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의 아내-27화 (27/113)

27화.

“……!”

윤시후는 제 몸으로 쏟아지는 유리 조각을 피해 몸을 뒤로 물렸다. 조금 전까지 행복하게 뒹굴었던 집안 곳곳에 유리 조각들이 튀어 퍼졌다. 저절로 욕이 나오는 광경이었다. 어떤 새끼가 이 지랄을 했는지 얼굴이나 좀 보고 죽일 작정이었다. 잠시 후 텅 빈 창문으로 곱상하게 생긴 남자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남자는 윤시후를 보더니 살짝 눈을 찌푸리고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네가 한해연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여자라고…….”

“뭐라는 거야, 이 정신 나간 새끼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와. 윤시후가 빠르게 간격을 좁히며 달려들었다. 남자는 눈을 크게 뜨더니 본래의 몸을 드러냈다. 인간의 모습을 가장했던 몸이 순식간에 부풀어 인간도 짐승도 아닌 불완전한 몸이 나타났다.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순혈인 척했지만, 역시나 잡종이었다. 거친 털이 듬성듬성 나 있는 괴물 같은 몸이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썩을 것 같다.

하지만 잡종은 육중한 몸에 비해 굉장히 재빨랐다. 윤시후의 공격을 쳐낸 잡종이 길고 두꺼운 팔을 휘둘렀다. 윤시후가 몸을 비틀어 피하자 잡종의 주먹이 벽을 스쳤다. 살짝 스쳤을 뿐인데 건물이 흔들렸다. 이러다 한해연의 집이 망가질 기세였다.

윤시후는 자신을 보호하는 것보다 한해연의 집을 보호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았다. 멍청한 행동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주인에겐 제 목숨보다 한해연의 집이 더 소중할 테니까. 그리고 자신에게 있어 지상 낙원인 곳을 고작 하루도 채 즐기지 못하고 망가트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힘의 절반 이상을 분산시키더라도 윤시후는 질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잡종을 상대로 전력을 다해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절반도 안 되는 개방만으로도 가볍게 이길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보호막을 제 몸이 아닌 집 안에 두르자 잡종이 그 틈을 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윤시후가 거대한 사자의 형태로 변해 입을 벌리고 포효했다. 묵직한 소리의 파동에 달려들던 잡종의 몸이 그대로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보호막을 두르지 않았더라면 건물 전체가 금이 가 무너졌으리라.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잡종이 한번 몸을 경련하더니 바닥으로 쓰러졌다. 다시 사람의 형태로 돌아온 윤시후가 잡종을 향해 다가갔다.

“별 쓰레기 같은 잡종이 어디서 까불어”

“…….”

“이걸 언제 치우지 씨발, 짜증 나.”

중간에 보호막을 치긴 했어도 사방에 깔린 유리 조각들이 문제였다. 그나마 거실만 이런 거니 다행이긴 한데……. 주변을 돌아보며 처리할 견적을 뽑고 있을 때였다. 온몸에서 피를 쏟으며 널브러져 있던 잡종이 무기를 꺼내 그의 옆구리를 박고 비틀었다. 그 순간 독이 혈액을 타고 온몸에 퍼져 나갔다.

“죽어, 이 멍청한 새끼야.”

“이, 미친…….”

윤시후는 욕설을 짓이기며 손톱을 길게 꺼내 잡종의 옆구리에 그었다. 두 사람의 피가 집 안 곳곳에 튀었다.

한 번 더 공격해 끝을 내려던 윤시후가 비틀거리자 잡종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해연의 집에서 도망쳤다. 잡아야 하는데. 잡지 못하더라도 죽여야 한다. 하지만 옆구리부터 시작해 타고 오르던 독이 순식간에 그의 머리까지 도달했다.

‘아씨, 쪽팔려.’

고작 잡종에게 당해서 이런 꼴을 하냐고 모두가 엄청 비웃겠지 윤시후는 거의 의식이 사라지는 순간, 강이현의 품에 안겨 예쁘게 웃던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른 사람은 다 그를 비웃어도 그 여자는 안 된다.

‘씨발, 내가 이 집을 얼마나 열심히 보호했는데…….’

그러니 그 여자에게만큼은 감사의 인사를 받아도 모자랐다. 윤시후가 제 급박한 상황도 잊고 한해연을 생각하다 울컥 검은 피를 토했다.

‘집에 연락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지금은 독이 너무 퍼져 손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두워진 시야와 함께 간신히 버티고 있던 다리가 훅 꺾였다.

* * *

주희는 이현이 내린 눈에 며칠을 꼬박 앓았다. 주인이 왜 자신을 해치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틈만 나면 제게 찾아와 주인의 여자에 대해 캐내려는 아버지를 보고 이런 점 때문이지 않을까 막연하게 추측했다. 허튼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한 거라고.

그게 진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주희는 주인을 원망하기보단 그의 능력을 경외했다. 자연을 제 마음대로 움직이고, 그것에 제 의지를 심어 뜻대로 이용할 수 있는 정도의 힘이라니. 그런 힘을 가진다는 건 대체 어떤 기분일까.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겠지.’

조금만. 아주 조금이라도 그 기분을 느껴 보고 싶다.

가능할 리가 없지. 주희는 피식 마른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한가롭게 넋을 빼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주인에게 가기 위해 일어난 주희에게 그녀의 아버지가 ‘또’ 찾아왔다.

“요즘 몸은 어떠냐.”

“이제 괜찮아요. 약도 먹었고요.”

