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며칠이에요”
“얼마나 앓고 정신을 차린 건지 묻는 거라면, 일주일 만에 의식을 차린 거라고 대답해 줄게요.”
시계를 찾아 벽을 헤매던 해연의 시선이 일주일이라는 말에 곧장 이현에게로 돌아갔다.
“일주일이요”
“건강하다더니 그렇게 앓아요.”
걱정돼서 잠도 제대로 못 잤다는 남자의 얼굴은 꽤 지쳐 보였다. 원래도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가 오늘따라 핏기가 더 없었다. 일주일이나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앓았을 자신을 두고 고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얼굴이 저렇게 될 정도라면 일주일을 앓았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리라.
왜 이렇게 아팠지 원인을 찾아 곰곰이 생각하던 해연이 눈을 치켜떴다.
“당신 때문이었잖아요!”
“……보통은 섹스 한번 했다고 그렇게 죽을 듯이 앓지 않아요.”
“그건 그냥 일반적인 음, 섹스가 아니었잖아요…….”
어물어물 변명하던 해연은 이현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너무 심각해서 조금은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 생각으로 한 말이었는데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다.
“당신이 끝내주게 반응하긴 했죠. 하지만 그래 봤자 섹스였어요. 나는 당신이 그렇게 아플 줄은 몰랐어요. 심장이 한번…….”
끝내 말을 잇지 못한 남자가 떨리는 숨을 토하더니 눈을 감았다 천천히 떴다.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핏기가 가신 창백한 얼굴의 푹 꺼진 눈에 진 깊은 그림자가 음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해연이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그는 정말 힘들어 보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해연은 그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다 손을 뻗어 이현의 손등을 토닥였다. 이현이 그녀의 행동을 보더니 쓰게 웃었다.
“당분간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새 잊은 거예요”
“음. 내가 만지지 않는다고는 안 했으니까요. 싫어요 빼요”
해연이 짐짓 으름장을 놓았다. 그가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한 장난스러운 말이었는데, 이현이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손등을 살짝 덮었던 그녀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낸 것이다. 아예 닿지도 못할 정도로 멀리에 두자 해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당분간은 닿지 않는 게 좋겠어요. 난 당신만 봐도 수시로 발정 나서요. 그러다 당신이 또 아플까 두려워요.”
“그럴 리가 없…….”
“당신은 몰라요. 내가 얼마나 겁먹었는지. 당신은 정말 죽을 것 같았어요.”
그러니 아프지 않을 거라는 확신 따위 하지 말라고, 이현이 단호히 말했다. 해연은 입을 다물고 그의 눈치를 봤다. 그의 반응은 너무 심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몸살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심하게 아팠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기분 좋아.’
무심결에 든 생각에 해연은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가 걱정해 주는 것이 좋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이 정도의 걱정을 받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얼굴이 다 상할 정도로 마음고생 시킨 게 미안했고, 그 사실에 기뻐해서 또 미안했다.
해연은 열심히 표정 관리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이렇게 심각한데 여기서 웃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에도 티가 났는지 이현이 눈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웃어요”
“……!”
해연이 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현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내가 만지지 않겠다는 게 그렇게 좋았어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럼요”
“……걱정해 주는 게 좋아요. 아무도 당신처럼 날 걱정해 주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혼자서도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했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현의 걱정이 이렇게 기분 좋은 걸 보면.
해연은 솔직하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미안하면 나한테 시집와요.”
천천히 가자고 말한 것이 얼마 전인데, 이번에는 진심으로 그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해연은 눈만 깜박이며 그를 바라봤다. 이현의 입술이 길게 늘어졌다.
“아니면 내가 해연에게 시집갈까요”
“네”
“내조 잘할 수 있어요.”
이현은 그렇게 말하며 해연의 팔에 꽂힌 링거 바늘을 뽑았다. 바늘이 뽑히자 핏물이 조금 흘러내렸다. 이현은 능숙하게 탁자 위에 있는 알코올 솜으로 핏물을 닦아 내고 밴드를 붙였다. 해연은 얌전히 그 과정을 지켜봤다. 지금 자신의 몸이 가뿐한 것도 그가 계속 돌봐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좋은 남자예요, 이현은.”
“……그렇게 말해 주니 기분 좋네요.”
계속 그렇게 생각해야 할 텐데. 이현이 나른하게 웃었다.
“아빠 같아요.”
“아빠…….”
유려한 눈매가 일그러졌다.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을 못 본 척 해연은 그의 눈가를 손으로 더듬었다. 살짝 올라갔던 눈꼬리가 슬며시 내려간다. 해연의 입술 끝이 위로 올라갔다.
“오빠 같기도 하고…….”
“하고”
“다정한 남자예요.”
“음, 그건 마음에 드네요.”
“좋아해요.”
해연이 배시시 웃었다. 좋아한다. 저도 모르게 한 말이었지만, 그만큼 진심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던 거 같아요.”
