의 어린 친인척에게 진심으로 사과받기 위해 신경을 쓰는 것 자체가 귀찮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해연은 이제 이현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렇다면 그의 친인척과의 관계도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다. 특히 첫 만남이 무척 기분 나빴던 이 건방진 윤시후라는 소년과.

“미안하다고 해 봐.”

“……뜬금없이 무슨…….”

“처음 만났을 때 말이야. 너 엄청 건방졌어. 그때 진심으로 사과 안 했잖아.”

“그,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요”

“이게. 그걸 어떻게 잊어. 똑바로 사과하면 용서해 줄 테니까. 어서 해.”

“꼭, 해야 돼 ……요”

“응. 꼭 해야 해. 난 이제 이현 씨와 진지하게 만나는 사이거든 넌 이현 씨와 나름 가까운 관계 같고, 그럼 꼬인 걸 풀어야지.”

“…….”

윤시후는 울컥하는 얼굴을 했다가 해연의 눈치를 보더니 입술을 꾹 다물고 자존심 상한 얼굴을 했다. 말을 하기는 싫고, 해야 할 거 같기는 하고, 아주 정신없어 보였다. 해연은 고민하는 소년에게 나름 괜찮은 보상을 제안했다.

“진심으로 사과하면 말 놓게 해 줄 건데 싫다면,”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다신 안 그럴게요!”

“……정말 진심 맞아”

아주 재빠른 사과였다. 해연은 달려들 듯 상체를 내밀어 사과하더니 고개까지 꾸벅 숙이는 윤시후의 행동에 기가 막힌 얼굴을 했다.

“진짜, 정말! 정말 잘못했어요. ……그럼 이제 말 놔도 돼”

“……그래.”

냉큼 말을 놓는 윤시후의 약삭빠른 행동이 황당했지만, 해연은 관대하게 허락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게 환심을 사고 싶어 하는 소년이 조금 귀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윤시후가 슬쩍 해연의 눈치를 보며 어물어물 물었다.

“그럼 그쪽한테는 누나라고 불러도 돼”

해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윤시후가 환하게 웃었다.

‘이 집안 유전자 정말 대단하네. 이현도 그렇고, 이 윤시후라는 애도 그렇고 다 너무 잘생겼어.’

아무래도 자신은 얼굴에 매우 약한 타입이 맞는 것 같다. 잘생긴 소년의 웃음 한 번에 쌓였던 안 좋은 감정이 모두 풀어지자 해연은 왠지 민망해 흠흠, 헛기침했다.

“누나…….”

윤시후는 퍽 수줍은 목소리로 누나라고 한번 부르더니 살짝 붉어진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해연은 아주 쉽게 흘러나온 누나라는 호칭에 조금 의아해졌다. 무척 고집이 세 보이는 아이였다. 그런데 고작 몇 마디 좀 했다고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굴 줄은 몰랐다.

‘의외로 말을 잘 듣네.’

해연은 버릇처럼 손을 뻗어 윤시후의 머리를 쓱쓱 문질렀다. 유영에게 자주 하던 행동이었다. 그리고 이현에게도 한번 했다가…….

‘아무에게도 하지 말아요. 여자에게도 안 돼. 내 거야.’

아차. 뒤늦게 떠오른 이현과의 약속에 해연은 화들짝 손을 뗐다. 얌전히 해연의 쓰다듬을 받던 윤시후가 멀어진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더, 해 주면 안 돼 기분 되게 좋은데…….”

“음, 미안. 이현 씨 전용이라.”

그렇게 말하는 해연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너무 유치해서 말하고도 부끄러웠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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