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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아내-29화 (29/113)

29화.

‘나와 비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당신뿐이어서 조금 신기했어요.’

‘항상 나쁜 일이 생긴다고요.’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 그래. 항상 나와 같이 보자 말했었다. 그리고 그가 내게 매달리며 잊지 말라고 했었지.

같은 상황이 아닌데 이상하게 그때의 그와 비슷해 가슴이 저렸다. 해연은 그의 볼을 양손으로 잡고 뒤로 살짝 밀어냈다. 손이 닿았을 때 환하게 밝아졌던 얼굴이 밀어내는 순간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해연은 스스로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그의 신음이 귓가에 저릿하게 울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처 입은 짐승처럼 강하게 밀어붙이던 남자가 돌연 온순한 양처럼 얌전히 그녀의 입맞춤을 받고 있었다. 해연은 최선을 다해 그의 입술을 핥고 그의 혀를 빨았다. 축축하게 젖은 점막의 소리가 야릇하게 울렸다. 그리고 남자의 신음도.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남자는 해연의 입맞춤에서 벗어나 허덕이며 가늘게 떨었다.

항상 그에게 휘둘리기만 하다가 반대의 상황이 되니 그가 왜 자꾸 자신을 그렇게 자극하는지 알 것 같았다. 고작 입맞춤 하나에 흐물흐물 풀려서 헐떡이는 그의 모습이 가련해 보였다. 대체 그를 버린 사람은 누구일까. 이렇게 예쁜 남자를 어떻게 버릴 수가 있었을까. 아마도 그 사람은 피가 매우 차가운 사람일 거라고, 해연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향해 악담을 했다. 그와 동시에 자신도 원망스러웠다. 뭐가 무섭다고 그의 손을 피했을까. 이 남자는 이렇게 눈이 움푹 팰 정도로 자신을 돌봐 줬는데…….

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그새 체력이 다한 그녀의 부드러운 상체가 이현에게 깊게 닿았다. 다시 의식을 잃은 것이다.

이현은 긴 숨을 내쉬며 여자를 끌어안았다. 한쪽으로 가지런히 넘겨진 머리카락으로 인해 길고 가는 목덜미가 선연히 드러났다. 이현은 제가 남긴 붉은 자국으로 도배되어 있는 연약한 피부에 입술을 묻었다.

더 편안하게 느껴야 할 그의 접촉을 두려워하고 덜덜 떨었다. 갓 일어났을 때만 해도 생기가 돌던 피부가 완전히 창백해져서는 공포와 혐오가 선연하게 드러나 있었다. 뭘까. 여자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이현의 검은 눈이 깊게 침잠했다.

좋아한다는 말보다 여자의 공포가 더 반가울 줄은 몰랐다. 천국을 떠돌다가 강제로 지옥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천국이라니. 그런 것 따위 제 몫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그래서 여자의 반을 먹고, 나머지 반을 제 것으로 채웠다. 여자는 이미 제 곁이 아니면 살 수 없는 몸으로 만들었다. 자신이 갈 수 없는 곳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여자의 진심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걸 바라는 건 그에게 사치니까. 그저 만들어진 마음이라도 손에 넣고 싶을 뿐이었다. 그 정도는 바라도 될 것 같아서. 하지만 여자가 제가 만들어 낸 감정을 입으로 말하는 순간 알았다. 이건 아니라고. 너무 늦은, 끔찍할 정도로 잔인한 자각이었다.

이현이 결국 허탈하게 웃었다.

‘당신은 항상,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날 상처 입혀요. 항상…….’

그게 의도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너덜너덜해진 심장이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다.

이현은 깊게 끌어안고 있던 해연의 몸을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해연의 몸을 푹신한 솜이불로 꼼꼼하게 덮고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라고 속삭였다.

‘당신이 좋아한다고 했던 말은 나만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 앞으로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그래야 당신이 그나마 무사할 수 있을 테니까.

가장 바라던 것을 들었는데 왜 이렇게 처참한 기분이 드는 건지. 이현은 해연의 이마를 부드럽게 만졌다. 실제로 존재하는 여자가 마치 허상처럼 느껴져서.

‘현아.’

제게 이름을 지어 주고 사랑스럽다는 듯 속삭여 주는 여자는 어디에도 없는데. 그 모든 걸 망쳐 버린 것은 자신인데…….

한참이 지나서야 이현의 시선이 문가에 숨죽이고 서 있는 주희에게 잠시 스쳤다.

“운이 좋네요.”

그가 내리는 눈을 맞고도 살아 있음을. 주희는 주인의 말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해연에게 하세요.”

“부족함 없이 잘 모시겠습니다.”

“그래요.”

이현의 시선은 무심하기만 했다. 주희는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건 주인에게 큰 의미가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무의미한 짓을 해서 주인의 심기를 굳이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살얼음판 같았던 침묵을 깨 준 것은 윤시후의 아버지 윤경훈이었다. 윤경훈은 사색이 되어 이현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이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현 님!”

“내가 마음대로 안에 들어오라고 했던가요”

“죄송합니다. 급한 건이라…….”