고작 그런 안부를 묻기 위해 온 것이 아니지 않냐는 주희의 차가운 시선에 안재호가 머쓱한 얼굴을 했다.

“주희야, 이현 님이 정말 인간에게 마음이 있으신 거냐”

“글쎄요. 지금으로서는 그런 것 같습니다.”

산실까지 데려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앓아누운 제 귀에 처음으로 들려온 게 그거였으니 이미 일족 전체에 퍼졌다는 뜻이리라. 그러니 주인의 의도를 파려고 노력하는 아버지의 행동은 부질없는 것이다. 기력이 없으니 더 말 시키지 말라고 하려던 찰나, 안재호가 석연치 않은 얼굴로 입술을 뗐다.

“이현 님이 데려온 인간도 꽤 아팠던 모양이더구나. 고작 인간에게 피를 내어 주며 아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것 같다.”

“뭐라고요”

깜짝 놀라 주희가 몸을 일으키려는데 안재호가 말렸다.

“지금은 멀쩡하니 누워 있어.”

“왜…….”

주인의 피가 필요할 정도로 아팠다고 한해연은 자신처럼 아무런 보호 없이 눈을 맞은 것도 아니었다. 주인이 철저하게 나쁜 영향이 가지 않도록 막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해연은 단지 제가 추위를 타는 줄 알았겠지만, 그녀가 들어가라고 하지 않았다면 주희는 이렇게 금방 의식을 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하여튼 이현 님께서 보통 신경 쓰시는 게 아니어서 더 걱정이구나.”

“주인님께서 선택하신 분이니 저희는 따르면 되죠.”

“고작 인간 따위를…….”

얼굴을 찌푸린 채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버지를 향해 주희는 노파심 섞인 경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세요.”

“당연한 소리를 하는구나.”

짐짓 태연한 얼굴로 대답하는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믿을 만큼 주희는 순진하지 않았다. 주인은 무심한 성격이었지만, 그렇다고 기어오르는 자를 용납해 주는 성격도 아니었다. 주인을 모신 것은 얼마 되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주희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한해연이라는 인간 여자에게 붙어야 한다고.

아버지야 자신을 주인에게 붙이고 싶어 하지만 주희는 현실을 알았다. 주인이 짐승의 형태로만 있었을 때, 시도해 보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발정기에 맞춰 저 역시 짐승의 형태로 접근해 봤지만, 눈길 한번 받지 못했다. 짐승일 때 가장 본능적인 욕구가 폭발하는데 주인은 권태로운 얼굴을 할 뿐이었다.

그런 주인이 어디선가 인간 여자를 품에 안고 왔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로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약한 인간에게 집착하고 있다.

그런 수컷에게 미련은 무슨.

못 먹을 감은 빨리 포기하고 다른 감을 찾는 게 낫지. 다행히 주인의 여자는 순진했다. 주인도 제 여자에게 살랑거리는 자신을 쳐내지 않았다.

그날, 더 늦게 안으로 들어왔다면 큰일이 났었겠지만, 그래도 그 무심한 주인이 여자의 말을 듣고 빨리 들여보내 주어 살았으니 오히려 더 좋은 결과가 되었다. 여자가 하는 말은 절대 흘려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

줄을 잘 골랐다고 안도했는데, 주인이 제 피를 먹일 정도로 아팠다고 설마 건강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주인의 여자가 너무 빨리 죽어도 문제였기에 주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차갑게 굳은 그녀의 시선이 안재호에게 닿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한해연이 아팠다고 주인이 다른 이에게 도움을 청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는 건 주인의 곁에 제 귀를 심어 놓았다는 뜻이리라. 그녀의 날카로운 질문에 안재호가 머쓱한 얼굴로 크흠, 헛기침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게 어떻게 쓸데없는 짓이라는 거냐. 모두 너를 위해 그러는 거니 너는 잠자코 이현 님 곁에 잘 붙어 있으면 된다.”

“주인님은 제게 관심이 없어요.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이뤄지지 않아요. 절대로.”

“그거야 지나고 봐야 알 일이지. 아픈데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구나. 쉬렴.”

“아버지!”

안재호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자못 인지한 웃음을 지으며 방을 나가 버렸다. 그를 따라가려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던 주희의 발이 순간 훅 꺾였다.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는데 무리를 한 탓에 숨도 헐떡거렸다.

아버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이렇게 한가롭게 시간을 보낼 수 없다. 인간 형체였던 그녀의 몸이 본체로 돌아갔다. 인간의 형태보다 짐승의 형태가 회복력이 빠르기 때문이었다.

* * *

생각보다 많이 잔 기분이었다. 푹 자고 일어났는데 개운하다기보다는 몸이 둔했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해연은 고개를 돌려 제 곁에 누워 있는 이현을 바라봤다.

“…….”

어쩐지 얼굴이 야윈 것 같아 해연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창백한 피부에 손이 닿기 무섭게 그의 눈이 뜨였다. 그녀가 만지길 기다렸다는 듯이. 살짝 눈꼬리가 내려간 나른한 눈이 그녀를 확인하고 곱게 휘었다.

“남자를 함부로 만지면 큰일 난다니까요.”

“어떻게 큰일 나는데요”

이전에도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하며 해연은 그의 말에 장단을 맞췄다.

“글쎄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잡아먹고 싶은데…….”

그 몸으로는 무리겠죠. 나른하게 뜬 검은 눈동자가 해연의 얼굴을 핥았다. 항상 보던 시선인데 왜 이렇게 오랜만이란 생각이 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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