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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아내-23화 (23/113)

23화.

그에게 안겨 있어서 얼굴을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해연은 소리 없이 한숨을 쉬며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는 하얀 하늘을 바라봤다. 잠시 거셌던 바람은 다시 잠잠해져 눈발이 평온해졌다. 눈앞이 안 보일 정도였는데 이제는 조금 떨어져서 서 있는 주희가 보였다.

자신 못지않게 따뜻하게 입고 나온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하얗게 굳어서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게 멀리서도 보일 정도였다.

“주희 씨가 추운가 봐요. 먼저 들어가게 하는 게 어떨까요”

해연의 등을 쓰다듬고 있던 손이 잠시 멈췄다. 대답이 없어 한 번 더 말하며 재촉하니 그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해연이 말해요.”

“네”

“그녀의 현재 임무가 당신을 보살피는 거니 내가 말해도 듣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들어가라고 해야 들어가겠죠.”

“저는 손님이잖아요.”

“그리고 미래의 안주인이죠.”

“……이현.”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모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나는 가벼운 연애로 끝낼 생각 없어요. 당신을 놓을 생각이 없고, 당신도 나 없이 살아가지 못해요. 그러니 나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세요.”

마음이 뜨끔해지는 소리였다. 해연은 순간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눈을 깜박이기만 했다. 입 밖으로 꺼낸 적 없던 속내를 낱낱이 그에게 읽혔다. 이현이 낮게 웃었다.

“해연이 들어가라고 말하지 않으면 계속 저렇게 서 있을 텐데 괜찮겠어요”

“……정말 내가 말해야 해요”

“네.”

그는 전혀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여지가 없는 단호한 목소리에 해연은 주저하다 주희를 향해 손짓했다. 자신이 시간을 끌수록 주희는 계속 벌벌 떨며 버텨야 했다.

“부르셨어요”

그녀가 손짓하기 무섭게 가까이 온 주희의 고운 얼굴은 더 안쓰러워 보였다. 진작에 들어가게 할걸. 이현과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워 그녀를 방치한 것이 미안했다.

“먼저 들어가 계시라고요.”

“네 아뇨, 저는…….”

“계속 떨고 있잖아요. 들어가세요. 저는 이현과 더 구경하고 들어갈게요.”

해연은 이현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도와달라는 뜻이었다. 짐짓 모르는 척 반응을 보이지 않던 이현은 계속 이어지는 채근에 고개를 돌려 주희를 바라봤다. 주희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들어가세요.”

“……네.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자신이 말을 해도 버티던 주희가 이현의 허락이 떨어지자 바로 몸을 돌려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말해야 들어갈 거라더니 거짓말이었다.

“날 속였어요.”

“익숙해지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어요. 봐요. 별거 아니잖아요.”

사람을 부리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며 쉽게도 말을 한다. 해연은 이현의 목을 조이듯 강하게 끌어안았다가 상체를 벌렸다. 이현은 고개를 위로 올려 그녀를 바라봤다.

“왜요”

“이제 내려 주세요.”

“혹시 화났어요”

“아니에요. 손잡고 걷고 싶어서 그래요.”

어차피 그가 추위를 타지도 않는 것 같았기에 온기를 준답시고 끌어안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드디어 땅에 발을 딛고 선 해연은 조금 차가운 이현의 손을 잡았다. 땅에는 그새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푹푹 깊게 잠기는 신발에서 뽀드득 소리가 났다.

새하얀 눈이 내리는 고적한 정원에서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았다. 마음 한켠은 그가 했던 말 때문인지 무거웠지만, 해연은 굳이 티를 내지 않고 이 시간을 즐겼다. 어쩌면 생각보다 더 짧을지도 모르는 그와의 시간을 불필요한 고민으로 버리고 싶지 않았다.

* * *

이현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둥근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새끼가 태어났어요.”

“새끼요”

동물의 새끼를 말하는 걸까 해연이 되묻자 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키우는 개가 새끼를 낳았어요. 보러 갈래요”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을 텐데, 괜찮아요”

“지금은 멀쩡해요.”

그래도 외부인이 보는 건 해산한 어미에게 좋지 않을 텐데. 예전에 회사 주차장 어귀에서 고양이가 새끼를 낳은 적이 있다. 그때 인터넷을 미친 듯이 뒤져 새끼 고양이와 어미에게 필요한 것과 주의해야 할 것을 배웠다. 절대로 새끼에게 손을 대지 않고 돌봐 주려고 노력했는데, 어미 고양이는 해연이 제게 해를 끼치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제 새끼를 물어다 그녀에게 넘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고양이가 독특한 거지, 이현이 키우는 개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해연이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말하자 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짐승이라면 모두 해연을 좋아하는 게 당연해요.”

그래서 내가 당신을 좋아하잖아요. 마치 비밀이야기라도 하듯 고개를 숙여 귓속말을 한다. 해연은 어처구니없어서 그냥 웃어 버렸다.

“나중에요. 새끼가 좀 더 자라고, 어미가 건강해졌을 때 볼게요.”

“맹세컨대, 분명히 모두 해연을 좋아할 거예요. 싫은 기색이 보이면 그때 나오면 돼요.”

