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이 거대한 일족의 영역은 모두 주인의 본체 위에 자리 잡은 것이었다. 백여 년간 일족에게 관심을 끊은 주인 탓에 이제 그들만의 세상이 온 줄 착각했었다. 하지만 주인이 돌아온 이상 당분간은 쥐 죽은 듯 살아야 한다. 그래야 오래 명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살아 있어야 뒤를 도모할 수 있다.
윤경훈은 제 머리를 휘저었던 주인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흔들렸더라면 주인에게 빌미를 줬으리라. 감히 주인을 향해 발톱을 들이밀기 전에 정신을 차려서 살 수 있었다.
“내 말을 명심해라, 시후야. 주인 앞에서 성질을 죽이고 살아야 한다.”
“…….”
“고작 잡종조차 이기지 못한 네가 주인을 상대할 수 있다고 방심 그게 변명이 될 거라 생각하는 거냐”
윤시후는 제 어깨를 짚고 경고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단 한 번도 제 자존심이 상할 말을 하지 않던 아버지였다. 그런데 고작 주인 하나 돌아왔다고 납작 엎드리고 살라고 한다.
억울하고 짜증 나는데 아버지의 말이 정곡을 찔러서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윤시후는 입술을 꽉 깨물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시후야…….”
“알았으니까 그만 나가세요.”
“……괜히 움직이지 말고, 몸조심해야,”
“알았다고요!”
“……쉬어라.”
얇은 이불 사이로 빛이 꺼졌다. 아버지가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윤시후는 뜨거워진 눈을 손으로 가렸다.
“씨발, 진짜 짜증 나…….”
* * *
정원을 걷는 윤경훈의 발걸음에 힘이 없었다. 어깨에서 힘이 주욱 빠졌다. 사실 주인이 돌아왔어도 윤경훈은 권력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지 못했었다. 잠시만. 잠시만 상황을 보며 시기를 노리려 했다. 하지만 바로 앞에서 목격한 주인의 힘은 철없는 제 아들로서는 감히 대지도 못할 것이었다. 안 그래도 심란하던 차에 죽다 살아난 아들은 고작 잡종에게 당했다고 한다.
“낯부끄러워서 정말…….”
아들 하나 바라보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주인이 돌아온 이후, 모든 과욕이 꺾였다. 늙는다는 게 이런 거였나.
하늘을 보며 허탈한 한숨을 내쉬는데 안재호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눈치가 없는 건지 여우 같은 건지. 윤경훈은 마땅찮게 혀를 내찼다. 안재호는 그런 윤경훈의 표정을 알면서도 천연덕스럽게 다가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후는 깨어났나”
“…….
하여튼 여우 같은 놈. 말이 퍼져 나가지 않도록 최대한 감추려고 했는데 잘도 알아냈다. 하긴. 주인의 곁에 안주희가 있었으니 제 애비에게 다 떠벌렸을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시후의 목숨이 급해 조심치 못한 행동을 한 게 후회됐지만, 아마 다시 돌아가더라도 똑같았으리라. 그땐 시후를 살려야 한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으니까.
“그래. 이현 님께서 살려 주셨다.”
“분명 독이 전신에 퍼져서 살기 힘들다고…….”
곧 숨이 멎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중상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주인은 시체나 다름없는 윤시후를 살려 냈다. 괴물이다. 안재호는 황망한 얼굴로 입을 떡 벌렸다. 그 모습에 윤경훈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왜, 시후가 죽기를 바랐나 보지”
“무슨 말이 그런가. 나는 그냥 걱정돼서 물은 건데.”
믿을 소릴 해야지. 하지만 윤경훈은 순간 치솟아 오른 화를 꾹 눌러 참았다. 주인이 없을 때는 적이었지만, 지금은 그래선 안 되는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안재호는 공동의 적을 둔 동료나 다 없었다.
아니지. 내가 또 헛생각을 하는군. 방금 전까지 욕심을 버리자 해 놓고 버릇처럼 헛된 미래를 꿈꾸고 있다. 윤경훈은 점잖은 얼굴을 가장한 안재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신은 이제 욕망의 끈을 놓으려던 참이지만, 눈앞의 상대는 다를 것이다.
권력은 그 부스러기조차 달콤한 법이다. 가장 높은 자리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할 것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이빨 빠진 짐승처럼 굴 이유는 없겠지. 윤경훈의 마음이 조금 느긋해졌다.
“일단 자리를 옮기지.”
대화하기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주인이 있는 별채와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이동한 그들은 미묘한 감상에 빠졌다. 주인이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이렇게 가까이에서 대화를 나눌 사이가 아니었다.
겉으로는 침중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속으로는 꽤 느긋한 윤경훈과 달리 안재호는 속이 바짝 탄 상태였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먼저 제 속내를 드러냈다.
“자네도 들었겠지 주인님께서 인간 여자를 산실에까지 들였다고…….”
“어차피 인간 따위 금방 죽을 텐데 그게 뭐가 중요한가.”
게다가 인간의 수명은 많아야 백 살이다. 그것도 무척 많이 잡은 거고,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그러니 주인이 잠시 유흥을 즐기게 둬도 상관없다. 처음 여체를 취한 거니 쾌락에 정신이 팔렸을 터였다.
