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해연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그에게 주려고 했지만, 단추를 풀자마자 그가 더욱 단단하게 여몄다.
“그거 나한테 안 맞아요. 난 괜찮으니 입고 있어요.”
“하지만.”
“별로 추위 안 타요. 봐요.”
“무슨 짓이에요!”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현은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내렸다. 아무리 봄이 오고 있고, 햇빛이 환한 낮이라고 하더라도 겨울이었다. 서늘한 공기에 선명하게 드러난 하얀 피부에 해연이 놀라 그의 벌어진 셔츠를 잡고 안으로 오므렸다.
“정말 안 추운데.”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셔츠는 입고 있어요.”
아무리 그가 괜찮다고 하더라도 제가 괜찮지 않았다. 해연은 거의 끝까지 풀린 단추를 하나하나 여몄다. 목 끝까지 단추를 끼우고 나서 걷어 올린 팔 부분도 내렸다. 이현은 그런 해연을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걱정돼요”
“당연하죠.”
“나 걱정해 주는 사람은 당신뿐이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뒤에 서서 그들을 보고 있는 안주희라는 여자만 보더라도 고작 한번 왔던 자신을 위해 옷장이 가득 차도록 옷을 준비해 놓았다. 그건 해연이 이현의 연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를 걱정하는 사람이 자신뿐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정말인데.”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 소리를 들으면 다들 속상해 할 거예요.”
“흐음.”
이현이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해연이 엄격한 얼굴을 했다. 이현은 그런 해연의 표정이 좋았다. 감히 자신을 향해 그런 표정을 짓는 사람은 없었다. 인간과 동족을 통틀어 그녀뿐이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도, 혼을 내는 사람도. 그는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는 해연을 번쩍 들어 올렸다.
“뭐, 뭐예요!”
“추워 보인다면서요. 따뜻한 옷을 입은 해연이 안아 줘요.”
“무겁잖아요.”
“하나도 안 무거워요. 살을 좀 더 찌워야겠어요.”
내려달라고 재차 말해도 이현은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해연은 그의 목에 팔을 둘러 안는 것으로 포기했음을 알렸다. 이현의 키보다 올라간 시야에 자신들을 보고 있는 주희가 들어왔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지만, 웃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해연은 조금 민망해져 이현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홧홧하게 오른 열이 식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얼굴을 가려요. 앞을 봐요. 정원 구경하러 나왔잖아요.”
“……당신 때문이에요.”
자신의 타박에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해연은 몸의 떨림으로 그가 웃고 있음을 알았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한숨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이현과 함께하니 원래도 멋진 정원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는 정말 그녀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여유롭게 걸었다. 혹시라도 무게가 더 느껴질까 잔뜩 긴장한 채 몸에 힘을 주고 있던 해연도 마음 편하게 그에게 몸을 기댔다.
정원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현이 멋들어지게 휜 처마가 인상적인 정자를 가리키며 한 말에 그 감상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저기 정자가 우리가 처음 섹스한 곳이에요.”
“……네”
“몰랐어요 당신이 하도 보채서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어요. 아, 그날 정말 좋았는데. 또 저기서 할까요”
“거짓말이죠”
제발 거짓말이라고 말해요. 해연이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하지만 이현은 그런 해연의 마음을 모르는지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아무도 안 봤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정말 저……기서 했다고요”
“네. 그날 해연이 너무 야해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
“생각난 김에 오늘 할까요 별채에 사람을 다 물리면 되는데. 아무도 해연을 못 보게 할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당장이라도 정자로 걸음을 옮기려는 이현의 기세에 해연이 식겁하며 그의 등을 손바닥으로 쳤다. 설마 들었을까. 해연이 잔뜩 붉어진 얼굴로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고 있던 주희를 바라봤다. 거리가 멀어서인지 못 들은 것 같아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부끄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해연은 또다시 이현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아, 정말이지.”
“왜 부끄러워해요 우리가 좋았으면 됐죠.”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말아요. 이현이 그녀를 위로하려 할수록 더 자괴감이 들었다. 그는 수치심이라는 것 자체가 없는 사람 같았다.
그는 해연을 품에 안은 채 정자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터라 해연은 그가 정자에 도착하고서야 이를 알아차렸다. 대체로 다정한 편이지만, 상식적인 부분에 있어서 그는 정말 자신과 달랐다. 워낙 뻔뻔하고 태연하니 그녀 혼자만 부끄러워해 봤자 의미가 없는 일일 것이다. 해연은 반쯤 포기한 채 정자를 둘러봤다.
“별로 의미가 없는 곳이었는데, 이제는 특별해졌어요.”
“……정말 특별하네요.”
그가 말하는 특별하다는 의미와는 전혀 다르겠지만.
해연은 고풍스러운 정자의 아름다움에 넋을 놓았다. 신선이 살고 있을 것 같다. 주변의 정광과 어우러지니 더 아름다웠다. 넋을 놓고 보고 있는데 하늘에서 눈이 떨어졌다. 포슬포슬하고 도톰한 함박눈이었다.
