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그동안 본가에서 나름 통제하긴 했다. 하지만 완벽한 통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예 인성이라는 것이 제거된 것처럼 반쪽으로 태어나는 불량품들이 많기도 하고, 숨어서 지내니 찾기도 힘들었다. 여자의 생명을 생각한다면 가둬 두는 편이 편할 텐데…….
사실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닌가
그냥 가지고 노는 정도라면 또 이해가 간다. 윤시후는 주인이 언제가 저 여자를 집어삼키리라 확신했다. 고작 섹스만으로 끝내기엔 여자는 너무나도 먹음직스러웠기 때문에. 그래도 자칫 잘못해서 저 맛있는 인간을 다른 놈들에게 뺏기는 건 아쉬운 일인데……. 윤시후는 저도 모르게 통제가 안 되는 입을 다시 나불거렸다.
“그냥 먹어 버리는 건 어때요 겸사겸사 나도 한입만 주면,”
“윤시후.”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주인의 얼굴이 서늘했다. 윤시후는 눈을 아래로 내렸다. 아무리 제멋대로 행동하는 윤시후라도 지금 함부로 입을 나불대면 큰일 날지도 모른다는 건 알았다. 주변 공기가 날카롭게 요동쳤다. 부실한 창문이 덜컹덜컹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이렇게 시끄러운데 주인의 보호를 받는 인간 여자는 평온한 표정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자신이 여자를 잠시 바라본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주인의 기운은 점점 더 싸늘해져 갔다. 윤시후는 아예 눈을 감았다. 더 개겼다가는 작살이 날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 개가 주인의 말에 토를 달았지”
“나는 개가 아니라……, 잘못했습니다.”
그때, 여자가 몸을 뒤척이며 옅은 소리를 냈다. 그 순간 주인의 기운이 완벽하게 소멸했다. 한결 숨쉬기가 편해졌음에도 윤시후의 얼굴에 불만이 덧붙었다. 주인에게 인간 여자가 특별한 존재라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하필 인간 따위를. 이제는 식인을 금지했다 하더라도, 일족에게 인간은 먹이일 뿐이었다. 주인이 보호하고 있는 여자는 보통의 인간보다 조금 더 청결하고 끝내주는 냄새가 났지만, 그렇다고 특별해 보이진 않았다.
주인은 저 인간을 상대로 무엇을 하려는 걸까. 정말 먹이가 아닌가 그렇다고 하기엔 주인에게서도 미묘하게 여자의 냄새가 났다. 섹스 따위로 배었다고 하기에는 좀 더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부에서 섞인 느낌. 윤시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꼭 여자의 피와 살을 먹은 것처럼. 그런 냄새가 났다.
* * *
잠들기 전에는 분명 자신의 집이었는데, 일어나니 이현의 침대였다. 해연은 제멋대로 저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이현을 황당하다는 듯 바라봤다. 처음에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냐는 듯 뻔뻔한 얼굴을 하더니 해연이 진심으로 화가 난 걸 깨닫고 기죽은 얼굴을 했다.
강이현이라는 남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잘생겼고, 그녀가 제 얼굴에 약하다는 걸 알고 잘 이용했다. 해연은 남자의 꾸며 낸 얼굴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마음을 단단히 단속했다. 여기서 저 얼굴에 넘어갔다간 계속 이렇게 제멋대로 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왜 내가 여기에 있어요”
“여기 와야 할 일이 생겨서요.”
“그럼 혼자 갔어야죠. 아니면 나한테 물어보든가요.”
“같이 있고 싶었어요. 물어보려면 깨워야 하는데, 해연이 너무 예쁘게 자고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어요.”
“아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쉽게 넘어가면 안 돼. 해연은 소름이 끼칠 만큼 달콤한 이현의 말에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기분이 좋아서 웃음이 나온다기보다는 그의 말이 너무 닭살 돋아서였다. 저렇게 산뜻한 얼굴을 하고 느끼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하지만 눈치 빠른 남자는 반쯤 화가 풀린 해연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 응”
“……정말이죠”
아직 풀리면 안 된다고 아무리 세뇌해 봤자 제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완전히 누그러진 채였다. 여기서 더 화난 척해 봤자 우습기만 할 뿐이다. 해연은 결국 픽 웃었다.
“어떻게 그런 느끼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가 있어요 으, 닭살 돋은 거 보여요 진짜 소름 끼쳤잖아요.”
해연이 소매를 걷어 올려 팔에 올라온 닭살을 보여 주자 이현은 충격받은 얼굴로 입을 벙긋거렸다.
“난 진심이었는데…….”
“네”
“내 말이 그렇게 소름 끼쳤어요 정말”
“…….”
“내 눈엔 당신이 가장 예뻐요.”
으음. 목 안쪽까지 두드러기가 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해연은 가능한 침착한 얼굴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가 이곳에 다시 돌아온 목적을 상기시켰다.
“급한 일 있다면서요. 빨리 다녀와요.”
“안 급한 일이에요.”
“저기 저분은 급해 보이시는데요…….”
해연은 살짝 열린 문 근처에서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해연의 눈짓을 따라 이현도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이현의 짜증 난 표정에 황급히 시선을 피했지만, 그 자리에서 물러서지는 않고 버텼다.
이현이 다시 고개를 돌려 해연을 바라봤다.