허리를 깊게 숙인 윤경훈의 목소리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주희도 그 급한 건이라는 것에 궁금증이 생겼다. 심지어 그는 이 자리에 이현뿐 아니라, 주희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후가…….”

홀로 주인의 여자 집을 지키고 있던 시후가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너무 늦게 발견했다. 일주일간 연락이 되지 않았지만, 늘 제멋대로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해서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대수롭지 않게 넘긴 것이 문제였다. 이상한 예감에 시후를 찾았을 땐, 배에 깊은 자상과 함께 독이 전신에 퍼져 죽음의 기로에 놓인 상태였다. 살 방법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주인이 힘을 나눠 준다면……, 그렇다면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이현이 그의 입을 막았다.

“윤시후의 일이 설마 급한 건이라는 건 아니겠죠.”

“……이현 님.”

“멍청하게.”

이현의 손이 윤경훈의 턱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별다른 힘이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턱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강제로 맞춰진 주인의 검은 눈동자에 머리가 뿌옇게 흐려졌다.

“내가 나타나서 계획하던 일이 모두 틀어졌죠.”

“이, 이현 님, 저는,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고 변명하던 윤경훈은 차라리 입을 다물었다. 이미 주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건 주인을 기만하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더듬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주인의 새까만 눈이 가슴 밑바닥에 숨겨 놓았던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이었다. 머릿속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어지럽다.

주인은 왜 깨어난 걸까.

지금까지 짐승의 형태로 오랜 시간 동안 살아왔던 주인은 세상에도 일족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인간과 동떨어진 삶을 살던 그들이 은근슬쩍 인간과의 연을 만들어 세를 늘려 나가도 주인은 무관심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제자리를 찾아 약하디약한 인간 여자를 품에 끼고 돌보는 이유가 대체 뭘까.

주인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의 혈통이 일족을 지배했을 텐데!

“……!”

무슨 미친 생각을 하는 건가. 윤경훈은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피가 배어 나오도록 힘을 주니 통증으로 정신이 잠시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주인의 손이 윤경훈의 턱에서 떨어졌다. 주인의 시선이 윤경훈의 뒤를 응시했다.

“윤시후가 정신을 차렸을 겁니다. 이만 돌아가세요.”

“감사, 합니다.”

“천만에요.”

눈을 접으며 달콤하게 웃는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섬뜩하게 소름이 끼쳤다. 독을 품은 웃음이기 때문이었다. 윤경훈은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한 뒤 도망치듯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 모든 일을 바로 앞에서 지켜본 주희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주인에게 제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토해 낼 것 같아서…….

“잘 참았어요.”

그 정도면 해연을 곁에서 돌볼 자격이 있다며 이현이 웃었다. 주희의 눈이 일그러졌다. 입을 열 수가 없다. 정신없이 허공을 헤매던 눈동자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 * *

“시후야!”

단숨에 아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온 윤경훈은 주인의 말대로 정신을 차린 시후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씨 쪽팔리게…….”

윤시후는 아버지의 안도한 얼굴이 보기 싫어 이불을 휙 뒤집어썼다. 고작 잡종 따위에게 당했다는 것도 짜증 나고, 아버지가 저런 얼굴을 하는 것도 싫었다.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되면 일족의 우두머리가 될 거라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는데, 주인이 돌아온 이후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태산 같던 자존심이 왕창 구겨져 너덜너덜해졌다.

문가에 서 있던 아버지가 침대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 그의 곁에 앉았다.

“누구냐. 누가 널 그렇게 만들었지”

“묻지 마요. 그 새끼는 내가 죽일 거니까.”

“하아…….”

윤경훈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문질렀다. 주인이 돌아올 걸 생각하지 못한 채 미래만 보고 너무 오냐오냐 키운 것이 후회스러웠다. 철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순혈은 모두 본가에서 관리하고 있다. 네가 이렇게 될 정도라면 분명 가문에 소속되어 있는…….”

윤경훈의 말이 문득 멎었다. 아들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새빨갛게 붉어진 것을 본 것이다. 설마.

“설마, 순혈이 아닌 상대에게 당했다는 거냐”

“아이씨! 방심해서 그런 거라고요!”

윤시후가 시트를 훌쩍 밀어내고 짜증을 냈다. 안 그래도 자존심이 상해 있는데 불을 붙였다.

아들의 반응은 확답이나 다름없었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가정이었다. 순혈이 아니라고 내 아들이, 주인만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수장이 되리라 믿을 정도로 강하게 태어난 아이가 고작, 잡종 따위에게 죽을 뻔했다고 윤경훈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이걸 다른 사람이 안다면 얼굴도 들고 다닐 수 없을 것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절대로!”

“이걸 누구한테 말해요. 아, 진짜 쪽팔리게…….”

“하아…….”

이 철부지 같은 놈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윤경훈은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님께서 살려 주신 거다.”

“그 새끼 아니었어도 안 죽었어요!”

“윤시후! 입 조심해. 지금은 네가 예전처럼 굴어도 될 상황이 아니란 걸 명심해라.”

모두를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아버지의 흉흉한 말에 윤시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앞으로 주인님 말을 잘 들어. 그래야 우리 모두가 산다.”

“아, 아버지…….”

“넌 어떻게 해도 주인님을 이길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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