“눈이 와요.”
“……좋아요”
“사실 다 크고 나서는 별로 안 좋아했는데, 여기서 보니까 좋아요.”
나이가 드니 동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눈이 많이 와 봤자 출퇴근만 힘들어질 뿐, 보기 좋은 것 빼고는 딱히 좋은 점이 없었다. 눈이 쌓이면 처음에는 하얗고 예쁘지만,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면 곧 더러워진다. 그리고 남은 눈이 추운 날씨에 얼면 자칫 넘어질까 조심조심 걸어야 하는 것도 일이었다. 특히 해연의 집 주변에 언덕이 높고 그늘이 많이 지는 골목이 많아 더 그랬다.
그랬는데, 지금은 좋았다. 이현과 함께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메마른 어른의 시선에서 한 단계 내려간 것 같았다. 이런 여유를 언제 느껴봤더라. 해연은 편안한 얼굴로 보송보송한 눈송이를 구경했다.
이현은 특유의 새까만 눈으로 그녀를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현의 시선을 느낀 해연이 시선을 내렸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부끄러워졌다. 조금 전엔 수치심을 동반한 부끄러움이었다면, 지금은 심장이 간질간질해서 부끄러웠다.
“나와 함께 봐서 좋은 게 아니라”
“그런 것도 있고요.”
솔직한 말에 남자가 소리 내어 웃었다. 해연은 발갛게 물든 뺨을 가리려 다시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 함박눈은 더 많은 양이 내려 하늘이 하얗게 보였다. 아니 꼭 붙어 있는 그를 제외하고는 온통 하얀 눈으로 덮어졌다. 투명한 얼음이 맺혀 있던 마른 가지 위로 소담하게 눈이 쌓여 눈꽃이 피었다. 딴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멋있어요.”
“마음에 들어요”
“네. 나중에 돈 많이 모으면 단독저택을 구해도 좋을 것 같아요.”
이 정도까지 꾸미진 못하겠지만, 비슷한 정원도 갖고 싶었다. 커다란 개도 키우고 여유 있는 전원생활을 하는 것이 해연의 최종 꿈이었다.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이현의 표정이 점점 묘해졌다.
“그럴 필요 있어요”
“네”
“해연은 나와 결혼할 거고, 나와 결혼하면 이곳이 전부 당신 것이 되는데. 왜 당신의 미래에 내가 없는 것처럼 말해요”
“…….”
“우리 결혼을 전제로 만나기로 했잖아요.”
진심이 아니었어요
웃고 있던 입술이 처연하게 내려갔다. 해연은 무심결에 한 말에 큰 의미를 두고 해석하는 그에게 당황해 순간 말을 잃었다. 포슬포슬하던 눈이 차가운 바람에 날려 거칠어졌다. 워낙 입고 있는 옷이 따뜻해 춥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었지만, 가벼운 셔츠만 입은 이현이 걱정돼 해연은 그의 목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현은 그런 그녀의 품을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마음이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내 몸만 좋은 거죠”
“무슨 말이 그래요”
“나 가지고 놀다 버리려는 거 아니에요”
아, 정말 못 참겠다. 해연은 결국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외모만 보면 숱한 여자의 마음을 가지고 놀 사람은 이현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매달리고, 또 삐진 척 툴툴거리는 게 그렇게 귀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설마 찔려서 웃음으로 회피하는 건가요”
“정말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왜 자꾸 웃어요”
해연은 웃음을 꾹 밀어내고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귀여워서 웃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잖아요.”
“왜 말이 안 돼요”
“남들에게 물어봐요. 누가 누굴 가지고 놀게 생겼는지.”
“남들 말이 뭐가 중요해요. 나는 당신과 끝까지 함께 있을 미래를 생각하고 있고, 당신은 그렇지 않다는 게 중요한 거죠.”
농담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이현은 생각보다 심각해 보였다. 가볍게 말을 받아쳤던 게 무안해져 해연은 말을 고르고 골랐다.
“음. 남들 말이 중요하지 않다는 거에는 동의해요. 그건 내가 말실수했어요. 하지만 나도 진지하게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줘요.”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요. 항상 혼자만 있어서.
해연은 그의 귓가에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은 긍정보다 부정적인 마음이 더 컸지만, 그건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그와의 미래를 그릴 수가 없었다. 너무 달라서.
지금이야 손님으로 있으니 잘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일견에도 그와 자신은 수준의 차이가 너무 현격했다. 이런 고풍스럽고 호사스러운 저택을 유지할 만한 부자. 게다가 고용인들만 하더라도 품위가 있었다.
단순히 돈을 지급하고 부리는 고용인 같지 않았다.
이런 집안의 주인이라는 남자와 결혼이라니. 부담스러워서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였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너무 무겁지 않은 가벼운 연애만을 생각할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