“곧 돌아올게요.”
“응. 다녀와요.”
가겠다고 말을 하더니 이현은 움직이지도 않고 해연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해연은 이현의 어깨를 밀었다.
“빨리 가요.”
“음.”
“어서요.”
“으음.”
이현은 별로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잠시 미적대다 다시 그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 일어섰다. 그가 나가자 넓은 방 안에 해연 혼자 남았다. 잔향처럼 남았던 그의 냄새 역시 얼마 후 금세 가셨다. 괜히 공허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해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방을 둘러봤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둘러볼 정신이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그가 덮쳤기 때문이었다. 다시 떠오른 그 문란했던 며칠 밤으로 인해 해연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손 부채질하며 얼굴을 식힐 때 문이 열렸다. 벌써 돌아온 걸까. 반색하며 돌아보니 우아한 한복을 입은 젊은 여자가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지난번에도 봤지만, 쪽빛의 고운 한복을 입은 여자는 무척 아름답고 선량해 보였다.
“일어나 계셨네요.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실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습관적으로 먼저 거절했던 해연은 며칠 전 이곳에서 나올 때 봤던 정원이 떠올랐다. 겨울임에도 정원은 아름다웠다. 디자이너인 그녀에게 이현의 공간은 창작력을 자극하는 곳이었다. 이현이 돌아오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테고, 그렇다면 그 시간 동안은 잠시 둘러봐도 괜찮으리라.
“정원을 구경하고 싶어요.”
“안내해 드릴게요.”
해연의 요구가 달가웠는지 여자는 활짝 웃으며 벽 한쪽에 있는 옷장을 열었다. 옷장에는 여성의 옷과 남성의 옷이 반반 나뉘어 걸려 있었다. 신중한 얼굴로 부드러운 재질의 코트를 꺼내 들더니 해연에게 건넸다.
“어, 입어도 될까요”
주인이 있는 옷일 텐데. 게다가 값비싼 브랜드에 어두운 해연이 보기에도 코트는 굉장히 고급스러웠고 비싸 보였다.
“어머, 여기 있는 옷은 모두 해연 님과 이현 님의 소유인걸요.”
“제, 거요”
“네. 며칠 전에 오셨을 때 눈대중으로 사이즈를 재서 맞췄어요. 언제든 오시면 편하게 입으실 수 있도록요. 지난번에는 갑작스러워서 준비를 제대로 못 해 마음에 걸렸는데, 이현 님 덕분에 옷을 걸치실 시간도 없으셔서 다행이었어요.”
“…….”
여자의 눈길이 은밀해졌다. 그녀가 말하는 게 뭔지 정확히 알아차린 해연의 얼굴이 훅 붉어졌다. 그녀의 말대로 지난번에 이곳에 왔을 때는 이현이 시도 때도 달려들어 옷을 입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해연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슬쩍 시선을 피하자 여자가 밝게 웃었다.
여자의 호의는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이현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집에 적응해서 그런지 이제야 그와 자신의 격차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결혼해 달라고, 결혼을 전제로 만나 달라던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때는 결혼이라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워 생각도 못 했는데 과연 이런 집안에서 자신을 받아들일까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사는 세상이 너무 다르면 맞춰 살기 힘들다고 들었다. 그 말 그대로 해연은 이현의 세상에 적응할 자신이 없었다. 해연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여자의 표정도 조심스러워졌다.
“혹시 제가 실례되는 말을 한 걸까요”
“아, 아니에요. 그냥 다른 생각을 하느라. 신경 쓰지 마세요.”
“해연 님을 잘 모시는 게 제 일인걸요. 제가 불편하게 했다면 꼭 말씀 주세요.”
잘 모신다니. 여자의 말이 계속 이어질수록 마음의 부담은 더 깊이 쌓여만 갔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자는 해연의 말을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래도 별다른 말 없이 상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자, 어서 입으세요. 밖이 추워서 따뜻하게 입으셔야 해요.”
거절하면 또 부담스러운 반응이 돌아올 게 분명했다. 해연은 반쯤 포기한 기분으로 순순히 그녀가 건네는 코트를 입었다.
* * *
역시 나오길 잘했다. 정원은 아름다웠다. 잠시 오가다가 힐끔 봤을 때도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천천히 길을 걸으면서 보니 장관이었다. 우아한 라인으로 휘어진 나뭇가지에는 얼음이 맺혀 있었다. 겨울이어도 이제 슬슬 봄이 오고 있었기에 낮의 태양은 따뜻했다. 가지에 맺힌 얼음에서 살짝 녹은 물이 점점이 떨어졌다. 그조차도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곳을 그대로 가상 공간에 재현해 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조형된 곳이었다.
“너무 예뻐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안주희이라고 밝혔던 여자와 함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해연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이현”
이현이 입가에 미소를 매달고 그녀의 옆에 섰다. 주희는 어느새 뒤로 빠져 그들을 보고 있었다.
“안 추워요”
“이현이야말로 안 추워요”
자신은 코트를 입고 있어서 따뜻했지만, 이현은 가벼운 셔츠와 발목까지 오는 슬랙스만 걸치고 있었다. 셔츠도 팔꿈치까지 접어 올려서 드러난 살이 너무 많았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였던 터라 더 추워 보였다. 해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했지만, 그는 옅은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