정말 그럴까 자꾸 이현이 부추기니 조심스럽던 해연도 살짝 혹했다. 갓 태어난 강아지는 굉장히 귀여울 테니까. 주인인 이현이 이렇게 확신에 차서 말할 정도라면 어미 개가 사람을 유독 좋아하는 걸 수도 있다.

“아주 조금이라도 꺼리는 기색이 보이면 나오는 거예요.”

“그래요. 그렇게 해요.”

하지만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며 이현이 자신했다.

* * *

해연은 이현의 안내에 따라 천천히 길을 걸었다. 이현이 거주한다는 별채 옆에는 작은 마을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건물들이 모여 있었다. 이현은 이곳이 ‘본가’라고 했다. 건물은 고아한 한옥으로 지어져 있었고, 둥근 기와에 보송한 눈이 부드럽게 내려 고즈넉한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해연은 나뭇가지 위에 소담히 쌓인 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게 무척 예뻐 만져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손이 눈에 닿기 전에 이현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차가워요. 그러다 감기 걸려요.”

“눈 조금 만졌다고 무슨 감기예요.”

“아니요. 틀림없이 아플 거예요. 난 해연이 조금이라도 아프길 원치 않아요.”

“무슨 애도 아니고.”

“애만 감기에 걸리는 건 아니죠. 당신은 너무 연약하고, 부드러워서 조금만 눌러도 무너질 것 같아요.”

이현은 진지한 얼굴로 얼토당토않는 말을 했다. 해연은 자신이 건강한 체질이라고 자부했다. 그동안 자잘한 병치레도 없이 건강히 잘 지내 왔기 때문이었다. 저를 약하다고 걱정하는 이현을 고맙게 생각해야 할지, 혹은 어이없어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렇게 생각하면서 밤마다 사람을 그렇게 잡아요”

“내가 언제요 얼마나 조심하면서 안았는데 너무해요.”

욕심껏 했더라면 당신은 지금 일어서지도 못할 거라고 이현이 신실한 얼굴로 장담했다. 금욕적인 얼굴을 하고는 맞잡은 손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며 성감을 자극했다. 해연은 질린 얼굴로 살짝 뒤로 물러섰다.

“짐승도 당신보단 나을 거예요.”

“그건 해연이 진짜 짐승을 경험하지 않아서 하는 말이죠.”

꽤 길게 걸어가고 있었지만, 지루하다거나 힘들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이현과 손을 잡고 걷는 게 좋았다. 고개를 돌려 이리저리 돌아보던 해연은 밖에 나와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길을 걷는 내내 작고 큰 한옥들이 보였지만, 모두 창이 닫혀 있었다.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었다. 닫힌 창문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보면 아직 잠들지 않은 것 같은데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왠지 모를 선득한 기분에 해연은 이현의 손을 꽉 잡았다.

“사람이 아무도 없네요.”

“다들 지겹게 봤던 거라서요.”

“그래도 첫눈이잖아요.”

“……그 이유까진 저도 모르겠어요.”

이현의 대답에 해연이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도 모르겠지. 당사자가 아니니까. 자신이야 이곳에 처음 오니 모든 게 생소하고 신기했지만, 원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공간일 테지. 그럼에도 묘한 불안감이 떠나지 않는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그렇게 이상해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이현의 물음에 해연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아무도 안 보는 게 신기했어요.”

“당신이 보잖아요. 그럼 된 거죠.”

“그래도 아깝잖아요. 이렇게 예쁜데.”

눈에 보이는 아무 곳이나 찍어 온라인에 올리면 분명 대체 여기가 어디냐고 난리가 날 만한 풍경이었다. 지금 자신으로서는 아무리 봐도 지겨워질 것 같지 않은데 실제로 살다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되는 걸까. 그래. 그런 걸 거야.

사람이 보이면 보이는 대로 불편할 거면서. 그의 친인척들을 보며 어색하게 인사할 걸 생각하자 끔찍했다. 해연은 자신이 괜한 생각을 했다고 반성했다.

이현이 해연의 허리를 손으로 감싸 부드럽게 당겼다.

“가요. 시간을 너무 끌었어요.”

“아, 맞다. 우리 강아지 보러 가는 길이었죠.”

별것도 아닌 거에 정신이 팔려 잊어버리고 있었다. 해연은 군소리 없이 이현을 따라갔다.

* * *

개의 해산실은 굉장히 호화로웠다. 자신의 집보다 훨씬 좋아 보였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해연은 개보다 못한 집에 살고 있다는 자괴감마저 살짝 들었다. 부자와 서민의 극단적인 단면을 이런 식으로 느끼고 싶지 않았는데…….

해연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이현의 집에 되도록 오지 않는 게 좋겠다고 느꼈다. 고작 개의 방을 보고 든 생각치고는 유치했지만, 아마 이현과 계속 만나면 이런 기분을 더 느끼게 될 것이다. 자격지심의 발로겠지만, 그만큼 다르다는 거니까. 해연은 이현과의 미래가 자신 없었다. 지금도 이런 기분을 느끼는데 결혼을 한다면 매 순간순간 이질감을 느껴야 할 테니까. 되도록 좋은 생각을 하며 이현과 지내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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