그의 말에 안재호가 마땅찮은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윤경훈은 속으로 안재호를 비웃었다.
안재호는 욕심이 많은 반면, 힘은 그리 강하지 못했다. 그래서 안재호는 딸인 안주희를 이용했다. 주인의 후손이라면 혈통의 정당성이 서니까. 강한 유전자. 주인의 정만 딸의 태에 담을 수 있다면 권력은 당연히 따라오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모든 암컷에게 관심이 없던 주인이 정작 인간 따위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당연히 초조할 테지. 제 딸을 주인에게 붙여야 하는데 난데없이 인간 여자와 재미를 보고 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힐까.
윤경훈이 제 말에 별다른 호응을 하지 않자 안재호는 속이 비틀렸지만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지금 그에게 윤경훈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에.
“생각해 본 것이 하나 있는데, 자네가 화를 내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뭐지”
“인간 여자를 이용하는 거야.”
“……!”
안재호가 하는 말에 짐짓 장단을 맞추던 윤경훈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약해 빠진 인간 여자를 이용하자고
“안재호!”
“쉬이, 이래서 화를 내지 말라고 먼저 말을 꺼낸 거야. 자네는 융통성이 너무 없어. 그저 주인을 자극할 용도로 이용하자는 거지.”
“……자극한다고 주인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게.”
“주인은 인간을 살리려고 힘을 많이 쓰고 있어. 인간의 심장이 한번 멈췄다는 걸 자네도 들었겠지”
“뭐”
“거기에 시후까지 살렸어. 아무리 주인이라고 해도 둘의 생명을 살리고도 멀쩡할까”
죽이는 건 아주 쉬운 일이지만, 생명을 되살리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솔직한 말로 주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도 가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쯤 되면 조금은 타격이 있을 것이다.
안재호의 말은 꽤 그럴싸했다. 윤경훈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안재호의 말에 욕망의 싹이 훅 돋아났다.
‘힘만 세면 뭐 하나. 이렇게 단순한데.’
안재호가 속으로 비죽 웃었다. 힘의 논리에 약한 사자족인 윤경훈이라면 분명 시후를 살린 주인의 힘에 충격을 받았을 거라고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단순해서 욕망을 쉬이 버리지 못했다.
인간 여자를 이용해 주인의 뒤를 쳐보자는 말을 꺼내는 건 그에게도 모험이었다. 윤경훈이 홀랑 주인에게 고해바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안재호는 윤경훈이 그러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렇게 단박에 마음을 바꿔 주인에게 엎드리기엔 무리의 위에 서려는 그의 욕망이 무척이나 짙었기 때문에.
물론 중간에 마음이 바뀌는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놔야 하기에 안재호는 이 모든 대화와 장면을 녹화하고 있었다.
윤경훈은 어차피 일찍 죽을 인간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안재호는 인간 여자를 빨리 치워 버리고 싶었다. 윤경훈은 아들 시후가 있으니 상관없겠지만, 후를 도모하려면 제게도 든든한 후계자가 필요했다. 주인의 피가 섞인 후계자가 필요하단 말이다.
그의 속셈은 주인을 처리하는 게 아닌, 인간 여자를 처리하는 거였다. 주희가 인간 여자를 시중든다는 명분으로 주인 눈앞에 끊임없이 살랑거리고 있으니 기회는 만들어졌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인간 여자가 고마웠다.
안재호는 윤경훈을 발판 삼을 작정이었다. 안전장치는 몇 개로도 부족하니까. 최대한 쌓을 수 있을 만큼 쌓아야지. 그는 사람 좋은 얼굴로 윤경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윤경훈도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 * *
윤시후는 삼 일을 침대에서 뒹굴었더니 몸에서 쥐가 나는 기분이었다. 몸이 나아야 한다는 명분도 있었지만, 방에 처박히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고작 잡종 따위에게 죽을 뻔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분명 처음 보는 놈이었다. 윤시후는 자신이 주인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신했다. 그렇기에 온전한 종족도 아닌, 잡종 따위에게 당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수치스럽게도 놈을 눈치채지 못했다. 감히 자신이 지키고 있는 곳에 침입자가 생길 줄 몰랐다. 그가 내뿜는 냄새와 곳곳에 남은 주인의 영역 표시가 알아서 더러운 것들을 쫓아낼 거라고 방심했던 터라 그 하찮은 잡종이 창을 뚫고 들어온 뒤에야 정신 차렸다.
“아씨. 좆같네, 진짜.”
아무리 한해연의 냄새에 약 빤 것처럼 늘어져 있었더라도 고작 잡종 따위에 당한 것도 모자라 주인의 힘을 빌려 되살아 난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윤시후는 울화를 이기지 못해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거의 다 나은 상처를 확인하고 붕대를 모두 치워 버렸다. 이 정도면 내일쯤엔 흔적만 살짝 남는 정도가 될 것 같았다. 뻐근한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몸을 풀었다. 조금 다쳤다고 본가에 갇혀 사느라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대화 상대마저 없으니 입에 거미줄이 쳐지는 기분이었다.
그 인간 여자. 한해연은 뭐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