“……그래요”
살짝 상기된 얼굴로 수줍게 고백하는 그녀를 말없이 보던 이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어딘가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무 일렀던 건가 해연은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계속 결혼하자고 했던 건 그였다. 빠른 건 결혼하자는 말이지, 좋아한다는 고백이 아니다. 해연의 상식으론 그랬다.
그런데 이현의 대답이 이상했다. 좋아한다는 말에 고작 ‘그래요’라니. 해연이 짐짓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싫어요”
“아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기뻐요.”
정말, 진심으로 기뻐요. 그렇게 말하는 이현의 표정은 여전히 웃음기가 없었다. 많이 봤던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을 볼 때마다 짓던 무심한 표정. 하지만 제게 이런 표정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왜’
좋아한다는 말이 싫었던 걸까 하지만 이현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느꼈다. 진심으로. 그러니까 계속 결혼하자고 하고, 얼굴이 핼쑥해질 정도로 걱정하며 간병했던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해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기쁜 거 맞아요 왜, 안 웃어요 혹시 싫은 거라면…….”
“아니요. 너무 놀라서, 좋아한다는 말을 해 줄지 몰라서 그랬어요.”
이현이 손을 들어 입가를 더듬거렸다. 입꼬리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더니 아, 하는 감탄사를 흘렸다.
“분명 웃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기뻐서 웃음도 나오지 못했던 것 같다며, 이현이 손을 내리며 그림처럼 웃었다. 붉은 입술이 올라가면서 하얀 치아가 살짝 드러났다. 남들에 비해 뾰족한 송곳니가 어쩐지 섬뜩해 해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밀었다. 이현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요 아직도 몸이 안 좋아서 그래요”
“아뇨…… 갑자기, 몸이…….”
이상해서……. 왜인지 몸이 자꾸 떨렸다. 지금 그가 보인 웃음은 항상 그녀에게 보이던 표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소름 끼치게 낯설다.
“혹시 추워요 방 온도를 조금 더 올릴까요”
이현은 허리 아래로 흘러내려 간 시트를 다시 끌어 올려 해연의 몸에 덮었다.
추운 걸까. 그래. 추워서 이러는 거겠지.
해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그녀를 유심히 보던 이현은 옅은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방 온도를 올리기 위해 침대를 벗어나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토해 졌다. 선연하게 떨리던 심장의 박동도 제자리를 찾아간다.
따뜻한 시트를 몸에 둘러 감아도 잔열처럼 남은 떨림은 여전했다. 온도를 조절하고 몸을 돌린 이현은 애벌레처럼 몸을 동그랗게 만 해연을 보고 작게 혀를 찼다.
“그렇게 추웠으면 진작 말을 했어야죠.”
“모르겠어요. 갑자기…….”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나 봐요.”
이현이 다시 돌아와 침대 위에 무릎을 올리자 해연의 몸이 크게 튀었다. 단숨에 뒤로 물러나 눈에 보일 정도로 떠는 해연의 이상 행동에 길게 늘어진 유려한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좀 이상하네요.”
“네! 아, 아니…… 이건, 저기…….”
“내가 곁에 있는 게 싫어서 그래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럼”
“……나도 모르겠어요.”
차갑게 굳은 검은 눈동자를 마주 볼 수가 없어 해연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침대의 매트를 받치고 있는 하얗고 곧은 손에 있는 붉은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이빨로 물어뜯은 것처럼 너덜너덜한 흉터는 살점이 벌어진 채 선명한 핏기를 보였다.
“손이……!”
“지금 내 손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중요해요.”
해연은 그가 손을 뒤로 빼려는 걸 잡아채 자세히 들여다봤다. 조금 전까지 손끝만 닿아도 떨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의 상처에만 신경이 쏠렸다. 상처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꽤 깊게 벌어져 있어 일견에도 아파 보였다.
눈을 잔뜩 찌푸린 채 자신의 손을 보고 있는 해연을 이현은 말없이 바라봤다. 검은 눈동자가 깊게 침잠해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 그는 해연에게 잡힌 손을 그대로 두고 다른 손으로 해연의 턱을 잡아 올렸다. 조금 전까지 최대한 닿지 않게 조심하던 것도 잊었다는 듯 그녀가 대응할 틈을 주지 않은 채 깊게 입을 맞췄다.
“으응!”
놀라서 벌어진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뱀처럼 기어들어 갔다. 이런 식의 키스는 처음이었다. 친밀하고 농도 짙은 접촉이 아닌, 어딘가 차갑고 탐색하는 듯한 강압적인 입맞춤에 해연이 숨을 헐떡거리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그를 무서워하고 꺼리는 기색은 아니다. 그저 그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해 힘들어하는 정도여서 날카롭게 빛나던 이현의 눈동자에 힘이 빠졌다.
“하, 하아…… 흣!”
“내가 싫어진 줄 알았어요.”
“아!”
“해연에게 버려질 것 같아서, 무서웠어요.”
“으응…….”
그럴 리가 없는데. 이현은 어딘가 절박하게 매달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련하고 연약한 목소리. 함께 비를 맞았을 때와 비슷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